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각에서 야대하여 역대 군감에 대해 강하다
소대하였다. 또 보문각(寶文閣)에서 야대하여 역대 군감(歷代君鑑)에 대해 강하였는데, 시독관 홍면섭(洪冕燮)이 말하기를,
"어제 서문(御製序文) 가운데 비풍(匪風)·하천(下泉)103) 의 감회가 운한(雲漢)104) 에서 일어나게 되었다는 글을 한번 받들어 읽고 적이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삼가 영관(瀛館)105) 의 고사(故事)에 대한 비답을 어필(御筆)로 써서 내리신 것을 보건대, 기년(紀年)의 시기를 ‘숭정(崇禎)106) ’ 두 글자로 드러내어 게시하셨으니, 전하께서 계술(繼述)하시는 덕을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좋은 말이다. 존주 대의(尊周大義)107) 는 천고에 폐기할 수 없는 것으로써, 우리 열성조(列聖朝)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천명(闡明)하고 준수해 왔는데, 어떻게 하면 한결같이 오늘날처럼 영구히 만세토록 전할 수 있겠는가?"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는 대보단(大報壇)이 있는데, 이는 곧 천하의 열국(列國)에 없는 것이니, 서로 심법(心法)을 전하여 이 의리를 굳게 지킨다면, 영구히 천백 대에 할말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복희씨(伏羲氏)가 처음으로 팔괘(八卦)를 그리자, 천하의 사람들이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져서 삼강 오상(三綱五常)이 질서가 정연하여 순서가 있게 되었다. 만약 복희씨가 팔괘를 그리지 않았다면, 천서(天敍)와 천질(天秩)은 마침내 그 순서를 얻을 수 없었고, 인문(人文)의 어두운 것이 또한 장차 상고(上古) 시대와 같이 홍황(洪荒)하여 그쳤을 것인가?"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복희씨의 시대에 인문이 처음으로 열렸었고 문왕(文王)·공자(孔子)에 미치어 찬연히 더욱 밝아졌습니다. 만약 복희씨가 괘(卦)를 그리고 상(象)을 나타낸 것이 없었다면, 문왕과 공자는 반드시 뚜렷하게 밝혀서 계몽(啓蒙)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善)은 본받을 만하고 악(惡)은 경계할 만한 것인데, 선악의 구분은 하늘과 땅이 같지 않은 것보다 심한 것이다. 다스려지는 날이 항상 적고 어지러운 날이 항상 많았는데, 다스려지고 어지러운 싹은 공(公)과 사(私)가 각각 다른 데에서 판별되는 것이니, 어떻게 하면 악이 적어지고 선이 많아져서 어지러움이 다스려지게 할 수 있겠는가? 시험삼아 지난 사첩(史牒)의 주의(主意)를 살펴보건대, 인욕(人慾)에서 나와 일을 경영하지 않으면 마침내 사사로움에 끌리는 데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마음을 추구해 보면 어찌 반드시 선을 버리고 악을 따르는 것을 달갑게 여겨서이겠는가? 오로지 공사의 분별이 엄중하지 못해서일 따름인 것이다."
하고, 인하여 책을 덮도록 명한 다음 하교하기를,
"겨울밤이 길어서 연석(筵席)이 조용하고 야기(夜氣)가 청명(淸明)하여 정신이 전일해지니, 책을 읽으면 완색(玩索)하기 좋고 일을 논하면 깨닫기 쉽다. 그래서 옛사람도 또한 말하기를, ‘야대가 주대(晝對)보다 낫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아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고금(古今)을 격렬하게 논하며 오늘밤 오랫동안 지내는 것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마땅히 그 예모(禮貌)를 간결하게 하고 마음을 열어 놓고 성심(誠心)을 다하여 숨김없이 죄다 진달하도록 하라."
