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홍이 충청도 마량진 갈곶 밑에 이양선 두 척이 표류해 온 일을 보고하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이재홍(李載弘)의 장계에,
"마량진(馬梁鎭) 갈곶[葛串] 밑에 이양선(異樣船) 두 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그 진(鎭)의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지방관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연명으로 보고하기를,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을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젖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 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므로 되돌려 주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책을 주고받을 때에 하나의 작은 진서(眞書)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자인 것 같았기 때문에 가지고 왔습니다. 사람은 낱낱이 머리를 깎았고, 머리에 쓴 모자는 검은 털로 만들었거나 노끈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동로구(銅鑪臼)와 같았습니다. 의복은 상의는 흰 삼승포[三升布]로 만들었거나 흑전(黑氈)으로 만들었고 오른쪽 옷섶에 단추를 달았으며, 하의는 흰 삼승포를 많이 입었는데 행전(行纏) 모양과 같이 몹시 좁게 지어서 다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버선은 흰 삼승포로 둘러 쌌고,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발막신[發莫]과 같고 끈을 달았습니다. 가진 물건은 금은 환도(金銀環刀)를 차기도 하고 금은 장도(金銀粧刀)를 차기도 하였으며, 건영귀(乾靈龜)를 차거나 천리경(千里鏡)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의 수는 칸칸마다 가득히 실어서 자세히 계산하기 어려웠으나, 8, 90명에 가까울 듯하였습니다. 또 큰 배에 가서 실정을 물어 보았는데, 사람의 복색, 패물, 소지품이 모두 작은 배와 같았고, 한문이나 언문을 막론하고 모두 모른다고 머리를 저었습니다. 사람의 숫자는 작은 배에 비하여 몇 갑절이나 될 것 같은데, 배 위와 방 사이에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였으며,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등 매우 어수선하여, 하나 둘 세어 계산하기 어려웠습니다. 서책과 기물(器物)은 작은 배보다 갑절이나 더 되었습니다. 큰 배나 작은 배를 물론하고 그 제도가 기기 괴괴하며, 층이나 칸마다 보배로운 그릇과 이상한 물건이 있었고, 기타 이름을 알 수 없는 쇠와 나무 등의 물건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또 여인이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본 것은 단지 한 명뿐이었는데, 흰 베로 머리를 싸매고 붉은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두 배에 모두 대장간이 설치되었는데, 만드는 것은 모두 대철환(大鐵丸), 화살촉 등의 물건이었습니다. 첨사와 현감이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북풍이 불자 크고 작은 배가 불시에 호포(號砲)를 쏘며 차례로 돛을 달고 바로 서남 사이 연도(煙島) 밖의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첨사와 현감이 여러 배를 지휘하여 일시에 쫓아갔으나 마치 날으는 새처럼 빨라서 사세상 붙잡아 둘 수 없었으므로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앞의 배는 아득하여 형체가 보이지 않았고 뒤의 배는 어슴프레 보이기는 하였으나 해가 이미 떨어져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배의 집물 적간건기(什物摘奸件記)와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진서전(眞書牋)을 모두 베껴 쓴 다음, 첨부하여 올려보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서전(書牋) 내용에, ‘영길리국(英吉利國)123) 수사 관원(水師官員)에게 글을 주어 진명(陳明)하는 일로 해헌(該憲)에 보내니, 잘 알기 바랍니다. 금년 윤6월 초순 사이에 우리 영길리국에서 5척의 배로 우리 영국왕(英國王)이 차정한 사신과 수행한 사람들을 보내어 천진(天津) 북연하(北蓮河) 입구에 도착하여, 지금 왕의 사신 등이 모두 북경에 나아가 황제[萬歲爺]를 뵈었으나 천진 외양(外洋)의 수심이 얕은데다가 큰 바람까지 만나 배의 파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에, 각 선척이 그곳에 감히 정박하지 못하고 지금 월동(粤東)124) 에 돌아가서 왕의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귀국하려고 합니다. 이에 그곳을 지나게 되었으니, 해헌(該憲)은 음식물을 사도록 해 주고 맑은 물을 가져다 마시고 쓰도록 해 주십시오. 왼쪽에 우리 왕께서 보낸 사신의 인장(印章)이 찍혀 있으니 증거가 될 것입니다. 가경(嘉慶)125) 21년126) 월 일에 씁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01면
- 【분류】외교-구미(歐美)
- [註 123]영길리국(英吉利國) : 영국.
