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사한 안주 사인 임지환을 증직하고 정려하다
안주(安州)의 절사(節死)한 사람인 임지환(林之煥)을 증직(贈職)하고 정려(旌閭)하였다. 평안 병사 신홍주(申鴻周)가 아뢰기를,
"안주 사인(士人) 임지환은 곧 정묘년078) 노란(虜亂) 때 순절했던 사람의 후손입니다. 적변(賊變)이 일어난 초기에 임지환이 전투에 나아가기를 자원하길래 특별히 장사 군관(壯士軍官)에 차임(差任)하여 진에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올해 정월 5일에 용천(龍川)과 의주(義州)로 진병(進兵)하여 협공하는 일 때문에 진에 있던 우후(虞候)가 비밀 관문(關文)을 써 주며 임지환으로 하여금 옷솔기 안에 감춘 채 두 고을로 들어가 전해 주게 했는데 선천(宣川)에 이르러 해현(該縣)에 남아 있던 적에게 잡히게 되었습니다. 〈적이〉 비밀 관문을 뒤져 내고는 양책참(良策站)의 적괴(賊魁)가 머물러 있는 곳으로 압송(押送)하였습니다. 적이 처음에는 뜰 아래에 두고서 위협하다가 돌아서서 곧 대청 위에 앉기를 청하며 여러 가지로 항복하라고 유혹하였지만, 임지환은 목소리를 돋구어 크게 꾸짖기를, ‘너희들은 죄가 쌓여 하늘에 가득한데도 아직까지 남에게 악을 돕게 하려는가? 나는 충신의 후손으로 비록 톱으로 몸을 잘라 죽인다 하더라도 너희같은 흉적(凶賊)에게는 굴할 수 없다.’ 하니, 적괴가 대노하여 즉시 내어다 참하게 하였습니다. 임지환이 드러누운 채 엎드리지 않고 타매함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으니, 양책참의 남녀들이 눈으로 보고 장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 뒤 만부(灣府)의 의병장 김견신(金見臣)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오던 길에 보고서 지니고 있던 저사건(紵紗巾)을 풀어 그 머리를 싸고 그 시신을 염습한 뒤 그 동리에 내어 주고는 관사(館舍)의 북쪽에 매장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천 현감 김희(金爔)와 용천 부사 이영식(李永植)에게 관문을 보내 더 조사하여 보고하게 했더니, 임지환이 적을 꾸짖다가 해를 입은 전말은 그 당시의 통인(通引) 김인식(金仁植)과 홍치인(洪致仁) 등이 모두 ‘임지환은 본현(本縣)의 장교 독고맹(獨孤孟)과 오일형(吳一亨)에게 잡혀, 해현에 머무르고 있던 적 유문제(柳文濟)가 있는 곳으로 압부(押付)되었는데, 잡아들여 위협과 공갈이 이르지 않은 바 없었습니다. 그리고 옷깃 안에 있던 관문을 뒤져내고는 그대로 칼을 씌워 용천의 적진으로 압송하자, 적괴를 대하여 반국(叛國)한 역적이라며 꾸짖으며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죽을 때에는 빨리 칼을 쓰라고 하며 꾸짖음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책참에 사는 백성인 김윤제(金允濟)·최영찬(崔永贊)이 함께 그때의 광경을 목도하였었는데, 그들의 말에 ‘임지환이 결박당한 채 도착하자 적도가 그 소회(所懷)를 물으니, 「내 어찌 너희와 같은 흉역과 말을 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적도가 「어째서 흉역이라 하는가?」라고 하니, 임지환이 목소리를 돋구어 크게 꾸짖기를, 「너희 조상 때부터 나랏땅을 갈아먹고, 살아서는 자식을 기르고 죽어서는 그 땅에 묻혔으니 나라의 은혜가 아님이 없다. 그런데 지금 반국(叛國)하여 변을 일으켰으니, 대역(大逆)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적도가 노하여 참하려고 하였으나, 안색이 변하지 않았으며, 죽을 때에는 「내가 지금 죽으면 죽는 것이나, 마땅히 하늘의 해를 우러러 보고 죽겠다」고 하면서 이어 몸을 뒤집어 드러누운 채 발로 적도를 찼습니다. 적들이 찌르고 칼을 휘둘러 거의 목숨이 끊어지게 되었는데도 입에서 꾸짖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정충(貞忠)·탁절(卓節)은 포휼(褒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죽음에 임하여서도 굴하지 않았으니, 그 늠연한 기풍은 족히 적의 간담을 놀라게 하고 이목을 감동시킬 만하다. 묘당으로 하여금 즉시 여쭈어 처리하게 하여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임지환은 그 자취가 본디 위포(韋布)로서 대대로 충의를 물려받았는데, 난이 일어난 초기에 분연히 진에 나아가 몸에 김희의 편지를 감추고 직접 호구(虎口)를 밟다가 적에게 잡혔으나 불굴의 기절을 세웠습니다. ‘몸을 톱으로 자른들 어찌 두려우랴?’고 한 말과 ‘너의 죄가 하늘에 가득 찼다.’고 한 말은 칼날을 받은 안고경(顔杲卿)079) 이나 톱질을 당한 장 장흥(張興)080) 에게 부끄러움이 없으니, 청컨대 특별히 병조 참의에 증직하고 정려(旌閭)의 은전을 베푸소서. 그리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 집을 존문(存問)하게 하되, 만약 장사를 지냈거든 전뢰(奠酹)의 비용을 후하게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6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 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 인물(人物) / 윤리-강상(綱常)
- [註 078]정묘년 : 1627 인조 5년.