하자, 검토관(檢討官) 한기유(韓耆裕)가 말하기를,
"요(堯)·순(舜)의 도(道)는 우(禹)임금·탕(湯)임금·문왕(文王)·무왕(武王)에게 전해졌는데, 삼대(三代) 이후로 인의(仁義)가 땅을 쓴 듯이 없어졌으니, 비록 구치(求治)하고자 한들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홍면섭은 말하기를,
"역대에 다스려지고 어지러운 것을 국조(國祚)108) 에서 살펴보면, 길고 짧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희주(姬周)는 덕(德)을 쌓아 세대가 30대까지 존속되었지만, 영진(嬴秦)은 포학(暴虐)하여 2대에 이르러 망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맹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민중(民衆)을 얻으면 나라를 얻게 되고 민중을 잃으면 나라를 잃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관후(寬厚)하여 나라를 세운 자는 장원(長遠)하지 않음이 없고 정벌(征伐)하여 위세를 숭상하는 자는 단촉(短促)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역대(歷代)를 거울삼으면 환하게 볼 수 있다."
하니, 각신 박종훈(朴宗薰)이 말하기를,
"삼대 이후로 한(漢)나라·당(唐)나라·송(宋)나라의 나라를 세운 규모 또한 각각 장단(長短)이 있습니다. 한나라는 독실하였고, 당나라는 발란(撥亂)하였고, 송나라는 충후(忠厚)하였으므로, 모두 사람들에게 미친 공리(功利)가 있었으니, 곧 주자(朱子)가 말한 철중(鐵中)의 금(金)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역년(歷年)이 구원(久遠)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탕(成湯)과 무왕(武王)이 비록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벌죄(伐罪)하는 뜻에서 나왔다 하나, 오히려 정전(征戰)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성탕 또한 말하기를, ‘나는 후세에서 나를 구실(口實)로 삼을까 두렵다.’ 하였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周)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송나라는 나라를 얻을 때 비록 순정(純正)하였다 하나, 은나라·주나라보다 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성탕과 무왕의 일은 정전한 것이었으나, 성탕과 무왕의 마음은 백성을 불쌍히 여겨 그 죄를 징벌한 것이었으니, 어찌 일찍이 천하를 탐하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그 마음은 지극히 공정할 따름이었으니, 이것은 천하가 성탕과 무왕에게 돌아간 것이지 성탕과 무왕이 천하를 취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탕과 무왕이 용병(用兵)한 것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맹자도 말하기를, ‘한 사나이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임금을 살해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인심이 돌아간 곳이 있고 천명(天命)이 이미 바뀐 것이니,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어찌 정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천명이 만약 바뀌지 않았으면 성탕·무왕 또한 성탕·무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오로지 저 주(紂)가 만약 조금이나마 개과 천선(改過遷善)할 희망이 있었다면 성탕·무왕이 어찌 기꺼이 이러한 거사를 하였겠는가? 이윤(伊尹)으로 하여금 다섯 번이나 걸(桀)에게 나아가게 한 것은 걸이 거의 그 마음을 고치기를 바란 것이었으니, 곧 이에서 성탕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성교가 진실로 지극히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곧 하늘과 사람이 합일(合一)한 이치이니, 성인(聖人)이 만든 것 또한 하늘과 같은 것이다."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나라의 정관(貞觀)109) 은 치법(治法)·정모(政謨)가 혁연(爀然)하여 볼만하였으므로, 위징(魏徵)110) 은 말하기를, ‘이제(二帝)111) 는 셋일 수 있고 삼왕(三王)112) 은 넷일 수 있다.’ 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찬양(贊揚)이 지나친 말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정관으로 논할 것 같으면 진실로 이것은 삼대(三代)113) 이후에 없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시초에는 부지런히 하다가 끝에 가서 게을리하여 마침내 인의(仁義)를 가차(假借)한 데 돌아감을 면하지 못하였다."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태종(太宗)은 단지 학문이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므로,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비록 볼만한 것이 있었다 하나, 한갓 사욕(私慾)으로 다른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가렸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제기할 필요도 없이 대본(大本)이 이미 무너진 것이다. 