경기·호서 등의 유생 김희용 등 9천 9백 96명이 서얼 문제에 관해 상소하다
경기·호서·호남·영남·해서·관동의 유생(儒生) 김희용(金熙鏞) 등 9천 9백 96명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인(聖人)의 정사는 인륜을 밝히어 근본을 돈독히 하는 데에 있고 생민의 도리는 종통(宗統)을 높이고 분의(分義)를 다하는 데에 있는데, 여기에 조금이라도 결함이 있으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이 막혀서 유행되지 않으니, 이 점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 등은 충현(忠賢)의 후예이고 사대부의 족속으로서 조정에서나 집에서나 모두 버림을 당하고 억울함을 안고 답답하게 살아온 지 4백여 년이 되었는데, 마치 궁한 사람이 돌아갈 곳이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다행히 성명(聖明)의 시대에 오랫동안 도(道)로 다스려 교화가 이루어졌고 깊은 사랑과 후한 은택을 베풀어 어느 하나 성취되지 않은 사물이 없는데, 신 등이 한갓 분의만 두렵게 여기고 사정을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고루 감싸주신 하늘과 스스로 담을 쌓는 격이므로, 감히 서로 이끌고 나가 이와 같이 아뢰는 바입니다. 대체로 이른바 종통을 높이고 근본을 돈독히 한다는 것은 아비의 계통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례(儀禮)》의 전(傳)에 ‘짐승은 어미만 알고 아비는 모른다.’고 하였고, 야인(野人)은 ‘부모를 따질 것이 뭐 있는가?’라고 한 것입니다. 도읍(都邑)의 선비는 아비 높일 줄만 알고 대부(大夫)와 학사(學士)는 조상 높일 줄을 아는 것입니다. 덕이 더욱 높으면 대부와 학사가 조상을 높이는 것이 되고 재주가 더욱 낮으면 짐승의 어미만 아는 것이 되는데, 지금 사람의 축에 끼어 조상을 높일 줄 아는 대부나 학사를 따르지 않은 것을 도리어 어미만 아는 짐승으로 몰아붙여서야 되겠습니까?
성인이 예를 제정한 때에 어미의 일가붙이는 경하게 하고 아비의 일가붙이는 중하게 한 것은 어미의 일가붙이를 경하게 보아서가 아니라 아비의 일가붙이를 높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약간 경하게 한 것입니다. 이적(夷狄)은 짐승과 같은 무리입니다. 어미의 일가붙이만 중히 여기는 것은 이적의 풍속인데 중화(中華)의 문물(文物)이 융성한 고장에는 이런 풍속이 없습니다. 우리 동방은 신라 말엽 이후로 논의될 만한 윤리 문제가 매우 많았으나, 우리 성조(聖朝)에 이르러서는 예악(禮樂)과 전장(典章)이 찬란하게 구비되었습니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상례와 제례를 사용하고 《춘추(春秋)》의 존왕 양이(尊王攘夷)의 의리를 숭상하는 등 강상(綱常)을 펼치고 예의를 돈독히 하여 도리어 중화(中華)를 앞질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독 신들이 앙심을 풀려는 일개 소인의 논의로 인하여 이적으로 대하고 짐승으로 대한 채 오래도록 변할 줄을 모른단 말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걸핏하면 명분(名分)을 구실로 삼고 있는데, 명(名)이란 것은 그 위치를 정하는 것이고 분(分)이란 것은 위엄의 등분(等分)인 것입니다. 이는 가정에서 시작하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고 아우가 형을 형으로 여겨 아들과 아우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바로 이 명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호칭할 때 도리어 노복이 상전에게 하는 예를 본받음으로써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일상의 떳떳한 정리까지 막히어 유행되지 못하게 하니, 명(名)의 바르지 못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명이 바르지 못한데 분(分)이 어디에 시행되겠습니까? 이른바 명분이 여기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졌으니, 어찌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다같이 슬퍼하고 상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벼슬길을 막는 데 있어서는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정사에 지장을 줄 뿐만이 아니라, 신 등이 강상(綱常)에 분의를 다하지 못한 원인도 오로지 여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대체로 이 법이 한 번 시행된 뒤로는 관방(官方)에 관계된 것은 각각 정해진 자리가 있고 여러 갈래로 나뉘어 제한이 매우 엄격함으로써 세상에 나아가 쌓인 포부를 펴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비록 벼슬길을 열어주었다고 하지만 실은 열어준 것이 아닙니다. 