- [註 124]
○忠淸水使李載弘狀啓以爲:
馬梁鎭葛串下, 異樣船二隻漂到。 該鎭僉使趙大福, 地方官庇仁縣監李升烈聯報以爲, ‘漂到異樣船隻, 雖多費人力, 多用船隻, 莫可曳入。 故十四日平明, 僉使縣監, 同往異樣小船所浮處, 先以眞書問之, 以不知搖頭, 更以諺文問之, 又以不知揮手。 如是詰難者移時, 終不得問答, 畢竟渠自執筆書之, 而似篆非篆, 似諺非諺, 莫可通辨。 其左右上下層閤間, 無數書冊中, 渠又拈出二卷, 一卷給僉使, 一卷給縣監。 故開卷見之, 則亦是非篆非諺, 又莫能曉解, 還爲授之, 則固辭不受, 納之袖中。 冊子與受之際, 有一眞書葉紙, 似是該國去來文字, 故取之以來。 人物則箇箇削髮, 頭著則或以黑毛爲之, 或以繩爲之, 形如銅鑪臼。 衣服則上衣或白三升, 或黑氈, 右袵結單錘, 下衣多着白三升, 而如行纏狀, 其製甚狹, 僅容其胯。 襪子則以白三升揮裹, 履則以黑皮造之, 狀如發莫, 以纓納之。 所持之物, 或佩金銀環刀, 或佩金銀粧刀, 或佩乾靈龜。 或持千里鏡。 而其人名數, 間間滿載, 難以詳計, 似近八九十名。 又往其大船而問情, 則人物服色所佩所持, 一如小船, 而以眞以諺, 俱以不知搖頭, 名數比小船似可屢倍, 船上房間, 或坐或起, 或往或來, 極其紛錯, 難以指的計數。 而書冊器物, 倍加於小船。 毋論大小船, 蓋其製樣, 奇奇怪怪, 層層間間, 寶器與異物, 其他鐵木等物名不知者, 難以勝計。 而其中又有女人。 目下所見者, 只爲一名, 而白布裹頭, 着紅色裳。 兩船俱設冶所, 鑄者皆大鐵丸箭鏃等物。 僉使縣監下船之時, 其中一漢, 持一卷冊固授, 與小船所受二卷, 合三卷。 於焉之間, 西北風正吹, 大小兩船, 不時放砲, 次第擧帆, 直放西南間烟島外洋。 故僉使縣監, 指揮諸船, 一時追及, 則其疾如飛, 勢無以執留, 只自看望, 則前船杳無其形, 後船隱然有迷見之狀, 而日已落地, 莫可瞭望。 兩船什物摘奸件記及小船中所得一幅眞書牋, 竝謄書粘付上送’ 云。 小船中所得一幅書牋謄書, ‘英吉利國水師官員下, 書爲陳明事。 送該憲知悉。 據本年閏六月初旬間, 有我英吉利國五隻船, 送我英國王差定, 從各人到天津 北蓮河口, 今王差等, 俱進京朝, 見萬歲爺, 因天津外洋水淺, 遇有大風, 免不得壞船, 故各船, 不敢在彼處碇泊, 今要回粤東候, 王差回國, 玆經過此處。 請該憲給以買食物, 自取淸水飮用也。 左有蓋我王差印爲據矣。 嘉慶二十一年月日書。’"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01면
- 【분류】외교-구미(歐美)
- [註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