만약 정관의 조치(措治)가 없었다면, 한 가지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어서 평일의 행기(行己)가 진실로 걸·주(桀紂)와 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송나라 신하 범조우(范祖禹)는 어질다고 일컬으며 특별히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취하였는데, 그러한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본령(本領)은 진실로 말할 만한 것이 없지만, 정관지치를 초치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히 그 이해(利害)에 밝아서 능히 사람을 임용하여 간언(諫言)을 따르는 것이 이로움을 알았던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이 간언을 따르는 한 가지 일은 태종(太宗)의 좋은 부분이다."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간언을 따른 것은 진실로 허여할 만하나, 또한 성심(誠心)으로 이를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간언을 따르는 것이 성실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무슨 징험할 만한 것이 있는가? 마침내 모름지기 전사옹(田舍翁)을 죽이겠다고 한 말114) 이 또한 그 증험인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정관의 초기에 이미 이원(梨園)의 여악(女樂)을 두었고, 또 구성(九成)의 장려(壯麗)함을 경영하여 그 분수에 지나친 사치로 안락함을 좇으려는 생각이 이미 심두(心頭)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종을 한나라 문제(文帝)에 견주면 누가 나은가?"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한나라 문제는 자질(資質)이 순수하고 올바라서 태종보다 낫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나라 문제는 다스림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으므로 현주(賢主)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영명(英明)함으로 논하면 혹 태종보다 못한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한나라 문제는 천자(天姿)가 도(道)에 가깝고 규모가 독실하였으니, 당나라 태종을 견주어 똑같이 볼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광무제(光武帝)에 견주면 누가 나은가?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광무제가 나은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신을 전부 보전한 것은 이것이 가장 광무제의 좋은 부분이다. 그러나 한흠(韓歆)을 죽인 한 가지 일이 바로 그 궐실(闕失)인데, 태종은 능히 참언(譖言)을 믿지 않은 일이 있었으니, 되풀이하여 생각해도 나은가?"
하니, 한기유가 말하기를,
"태종도 또한 장온고(張蘊古)·노조상(盧祖尙)을 죽였는데, 이들은 모두 무고(無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위징·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 등 여러 신하들이 없었다면, 어찌 정관(貞觀)의 아름다움이 보전될 수 있었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문제와 광무제의 조정에 서게 하였다면 마땅히 정관보다 낫지 않았겠는가?"
하니, 한기유가 말하기를,
"그런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위징을 조보(趙普)115) 에 견주어 누가 어진가?"
하니, 한기유가 말하기를,
"선유(先儒)는 위징을 논하여, 입으로 요(堯)·순(舜)을 일컫는 말이 때로 혹 맞는 것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조보보다 나은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보가 일찍이 〈태종에게〉 말하기를, ‘〈신이 1부(部)의 《논어(論語)》가 있는데,〉 반부(半部)의 《논어》로 태조를 보좌하여 천하를 취하였고, 또 장차 반부로써 폐하를 보좌하여 태평(太平)을 이루겠습니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건대, 그 문학(文學) 또한 알 수 있으니, 어떻게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겠는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그 출처에 대해 근본을 추구해 보면 위징과 조보는 모두 말할 것이 못되지만, 인물 하나만 논하면 위징이 낫습니다."
하고, 한기유가 말하기를,
"조보는 사람됨이 음흉하고 각박해서 또한 다른 사람을 참소(譖訴)하는 버릇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참소받은 자가 누구인가?"
하니, 한기유가 말하기를,
"노다손(盧多遜) 등 여러 사람들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두후(杜后)가 남긴 조서(詔書)에 서명하여 금궤(金匱)에 간직한 것116) 또한 조보의 과실이다."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비록 이것은 윗사람이 실수한 것이라 하나, 조보가 이를 받들어 따랐으니, 그 과실이 또한 큽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삼대 이후로 명철한 임금 가운데 누구를 제1등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는가?"