다같이 이 세상에 나서 한(漢)나라의 위청(衛靑)107) ·곽거병(霍去病)108) 과 진(晉)나라의 배수(裵秀)·완부(阮孚)109) 와 당(唐)나라의 소정(蘇頲)·두고(杜羔)·두순학(杜荀鶴)110) 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록 한기(韓琦)111) ·범중엄(范仲淹)112) 과 같은 재기(材器)와 진관(陳瓘)113) 추호(鄒浩)114) ·호인(胡寅)115) 과 같은 학문이 있다 하더라도 필시 어미가 천하다고 버렸을 것이니, 그 자신이 낭묘(廊廟)에 오르거나 세상의 명유(名儒)가 되는 것은 논할 것조차도 없을 것입니다. 무릇 풍속을 바꾸는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권한입니다. 잘못된 습속을 답습하여 오랜 세월을 경과하다가 극도에 이르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는 것인데, 이 역시 물리(物理) 상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떻게 다만 견문(見聞)에 익숙해졌다는 이유로 변통할 바를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열성조에서 특별히 불쌍하고 민망하게 여기어 여러 차례 유시를 내리셨는데, 이는 지난날의 사첩(史牒)에도 소상하게 실려 있습니다. 지금 감히 하나하나 다 아뢸 수는 없습니다만, 지난 성종조 때 마침 가뭄을 만나 서류(庶類)를 금고(禁錮)한 것에 허물을 돌리시고 마음에 측은하게 여기시어 경장(更張)하려고 하시다가 갑자기 승하하셨고, 선조조에는 신분(申濆)의 상소에 답한 비답에 신하로서 충성하고 싶은 마음은 어찌 꼭 적손(嫡孫)뿐이겠는가?’라고 하셨으며, 인조조에서는 ‘벼슬길이 너무나 좁으니 재능에 따라 의망하라.’고 명하셨고, 현종조에는 일찍이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건의할 때에 역시 옛날의 범위가 너무나 좁았다고 탄식하셨으며, 숙종조에도 널리 조정 신하들에게 묻고 누차 변통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조조에는 매양 선왕의 뜻으로 하교하고 심지어 임진년116) 의 처분이 있었습니다. 그 하교에 ‘서류는 양반이 아니었던가? 하나의 유자광(柳子光)으로 인하여 청직(淸職)의 길을 나가지 못하도록 금하였다면, 무신년117) 과 을해년118) 에는 〈서얼(庶孽)이〉 한 명도 없었으니 모두 충신이란 말인가? 절대로 구애하지 말고 건국 초기의 풍속을 존속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대왕께서는 즉위하신 초년에 특별히 벼슬길을 소통시키는 방도에 진념하여 조목조목 절목(節目)을 아뢰게 하셨으나, 조정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참작하여 정한 것이 품계를 제한하여 옛날처럼 막은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성상께서 제한이 아직도 많아 적체된 것을 소통시킬 수 없다고 여기시어 하교하시기를 ‘이들도 사족(士族)의 후손인데, 어떻게 여염의 미천한 부류들과 동등하게 하여 제자리를 얻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역시 과인의 잘못이다. 인륜의 떳떳한 호칭을 알려고 하면서 도리어 천리 밖 풍속이 같지 않은 습속을 사모하고 있으니, 조정의 관직이 어찌 사대부의 등급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로 전조(銓曹)에 통망(通望)하라고 하신 주의나 태학에서 나이의 순으로 서열을 정하라고 하신 유시는 기어코 점차 길을 트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이에 대해 더욱 간절히 말씀하셨으나 승하하신 바람에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세상이 다하도록 못 잊어하는 마음은 팔도의 사람이면 똑같은 것입니다만, 신 등에 있어서는 부모를 잃은 듯한 슬픔이 더욱 간절합니다.