- [註 079]
안고경(顔杲卿) : 안진경(安眞卿)의 사촌 형. 안록산의 난 때 안록산의 군대에 저항하여 싸우다가 잡히자, "너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하며 안록산을 꾸짖었음. 안록산이 가죽을 벗겨 죽이었으나, 죽을 때까지 꾸짖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함.- [註 080]
장흥(張興) : 당(唐)나라 속록(束鹿) 사람으로, 현종(玄宗) 때 요양(饒陽)의 비장이 되었다가 안록산의 난 때 항복하질 않아 톱질을 당해 죽었음.○安州節死人林之煥贈職旌閭。 平安兵使申鴻周啓言: "安州士人林之煥, 卽丁卯虜亂殉節人後孫也。 賊變之初, 之煥自願赴戰, 特差壯士軍官赴陣矣。 今年正月初五日, 以龍川、義州進兵夾攻事在陣, 虞候成出密關, 使之煥藏之衣縫內, 入送兩邑, 行到宣川, 爲該縣留賊所捉, 搜出密關。 押送良策站賊魁所住處。 賊初則威脅於庭下, 旋卽請坐於廳上, 多般誘降, 之煥厲聲大罵曰, ‘汝輩積罪彌天, 而尙欲人之助惡乎? 吾是忠臣之孫, 雖鋸解而殺之, 決不屈於如汝〔凶〕 賊矣。’ 賊魁大怒, 卽令出斬。 之煥仰臥不伏, 罵不絶口, 站上男女, 無不目見而壯之。 其後灣府義兵將金見臣領兵南來之路, 見之。 解所持紵紗巾, 裹其頭而歛其體, 出給該里, 使之埋葬於館舍之北云。 發關宣川縣監金爔, 龍川府使李永植, 使之更加査報則以爲, 林之煥罵賊被害顚末, 其時通引金仁植ㆍ洪致仁等, 皆以爲之煥, 被捉於本縣將校獨孤孟ㆍ吳一亨, 押付於該縣留賊文濟處, 捉入威喝, 無所不至。 搜得衣襟中關文, 仍着枷押送于龍川賊陣, 對賊魁罵, 以叛國之賊, 終不屈伏, 臨死促令下刃, 罵不絶口。’ 云。 良策居民金允齊ㆍ崔永賛, 幷目擊其時光景, 而其言以爲, ‘之煥被縳來到, 賊徒問其所懷則曰, 「吾豈向如汝兇逆接語乎?’」 賊徒曰: ‘何謂兇逆?’ 之煥厲聲大罵曰, 「自汝祖耕食國土, 生育死埋, 莫非國恩。 今乃叛國作變, 非大逆而何?」 賊徒怒欲斬之, 顔色不變, 臨死言。 「吾今死則死矣, 當仰見天日而死」 仍翻身仰臥, 脚踢賊徒。 搶剌劎揮, 幾至絶命, 而口不絶罵云。’ 其貞忠ㆍ卓節, 不可無褒恤, 請令廟堂稟處。" 敎曰: "臨死不屈, 其澟然氣習, 足以驚賊膽而動耳目。 令廟堂, 卽爲稟處, 以爲激勸之地。" 備局啓言:林之煥跡本韋布, 世襲忠義, 亂起之初, 奮然赴陣, 身藏蠟書, 躬蹈虎口, 爲賊所捉, 植立不屈。 鋸解何畏之語, 爾罪彌天之說, 無愧於受刃之杲卿, 當鋸之張興, 請特贈兵曹參議。 施以旌閭之典。 仍令道臣, 存問其家, 如已過葬, 厚給奠酹之需。" 允之。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16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 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 인물(人物) / 윤리-강상(綱常)
- [註 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