하니, 한기유가 말하기를,
"한나라 문제와 송나라 인종(仁宗)을 일컬을 만합니다."
하고, 박종훈은 말하기를,
"촉한(蜀漢)의 소열제(昭烈帝)는 관인(寬仁)하고 활달하며 자혜롭고 영명하여 학문의 힘에 의뢰하지 않고도 보는 곳이 극도로 높았습니다. 또 제갈양(諸葛亮)은 곧 삼대(三代) 이상의 인물이었으니, 사람을 잘 쓴 데 있어서는 소열제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자, 한기유가 말하기를,
"소열제가 삼고 초려(三顧草廬)한 것은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꿈속에 부열(傅說)을,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점을 쳐 여상(呂尙) 같은 어진 이를 구한 데 그 아름다움이 같을 수 있는데, 또 그는 말하기를, ‘선행(善行)이 적다 하여 안하지 말고 악행(惡行)이 적다 하여 하지 말라.’ 하였으니, 어찌 어질지 않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름다운 말이다. 이 말은 과연 이전의 사람들이 미처 하지 못한 말이라고 할 수 있으니, 누가 소열제를 학문의 공부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 것인가? 주부자(朱夫子) 또한 일찍이 《소학(小學)》에 수입(收入)하였는데, 후세의 제범(帝範) 제편(諸篇) 같은 데에도 과연 이러한 말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 다음은 오직 송나라 인종뿐인가? 42년 동안의 치법(治法)은 볼만하였다."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사기(史記)를 논하는 사람들은 과연 소열제와 인종을 역대에서 으뜸으로 많이 일컫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소열제로 하여금 중원(中原)을 회복(恢復)하게 하였다면 이제 삼왕(二帝三王)의 성대함을 다시 볼 수 있었겠는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어떻게 감히 질언(質言)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룰 만한 본령(本領)은 있고 구분할 만한 허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나라 태종과 한나라 무제(武帝)는 누가 나은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태종은 한나라 무제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윤대(輪對)의 일에 대해 한 번 조서를 내리어 갑자기 마음을 돌이켜 후회하는 빛을 보였으니117) , 한나라 무제의 한 차례 착수했던 일은 고상하다고 할 수 있다."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과연 이것은 작은 것에 구애받지 않는 큰 뜻으로서, 바로 이른바 먼저 병들었던 사람은 훗날 병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나라 소제(昭帝)는 연조(年祚)가 길지 않았지만, 또 가혹하게 살핀다는 비난이 있었다. 그러나 상관걸(上官桀)의 참서(譖書)를 능히 살펴서 곽광(霍光)의 무죄(無罪)를 드러내었는데, 이러한 〈14세의〉 어린 나이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의뢰하지 않고 중도를 좇아 나온 영단(英斷)이 이와 같았으니, 명쾌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어린 나이로 조정에 임어(臨御)하여 참설(譖說)을 분변할 수 있었으니, 이는 사기(史記) 가운데에서 개안(開眼)할 부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항우(項羽)의 사람됨은 그 인(仁)에 대해 말하면 부인(婦人)에 가깝고 그 용(勇)에 대해 말하면 성을 내어 큰 소리로 꾸짖었으니, 한결같이 어찌하여 그리도 박잡(駁雜)한가?"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본래 조수(操守)함이 없어서 이른바 인이란 것은 인이 아니고 이른바 용이란 것은 용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범증(范增)의 계책을 듣고, 또 한신(韓信)·진평(陳平) 무리를 거두어 써서 한(漢)나라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면, 영씨(嬴氏)118) 와 같이 윤위(閏位)119) 를 얻을 수 있고 한때의 통합(統合)을 이룰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그 강포(强暴)함 때문에 두세 호걸에게 용납받지 못하였을 것은, 사리의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나라 고조(高祖) 또한 말할 만한 학문이 있는가?"