그리고 역대의 명유와 석학들도 모두 소통의 논의를 극력 주장하여 기어코 시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고(故)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문열공(文烈公) 송시열(宋時烈),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 고(故) 상신(相臣)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 문익공(文翼公) 윤방(尹昉), 문충공(文忠公) 최명길(崔鳴吉),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 문충공(文忠公) 오윤겸(吳允謙), 문정공(文正公) 최석정(崔錫鼎) 등이 상소나 계사로 진달하여 말뜻이 간곡하고 측은하였는데, 거기에서, ‘신하로서 충성하고 싶은 마음은 어찌 적손과 서손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이토록 편협합니다.’라고 하였고, ‘우리 조정에서 나라를 운영하는 대신들은 그들의 자손만 생각했지 만세토록 인재를 잃는다는 우려는 미처 생각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으며, ‘예제(禮制)의 규정이 삼대(三代) 때보다 더 엄한 적이 없었으나 적손과 서손의 명칭은 사가(私家)에서만 시행되었지 조정에서는 시행되지 않았으며, 문벌을 숭상하는 것은 육조(六朝)119) 때보다 더한 적이 없었지만 사람을 쓸 때에는 아비의 성만 묻고 어미의 일가붙이는 묻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고, ‘비록 재능과 덕망이 출중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눌려서 드러나지 못하고 배척하여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부자의 윤기와 군신의 의리가 없어졌으니, 이보다 더 천리(天理)를 거스리고 인기(人紀)를 손상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서얼을 천대하는 것은 천하 만고에 없는 법이니, 왕자(王者)가 어진이를 맞이할 때 제한이 없다는 도리에 결여됩니다.’라고 하였고, ‘서얼을 금고(禁錮)하는 것은 족히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뜻을 손상하는 것으로서 선왕(先王)의 공명 정대한 정사는 아니니, 통용(通用)하는 조치가 있어야 매우 합당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서얼을 제한하는 법은 애당초 조종조(祖宗朝)에서 정한 제도가 아니었습니다.’라고 하였고, ‘우리 나라에서 사람을 쓰는 범위가 너무나 좁아 문벌 외에는 아무리 기특하고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등용될 수 없으니, 만일 상규(常規)만 따르고 구례(舊例)만 지킨다면 끝내 안팎의 인심을 수습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사가 목이 마르고 부황(浮黃)이 나 움막 속에서 즐비하게 죽어가고 있으니, 필부(匹夫)가 원한을 품어도 족히 화기(和氣)를 상하는 것인데 더구나 그 수가 이렇게 많으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고, ‘옛날에는 후한 예절과 두둑한 폐백으로 이웃 나라의 어진이를 대우하면서 오지 않을까 걱정하였는데, 지금은 법을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역내(域內)의 백성을 금고하여 혹시라도 등용될까 두려워하면서 정작 사변이 눈앞에 닥치면 매양 인재를 얻기 어렵다고 걱정합니다.’라고 하였으며, ‘시골 미천한 부류의 자식도 가끔 높은 벼슬을 하는데 세족(世族) 명가(名家)의 서손은 영원히 금고되어 버림받고 있으니, 용사(用捨)하는 즈음에 그 전도됨이 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이 모두 그 개략적인 것인데, 백분의 일도 거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소를 올리려다 미처 올리지 못하고 글을 올렸다가 퇴짜를 맞은 것으로 강설(講說)이나 기문(記聞), 비문(碑文), 행장(行狀), 문고(文稿) 등에 나타나 있는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데, 이 역시 통달한 식견과 넓은 지식을 가지고 나라를 위하여 끊임없이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매우 공명 정대한 그 논의는 천지에 내세우고 귀신에게 질정해 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의혹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서얼의 처지만 위한 것이겠습니까? 대체로 세도(世道)를 도와 하늘의 화기(和氣)를 이끌려고 한 것입니다. 서얼의 벼슬길을 막아야 한다는 논의를 제창한 자도 처음엔 서선(徐選)·강희맹(姜希孟)의 무리뿐이었습니다. 