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조금이나마 학문에 뜻을 둔 적이 없는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육가(陸賈)의 시서(詩書)에 대한 말을 받아들이고, 그가 바친 《신어(新語)》를 기뻐하여 보았으니, 진실로 한 자도 모르는 무리라고 할 수는 없다."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이러하였기 때문에 대풍가(大風歌)120) 가 있었는데, 문장도 또한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풍가도 또한 문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후세에 견주어 이른바 문장은 체단(體段)이 비록 다르지만, 그 기개(氣槪)와 범위를 논하면, 비록 문장에 대해 공부를 시킨 자라 하더라도 또한 대풍가를 짓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죄다 기력(氣力)이 있다. 한나라 고조가 운몽(雲夢)에서 거짓으로 놀다가 한신(韓信)을 사로잡은 것은 정도(正道)가 아닌 듯하다. 어떻게 하면 한신으로 하여금 처음에 반심(叛心)이 없이 보전할 수 있게 하고, 마침내 거짓으로 노니는 일이 없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한나라 고조는 아랫사람을 부릴 때 완전히 농락(籠絡)하는 술책을 썼는데, 평일에 꺼리어 의심하는 마음 때문에 거짓으로 노니는 장본(張本)을 양성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평(陳平)의 계략은 진실로 정도가 아니고, 한신 또한 그르다. 경포(黥布)에 대해 말한 것과 군사를 일으키고 장수를 보낸 일은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겠는가? 또 무섭(武涉)을 사양하여 돌려보냈을 때를 당하여 ‘나를 먹여 주고 나를 입혀 주었다.’는 말은 이미 전국(戰國) 때의 여풍(餘風)이 있음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신의 재주는 과연 성질이 사납고 교만한 까닭에 반심(反心)이 이미 싹텄었으니, 그 형세가 길 수 없었다. 한나라 고조의 일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그를 성심(誠心)으로 대우하였었는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니, 한기유가 말하기를,
"한신이 무섭을 사양하여 보내고 괴철(蒯徹)에게 굳게 거절하였던 일에서 그 본심을 알 수 있지만, 심지어 임시로 제왕(齊王)이 되기를 청하고 기회(期會)에 나가지 않은 두 가지 일은 고조의 의심을 일으키는 데 괴이쩍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나라 고조는 여러 공신에 대해 한 사람도 완전히 보전한 자가 없어서, 심지어 팽해(烹醢)121) 한 일에 이르러서는 사관(史官)이 말하기를, ‘활달한 대도(大度)로 어떻게 그렇게 일을 처리하였는가? 더러 포악하고 흉포한 데 가까웠다.’ 하였다. 소하(蕭何)는 비록 견갑(堅甲)을 입고 예병(銳兵)을 잡지는 않았으나, 공(功)은 으뜸이 되었으니, 발종 지시(發縱指示)122) 하였다는 논의는 진실로 좋은 비유이었고, 또 진(秦)나라 승상부(丞相府)에서 먼저 도적(圖籍)을 거둔 것은 과연 경륜(經綸)이 있는 선비라고 하겠으나, 제갈양에 견주면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하니, 한기유가 말하기를,
"제갈양은 출처가 정대(正大)하였으니, 소하는 견줄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소하가 궁실(宮室)을 지으면서 극도로 장려(壯麗)하게 한 것은 어떠한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대개 사해(四海)를 위압하는 것으로써 제후(諸侯)들에게 보이려 한 것이겠으나, 검약(儉約)을 숭상하는 것으로써 자손들에게 전할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나라 고조는 그 새로 지은 궁실을 보고 그 장려함을 꾸짖었는데, 만약 한나라 고조가 학문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를 분별하였겠는가? 또 진(秦)나라 관문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 궁실의 유장(帷帳)에서 즐거워하였는데, 이제 장려함을 꾸짖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처음 진도(秦都)에 들어갔을 때에는 화려함을 처음 보았으므로, 흔연하게 이를 즐거워하였으나, 번쾌(樊噲)의 말을 듣기에 이르러 또한 잘못을 뉘우쳐 고쳤으니, 이것이 또한 지략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천자(天子)가 되기에 이르러서는 진(秦)나라를 망하게 한 전철(前轍)을 경계로 삼아 이러한 말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참(曹參)·진평(陳平)·주발(周勃) 가운데 누가 더 나은가?"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재능은 진평이 나은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씨(劉氏) 집안을 편안하게 보전할 사람은 반드시 주발인 것을 한나라 고조는 미리 헤아렸으니,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밝았다고 할 수 있다. 진평이 여러 장수들로부터 금(金)을 거두었던 것은 이미 부정(不正)에 관계되는데, 금을 풀어 초군(楚軍)을 이간시키고는 초(楚)나라 사신을 푸대접하며 〈대뢰(大牢)를 올렸던 것은〉 범증의 사신인 줄 알았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속이는 계책이었다."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홍구(鴻溝)의 맹약(盟約)123) 을 한 후 ‘호랑이를 길러 후환(後患)을 산다.’고 하면서 뒤를 쫓게 한 것도 또한 속이는 계책으로서 올바르지 못한 것이었으니, 이 때문에 정자(程子)는 일찍이 진평을 불인(不忍)의 사람이라고 논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역대의 신하들이 거울삼기를 반드시 정(鄭)나라 자산(子産)124) 에게서 비롯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는 왕도(王道)를 맡았으므로 진실로 신도(臣道)로써 논열(論列)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고 72인의 제자 또한 개견(槪見)하지 못하겠지만, 고요(皐陶)·직(稷)·설(契)에 이르러서는 어찌 자산(子産)보다 어질지 못하고, 또한 표장(表章)이 되지 못하겠는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공자와 맹자의 문하(門下)에는 특별히 입조(立朝)하여 임금을 섬긴 자취가 없습니다. 고요·직·설은 《상서(尙書)》에 실린 외에는 따로 사실이 없으므로 기록하지 않았으나, 자산은 마침 연대의 선후로써 수위를 삼은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宋)나라가 남쪽으로 건너온 이후 진회(秦檜)의 손자가 악무목(岳武穆)125) 의 묘(墓)를 지나갈 때 폭사(暴死)한 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무슨 책에 나오는가?"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이 일은 미처 듣지 못하였으나, 신이 일찍이 해내(海內)의 기이한 광경을 보았는데, 악무목의 묘우(廟宇)에는 문밖 좌우에 네 명의 사람을 묶어 두었으니, 한 사람은 바로 진회이고, 한 사람은 왕부인(王夫人)이고, 한 사람은 묵사설(万俟卨)이고, 한 사람은 장준(張俊)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귤(橘)을 희롱하였을 때의 왕부인(王夫人)인가?"
하니, 한기유가 말하기를,
"동창(東窓)에서 귤을 희롱하였을 때 왕부인이 진회에게 말하기를, ‘호랑이는 잡아서 묶기 쉽지만, 호랑이는 놓아 주기 어려운 것이다.’ 하고 진회의 계책을 권하여 이루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왕부인의 죄는 진회와 같은 모양이다. 진회는 바로 만고의 소인배인데, 엄숭(嚴嵩)에게 견주어 진실로 어떠한가?"
하니, 한기유가 말하기를,
"똑같은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문화(趙文華)·언무경(鄢懋卿)은 모두 엄숭의 무리인데, 하언(夏言)·서계(徐階)는 현상(賢相)으로 일컬을 만한가?"
하니, 한기유가 말하기를,
"서계는 족히 현상이 될 수 있으나, 하언은 순수한 신하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나라에서 마침내 다시 치욕을 씻지 못한 것은 죄가 오로지 진회에게 있는가?"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고종(高宗)은 진실로 이런 뜻이 없었으니 이미 극도로 개연(慨然)하게 여겼는데, 소인배들이 또 따라서 영합(迎合)하였습니다."