전후로 어진 신하들이 잇따라 그들의 말을 배척하였고 보면 사정(邪正)의 판가름이 흑백보다 더 명백하게 났는데도 잘못된 폐습이 고질화되어 이를 금석(金石)처럼 고수하였으니, 이 점을 신 등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종법(宗法)이 중하게 된 것은 《주례(周禮)》에서 비롯되었으나 적장(嫡長)의 명칭은 오직 종자(宗子)만이 해당되고 종자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아우부터 첩의 아들까지 서손에 속하기 때문에 아비가 적자(嫡子)와 중자(衆子)의 상(喪)에 입은 복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중자와 서자의 복이 다르지 않은 것은 적자는 두 개의 종통이 없고 중자와 서자는 똑같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적자가 없고 서자만 있을 경우 서자가 아비의 뒤를 잇는데, 서자가 장가를 가서 아들을 낳으면 중자의 자식과 같이 되니, 《예기(禮記)》에 이른바 서손이라고 한 것은 역시 아들이 첩을 얻어 낳은 아들을 말한 것이지, 첩의 아들을 서손이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삼대(三代) 이후 적손과 서손의 구별이 이와 같을 뿐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예전(禮典)에도 특별히 ‘적처나 첩 사이에 모두 아들이 없는 자는 후사를 세우게 한다.’는 글이 실려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선왕이 예를 제정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아비와 아들을 바꿀 수 없고 뒤가 끊겨야만 비로소 후사를 세우도록 허락한다는 뜻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그 누가 골육(骨肉)의 자애스러움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에게서 난 아들이 있어도 남처럼 보고 반대로 먼 일가붙이는 데려다가 아들로 삼아 할아버지와 아비의 혈연(血緣)이 연속되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어찌 관작으로 가문을 지탱하려는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후사를 잇는 것은 조상을 위하는 것이고, 관작은 후손을 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후사를 잇는 것이 도리어 경시되고 관작이 중하게 됨으로써 마침내 신 등으로 하여금 윤상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윤상이 없어짐에 따라 성세(聖世)의 버린 물건이 되었습니다. 어찌 매우 한스럽지 않겠습니까? 한집안 안에서는 적손과 서손의 구분이 있기 때문에 선정신 조광조(趙光祖)도 이 일로 건의하여, 동성(同姓)을 6촌까지 타성(他姓)은 4촌까지 제한해서 정해진 한계를 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만, 어찌 조정에서 적손과 서손의 문벌을 논한 적이 있었습니까? 조정에서 사람을 쓸 때 오로지 문벌만 숭상하기 때문에 신 등이 더욱 가슴이 내려앉고 답답해 하는 것은 바로 대대로 전해온 문벌을 보전하고 싶은 생각에서 입니다. 대체로 문벌을 숭상한 것은 진(晉)나라 시대부터 이미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문벌이란 것은 벼슬아치의 자식은 비록 서손이라 하더라도 사족(士族)과 같고 서민의 자식은 비록 적자라 하더라도 끝내 군대에 편입되었지, 외가가 높고 낮음에 따라 본종(本宗)까지 높히거나 낮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서얼은 한집안의 서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서얼이 되고, 온 세상의 서얼만 되는 것이 아니라 만세의 서얼이 되니, 천리로나 인륜으로나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현의 경전(經傳)이나 역대의 상전(常典)에서 찾아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신 등이 비록 몹시 불초하지만 사지[四體]는 사람들과 다름이 없고 칠정(七情)도 똑같이 하늘에서 품부받았으니, 나라에서 볼 때에는 다같은 교목 세신(喬木世臣)의 후예이고, 조상의 입장에서 보자면 본래 한 뿌리에서 나온 자손들입니다. 그런데 한 번 서손이라는 이름이 붙자 일신만 금고(禁錮)되고 폐기될 뿐만 아니라, 대대로 영구히 철벽처럼 벼슬길이 막혀 있어서 도리어 뿌리나 파(派)도 모르는 향품(鄕品)이나 한미(寒微)한 족속들이 세상에 구애받지 않는 것보다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사람으로 대우하려고 하지 않고 저들도 감히 사람으로 자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려서 배웠다가 커서 실행한다고 성인이 가르치셨는데 죽는 날까지 애써 공부를 해 보았자 필경에 무엇을 성취하겠습니까? 혁혁한 가문을 계승한 것을 사람들이 부러워하지만 문호(門戶)가 나뉘어 외딴 산골에 움츠리고 살면서 마치 죄나 지은 것처럼 하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이지만 신 등과 같은 사람은 울분을 풀지 못한 채 머리가 점점 커서 철이 조금 들면 원하는 바는 바로 죽음입니다. 대체로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폐기된 물건으로 자처하여 천지 사이에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무한한 곤고를 치르므로 차라리 죽어 아무것도 모르느니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당(唐)나라 신하 육지(陸贄)120) 의 말에 ‘성왕(聖王)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마치 옥(玉)이 든 박(璞)을 던져버리면 돌멩이나 갈 뿐이지만 다듬으면 규장(圭璋)이 되는 것과 같으며, 물이 나는 근원을 막으면 썩은 물이 될뿐이지만 터놓으면 시내도 되고 못도 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돌멩이나 규장, 썩은 물이나 시냇물 등이 애당초 두 개의 판이한 물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 등의 처지는 흡사 내동댕이친 박이나 막아버린 물과 같으니, 한가닥 구구한 마음이 어찌 다듬어 주고 터주기를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영조조에는 ‘서얼이 일국의 절반을 차지하였다.’고 하교하셨고, 선대왕께서도 좁디 좁은 나라에서 서류(庶類)를 빼면 일국의 절반을 잃은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출생은 날마다 늘어나는데 낳는 족족 금고시키면, 그 원한이 더욱 심해지고 그 울분이 더욱 쌓일 것입니다. 전후로 크고 작은 공론이 제기될 때마다 화기(和氣)를 해친다는 말로 신 등을 지적해 왔는데, 비록 신 등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해 보라고 하더라도 원통에 사무쳐 감히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의 궁박한 사정은 아플 때에 부르짖는 것보다 더더욱 심하니, 벼슬의 현달을 의논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신 등이 사람의 축에 끼지 못한 것은 관작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찌 감히 사소한 혐의가 두려워 지극한 심정을 드러내지 않아 해와 달처럼 사(私)가 없으신 성상으로 하여금 아랫사람의 실정을 통촉하지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관작이란 나라의 당당한 공적인 기구이니, 인재를 격려하고 어질고 어리석은 자를 선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조(銓曹)에서 선발하는 때에 제한만 존속시키고 주의(注擬)할 때 현저히 차별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천박하게 여기는 습성이 이루어져 고루한 것을 변통하기 어려우니 신 등이 비록 의관(衣冠)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네발로 기어 다니고 부리로 숨을 쉬는 무리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향학(鄕學)에 있어서는 인재를 육성하는 곳인데도 유사가 문안을 조사하다가 일개 역적 이율(李瑮)의 거짓 통문(通文)으로 인하여 길을 터주었다가 곧바로 막아 좋은 법규(法規)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향당(鄕黨)과 서숙(書塾)에서 배척하는 풍조가 조성되고 제사지내는 곳에 양보의 미덕이 땅을 쓸 듯이 없어짐으로써 융성한 시대에 수치거리를 끼쳤으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대체로 습속의 좋고 나쁜 것은 오직 벼슬길의 막히고 트임에 비례하는데, 벼슬길의 막히고 트임은 오직 선발과 추천의 사이에 차별과 제한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인물을 차별하고 제한하는 것은 선왕의 정전(定典)이 아니고 이륜(彛倫)을 바르게 펴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고 보면, 이를 경장(更張)하는 일이야 어찌 잠깐 사이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은 잠시라도 목숨을 부지하여 좋은 시대를 보기를 원하고 있던 차에 울분을 반드시 풀 때를 당하였으므로 발을 싸매고 멀리 와서 피눈물을 흘리며 성상께 호소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우리 열성조의 지극하셨던 뜻을 본받으시고 또 여러 명유와 석학들의 논의를 직접 들으신 것으로 여기셔서 굽어 받아들여 특별히 처분을 내려 주심으로써 신 등으로 하여금 집에서 종통을 높이는 도리를 다하고 조정에서는 근본을 독실히 하는 정사를 밝혀 습속이 크게 변하고 혜택이 두루 미치게 하소서. 그러면 어찌 산 사람만 결초보은(結草報恩)하려고 하겠습니까? 또한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한 귀신들도 백골에 미친 후한 은혜를 칭송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의 가긍한 정상을 나도 깊이 알고 있다. 상소의 사연을 묘당으로 하여금 제일 좋은 방도에 따라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22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신분(身分) / 가족-가족(家族)
- [註 107]위청(衛靑) :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사람. 본성은 정씨(鄭氏)임. 그의 아버지 정계(鄭季)가 평양후(平壤侯) 조수(曹壽)의 창첩 위온(衛媪)과 통하여 청(靑)을 낳아 어미의 성을 따르게 되었음. 어릴 때에 적모(嫡母)의 아들들이 종[奴]처럼 대하였는데, 겸도(鉗徒: 죄수) 하나가 보고 귀인이 될 상이라고 하였음. 위청의 동모자(同母姊) 위자부(衛子夫)가 무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위청을 태중 대부(太中大夫)로 삼았음. 위청은 일곱 번 흉노를 쳐서 번번이 대공을 세워 위엄이 외지에까지 떨쳤으나, 사람은 인자스럽고 겸손하였음.
- [註 108]
곽거병(霍去病) : 한 무제 때 사람. 위청(衛靑)의 생질. 현리(縣吏) 곽중유(霍仲儒)의 천첩 소생으로, 어려서부터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음. 처음에 표요 교위(嫖姚校尉)가 되어 흉노를 쳐서 공을 세우고 전후로 여섯 번이나 출격하여 번번이 대공을 세웠으며, 낭거서산(狼居犀山:내몽고에 있는 산)까지 쳐들어가 봉표(封標)를 세우고 돌아와 표기 장군(驃騎將軍) 관군후(冠軍侯)가 되었음.- [註 109]
배수(裵秀)·완부(阮孚) : 배수는 상서령(尙書令) 배잠(裵潛)의 천첩 소생으로 후진(後晉)의 영주가 되고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르렀으며, 완부는 완함(阮咸)의 천첩 소생으로 그의 어머니는 선비(鮮卑)의 여종이었으나 벼슬이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음.- [註 110]
소정(蘇頲)·두고(杜羔)·두순학(杜荀鶴) : 소정은 소괴(蘇瓌)의 비첩(婢妾) 소생으로 당나라의 명상(名相)이 되고 허국공(許國公)에 봉해졌으며, 두 고는 어머니가 적실(嫡室)이 아니었으나 벼슬이 공부 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고, 두순학은 시인 두목(杜牧)의 창첩 소생이었으나 이부 상서에 이르렀음.- [註 111]
한기(韓琦) : 북송(北宋) 인종(仁宗)·영종(英宗) 때 사람. 어머니가 천하기로 일컬어졌으나,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벼슬이 사도 겸 시중(司徒兼侍中)에 이르렀고, 위국(魏國)에 봉해졌음. 천품이 충직하고 식견과 도량이 탁월하였는데, 두 번이나 대책(大策)을 결행하여 사직을 안정시키니 조야(朝野)에서 의신(倚信)하였음.- [註 112]
범중엄(范仲淹) : 북송의 인종·영종 때 사람. 2세 때에 아버지를 잃어 어머니가 데리고 개가(改嫁)하여 의부(義父)의 성을 따라 주씨(朱氏)로 행세하다가 장성해서야 알고 본성을 따랐음.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으며, 재주가 높고 뜻이 원대하였음. 시호는 문정(文正)임.- [註 113]
진관(陳瓘) : 북송(北宋) 말기 사람으로, 진세경(陳世卿)의 손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벼슬이 감찰 어사(監察御史)에 이르렀음. 학문이 높았고 강직하였는데, 채경(蔡京)이 해를 쳐다보면서도 눈을 깜박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가 뜻을 얻으면 방자 무기(放恣無忌)할 것을 알고 배척하였으며, 《존요집(尊堯集)》을 지어 왕안석(王安石)의 무망(誣妄)을 폭로하기도 하였음.- [註 114]
추호(鄒浩) : 북송 말기 사람으로, 철종(哲宗) 때에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장돈(章惇)을 논척하다가 파직당했고 휘종(徽宗) 때에 다시 우정언이 되어 병부 시랑(兵部侍郞)으로 옮겼으나 두번이나 귀양갔다가 용도각 직학사(龍圖閣直學士)가 되었음. 저서(著書)에 《도향집(道鄕集)》이 있는데, 학자들이 도향 선생(道鄕先生)이라 불렀음.- [註 115]
호인(胡寅) : 북송 말기에서 남송(南宋) 초기의 사람. 호안국(胡安國)의 조카로 양자(養子)가 되었음. 양귀산(楊龜山) 문하에서 배워 휘종(徽宗) 때에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이 휘유각 직학사(徽猷閣直學士)에 이르렀는데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학문이 고명하여 학자들이 치당 선생(致堂先生)이라 불렀음. 저서(著書)에는 《논어상설(論語詳說)》과 《비연집(斐然集)》 및 《관견(管見)》 30권이 있는데, 관견은 역사 평론으로 많이 인용되고 있음.- [註 116]
임진년 : 1772 영조 48년.- [註 117]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이 해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 났음.- [註 118]
을해년 : 1755 영조 31년. 이 해에 윤지(尹志)의 역모가 있었음.- [註 119]
육조(六朝) : 오(吳)·동진(東晉)·송(宋)·제(齊)·양(梁)·진(陳).- [註 120]
육지(陸贄) : 당(唐)나라 중기(中期) 사람. 나이 18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덕종(德宗)이 서자 한림 학사로 불렀는데, 신임이 두터워 재신(宰臣)이 있어도 국사의 결정에 많이 참여하여 내상(內相)이란 칭호를 들었음. 문재(文才)가 있어 주자(朱沘)의 난에 하루 수백통의 조서(詔書)를 지었으나 샘에 물이 솟듯 하고 막힘이 없었으며 모두 실정에 핍진하였음. 난이 평정되자 중서시랑 동평장사(中書侍郞同平章事)가 되었고, 《육선공한원집(陸宣公翰苑集)》이 있는데, 그 주의(奏議)는 더욱 유명함.○京畿、湖西、湖南、嶺南、海西、關東儒生金熙鏞等九千九百九十六人疏略曰:
聖人之政, 明倫而敦本, 生民之道, 尊宗而盡分, 苟於此一分欠缺, 則天理人情, 有所〔壅〕 閼而不行, 此不可不察者也。 臣等以忠賢之後, 簪纓之族, 於朝於家, 俱見廢棄, 齎冤茹鬱者, 四百有餘年, 如窮人之無所歸。 幸際聖明, 久道化成, 深仁厚澤, 無物不遂, 臣等徒以義分爲懼, 而不暴其情私, 則是自阻於均覆之天, 玆敢相率而陳之。 夫所謂尊宗而敦本者, 從父族也。 是故, 《儀禮》傳有曰, ‘禽獸知母而不知父’, 野人曰, ‘父母何計焉。’ 都邑之士, 知尊禰矣, 大夫及學士, 知尊祖矣。 德彌尊則斯大夫學士之尊祖矣, 才愈下則斯禽獸之知母矣, 今在生人之列, 不從尊祖之大夫學士, 反歸之知母之禽獸者, 其可乎哉? 聖人之制禮也, 輕母族而重父族, 母族非可輕也, 欲其尊父族, 故差輕之耳。 夫夷狄之於禽獸, 亦類也。 只重母族, 卽夷狄之俗, 而中華文物之鄕, 無是俗也。 我東方自羅季以來, 倫常之可議者甚多, 及我聖朝禮樂典章, 燦然可述。 用程, 朱喪祭之禮, 秉《春秋》尊攘之義, 凡陳常敦禮, 反軼於中華。 何獨於臣等, 因一種憸人售憾之議, 夷狄之禽獸之, 而久不知變也? 世之人, 動以名分, 爲口實, 夫名者, 所以定其位也, 分者, 所以等其威也。 始之於家庭之內, 子而父父, 弟而兄兄, 盡子弟之道者, 卽是也。 今於稱謂之際, 反效奴僕之於其主, 日用常情之藹然于中者, 沮格而不行, 名之不正, 莫此爲甚, 名旣不正, 分將焉施? 所謂名分, 於此蔑如, 豈非秉彝者之所共惕然而傷心者耶? 至若仕路之枳塞, 不但有妨於朝家用人之政, 臣等之不得盡分於倫常者, 專由是也。 蓋此法一行之後, 凡係官方, 各有定窠, 分岐殊塗, 防限甚牢, 使不得進其身而展其蘊, 是雖曰通仕路, 而實未嘗通也。 生斯世也, 漢之衛、霍, 晋之裵、阮, 唐之蘇、杜, 尙矣無論, 雖有韓琦、范仲淹之材器, 陳瓘、鄒浩、胡寅之學問, 必將以母賤而棄之, 其身致廊廟而爲世名儒, 非可論也。 夫移風易俗, 卽宰物之權耳。 謬俗因循, 歲月浸久, 而窮則變, 變則通, 亦物理之不能已者。 則何可但以見聞之習熟, 不思所以通變之乎? 是以, 列聖朝, 特垂憫恤, 屢發絲綸, 昭載於往牒。 今不敢一一歷陳, 而粤在成廟朝時, 値憫旱, 以歸咎庶類之禁錮, 聖心惻然欲更張, 而弓劍遽遺。 宣廟朝答申濆疏批, 有人臣願忠, 豈必正嫡之敎? 仁廟朝, 以仕路之太狹, 有隨才擬望之命, 顯廟朝, 嘗於先正臣文正公 宋時烈進言之日, 亦歎舊制之狹隘, 肅廟朝廣詢廷臣, 屢欲通變。 故英廟朝, 每以先朝聖意爲敎, 至有壬辰之處分。 有若曰庶非班乎? 因一子光而禁通淸, 則戊申乙亥, 無一名者, 皆忠臣乎? 切勿拘礙, 以存國初之風。 逮我先大王御極之初, 特軫疏通之方, 使之條陳節目, 而朝議不一, 其所酌定, 不過限品, 依舊枳塞耳。 聖意以爲防限尙多, 此不足以疏滯有敎曰, ‘是士族遺裔, 與委巷賤流, 曷可比而同之, 使不能得其所? 是亦寡人之過, 欲識人倫之常稱, 則反慕千里不同俗之俗, 朝廷之職名, 豈爲士大夫階限而設哉? 其後銓曹通望之飭, 太學序齒之諭, 必欲漸次開路。 以至末年, 辭敎愈摯而仙馭上昇, 遂成未卒之志, 沒世之思, 八域惟均, 而在臣等, 尤切如喪之慟。 且列朝名碩, 莫不力主疏通之論, 期欲矯革。 故先正臣文正公 趙光祖、文成公 李珥、文簡公 成渾、文元公 金長生、文烈公 趙憲、文正公 宋時烈、文純公 朴世采, 故相臣文忠公 柳成龍、文忠公 金尙容、文忠公 李元翼、文翼公 尹昉、文忠公 崔鳴吉、文忠公 張維、文忠公 吳允謙、文正公 崔錫鼎, 以疏以啓, 辭意懇惻, 有曰人臣願忠, 豈有間於嫡庶? 朝廷用人, 如是偏隘。 有曰, 我朝謀國大臣, 只爲私其子孫, 不及乎萬世失人之憂。 有曰禮制之定, 莫嚴於三代, 而嫡庶之名, 只行於私室, 不行於公朝, 門地之尙, 莫尙於六朝, 而用人之際, 惟問其父姓, 不問其母族。 有曰雖有材德出群之人, 率皆抑塞不揚, 擯斥不與, 無復父子之倫, 君臣之義, 逆天理傷人紀, 莫此爲甚。 有曰卑薄庶孽, 天下萬古所無之法, 殊欠王者立賢無方之道。 有曰禁錮庶孽, 足以傷天地生遂之意, 非先王公大之政, 通用之擧, 甚爲合宜。 有曰庶孽防限之法, 初非祖宗定制。 有曰我國用人甚狹, 門閥之外, 雖有奇才異等, 無以進用, 若循常守古, 則終下能收拾中外。 有曰許多才俊之士, 枯項黃馘, 駢死蓬蒿之下, 匹夫含冤, 足傷和氣, 況此其麗不億者乎? 有曰, 古者厚禮重幣, 以待隣國之賢士, 猶恐其不至, 今者設法定限, 以錮域內之民, 猶恐其或進, 及其事變到頭, 每患才俊之難得。 有曰, 鄕曲賤流之子, 時或顯仕, 而世族名家庶裔, 永錮而棄之, 用捨之際, 顚倒甚矣。 此皆其梗槪, 而百不擧一。 其外擬疏而未遑, 封章而見格, 又見於講說、記聞、碑狀、文藁者, 不可殫記, 亦皆通識博觀爲國眷眷之人也。 由此觀之, 其大正至公之論, 可謂建天地質鬼神, 而不悖不惑者也。 此豈獨爲庶孽地也? 蓋欲以裨世道而導天和也。 倡議枳塞者, 始不過徐選姜希孟輩而已。 前後賢臣相踵而斥之, 則邪正已判, 不啻如黑白, 而(弊)〔弊〕 謬遂錮, 守之若金石, 此臣等所未敢解者也。 夫宗法之重, 始乎《周禮》, 而嫡長之名, 惟宗子當之, 自宗子之母弟, 與妾母之子, 屬之支庶。 故父於嫡子衆子服異焉。 而於衆子庶子不異者, 欲以明嫡子無二統, 而衆庶爲一列也。 無嫡子而有庶子, 則庶子爲父後, 庶子娶妻而生子, 則遂與衆子之子均焉, 若記所稱庶孫云者, 亦謂子取妾而生子者也, 非謂妾子之子, 爲庶孫也。 三代以下, 嫡庶之別, 如是而已。 我朝禮典, 特載嫡妾俱無子者, 許令立後之文, 豈非以爲先王制禮, 使民知父子不可易而絶, 然後始許繼之之意乎? 顧今之人, 誰不知骨肉之慈? 而雖有已出, 視若他人, 反取疏遠之族, 而子之, 使祖禰之血氣, 不相續焉, 此豈非以官爵爲門戶計哉? 繼嗣, 卽是爲先地也, 官爵, 不過爲後計也, 而繼嗣反輕, 官爵爲重, 遂使臣等, 不得盡其分於倫常, 倫常廢而隨爲聖世之棄物。 豈不是痛恨哉? 一室之內則嫡庶有分, 故先正臣趙光祖, 爲此建白, 同姓限六寸, 他姓限四寸, 使之莫敢踰越, 而至若朝廷之間, 何嘗論嫡庶門地也? 朝廷之用人, 專尙門地, 故臣等之尤所弸塞者, 正欲保世傳門地也, 夫門地之尙自晋代已然。 其曰門地者, 仕宦之子雖孼, 而等是士族, 凡民之子, 雖嫡子而終爲編伍也, 未聞以外黨之尊卑, 低昻之於本宗也。 今之庶孽, 非獨一家之庶孽, 乃是一世之庶孽也, 非獨一世之庶孽, 乃是萬世之庶孽也, 求之天理而不得, 求之人紀而不得, 求之聖經賢傳歷代典常, 而亦不得者也。 臣等雖甚無似, 四體無異乎人, 七情同得於天, 自朝家視之則均是喬木之裔也, 以祖先言之則自是同根之生也。 而一有庶名, 禁錮廢塞, 不獨止於一身, 子子孫孫, 鐵限永在, 反不若鄕品冷族, 不識根派者之無拘於世人, 不欲以人相待, 渠不敢以人自處。 幼學壯行, 聖所立訓, 而終年攻苦, 竟何成就? 赫世承家, 人所稱美, 而分門窮蟄, 若有罪故。 故好生惡死, 人之常情, 而如臣等者, 幽鬱莫伸, 頭角漸長, 知覺稍存, 則其所自願, 輒願無生。 蓋其有生之初, 自分廢棄, 跼天蹐地, 無限困苦, 不如無知也。 在昔唐臣陸贄之言曰, 聖王之作人, 如玉之在璞, 抵擲則瓦石, 追琢則圭璋, 如水之發源, 壅閼則淤泥, 疏濬則川沼, 然則瓦石圭璋, 淤泥川沼, 初非兩截之判耳。 今則臣等之跡, 政類乎抵擲而壅閼, 則一(叚)〔段〕 區區之心, 豈不望追琢之疏濬之乎? 昔在英廟朝, 敎以庶孽之人, 居國之半, 先大王又若曰, 偏小之中, 又除庶類, 則已失一國之半。 生齒日繁, 隨出隨錮, 則其冤愈甚, 其鬱愈積。 由前由後, 大小公議, 輒以干和二字, 指擬臣等, 雖使臣等自爲之辭, 冤鬱所感, 未敢謂無是理也。 臣等窮阨崩迫之情, 有甚於疾痛之呼, 顧不暇議到於宦達。 而第伏念臣等之不得齒於人類, 卽官爵使之然, 則何敢顧畏小嫌, 不暴至情, 使日月無私之照, 不得下究哉。’ 夫官爵者, 有國之堂堂公器, 而淬礪人材, 甄別賢愚而已也。 今於銓選之際, 徒存階限, 注擬之間, 顯有區別。 由此而卑薄成習, 隘陋難變, 則臣等雖衣冠, 徒在其去跂行喙息之類, 亦無幾矣。 古今天下, 寧有是乎? 至若鄕學, 則長育人才之所, 而任司案錄, 因一逆瑮僞通, 乍通旋枳, 令典不遵。 黨塾之中, 擯斥成風, 俎豆之間, 禮讓掃地, 貽羞盛際, 亦非細故。 蓋此習俗之美惡, 惟視仕路之通塞, 仕路之通塞, 惟在銓注間區限之有無也。 區限人物, 旣非先王之定典, 秩敍倫彝, 政爲今日之急務, 則其更張之擧, 豈非一轉移間事乎? 臣等以須臾無死之願, 値冤枉必伸之日, 裹足遠來, 瀝血仰籲於聽卑之下。 伏願聖明, 仰體我列聖朝至意, 且以諸名碩之議, 作爲前席之奏, 俯賜開納, 特降處分, 使臣等於家而盡尊宗之道, 於朝而明敦本之政, 習俗丕變, 惠澤旁流。 則奚特含生之倫, 思效隕首之忱? 抑亦不瞑之鬼, 將頌及骨之渥矣。
批曰: "爾等之可矜, 予亦深知之。 疏辭令廟堂, 從長稟處。"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22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신분(身分) / 가족-가족(家族)
- [註 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