하고, 박종훈은 말하기를,
"고종이 만약 와신 상담(臥薪嘗膽)할 뜻이 있었다면, 비록 진회가 1백 명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그 간계(姦計)를 부릴 수 있었겠습니까? 진회는 진실로 말할 것도 없고, 고종의 일은 진실로 천고에 개탄할 부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악무목이 거의 성공하였으나, 진회가 이를 시기하여 잘못 끝나기에 이르렀다."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진회의 마음은 오히려 다시 치욕을 씻게 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金)나라 사람들이 핍박하였는데, 휘종(徽宗)·흠종(欽宗)이 도성을 나간 것은 실계(失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명나라 영종 황제(英宗皇帝)의 일과도 같지 않으니, 대개 그 당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따름이다. 진회의 계책은 완전히 금나라 사람들을 위한 처지였으니, 이는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진회는 본래 성품이 소인배로서 오로지 이기(利己)만을 위해 부귀(富貴)를 도모하였으므로, 그 뜻이 반드시 금나라를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이로움이 금나라와 화친(和親)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영종 황제의 일은 과연 다른 바가 있는데, 이는 모두 왕진(王振)의 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유현(儒賢) 가운데 누구를 제일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는가?"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도학(道學)이 성대한 것으로는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를 제일이라고 일컫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박종훈이 말하기를,
"자품(姿品)이 순정(純正)하고 학문이 정대(正大)함에 있어서는 조광조가 과연 제일이라고 일컫는 것이 합당하겠지만, 만약 도학(道學)과 조예(造詣)를 가지고 말한다면 선정신 이황(李滉)을 제일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한기유는 말하기를,
"선정신 이이(李珥)도 또한 제일이라고 일컬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 현신(賢臣)은 진실로 여러 신하들이 아뢴 바와 같지만, 내 뜻은 우암(尤菴)을 제일로 삼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세 현신들이 연원(淵源)과 정맥(正脈)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하였는데, 효묘(孝廟)를 만나 일당(一堂)의 어수계(魚水契)126) 에 의탁하여 천하에 대해 대의(大義)를 맡고 이를 청사(靑史)에 전하였으니, 장차 만세에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명신(名臣) 가운데 총명(聰明)과 재식(才識)으로 한나라 장양(張良)·진평(陳平)에게 견주어 논할 만한 자는 누구인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갑자기 생각하여 감히 질언(質言)할 수는 없지만,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을 사업(事業)·재서(才諝)·문학(文學)·견식(見識)에 있어서 제일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모두 재서로 일컬을 만하고, 최석정(崔錫鼎) 같은 자도 또한 허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속칭 이른바 남초(南草)127) 는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데, 혹은 위(胃)를 조양(調養)하는 데 이롭다고 하고 혹은 담(痰)을 치료하는 데 긴요하다고 하나, 과연 그런지 모르겠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속습(俗習)이 이미 고질이 되어 남녀 노소를 논할 것 없이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겨우 젖먹이를 면하면 으레 횡죽(橫竹)으로 피우고 있는데, 세상에서 더러 ‘팔진미(八珍味)는 폐지할 수 있어도 남초는 폐지할 수 없다.’고 하니, 비록 금하고자 하나 이유가 없을 따름이다. 옛날에 듣건대, 금한(金汗)128) 이 군중(軍中)에 거듭 금하였으나 오히려 그치지 않는다고 하니, 금한(金汗)의 위세로써도 오히려 금지시킬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참찬관 이광익(李光益)이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인묘(仁廟) 때 일본으로부터 나와 우리 나라에서 중국[中原]에 전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당시 금한(金汗)이 엄중하게 금하였으므로, 피인(彼人)이 그 종자를 필관(筆管)129) 속에 넣어 가지고 들어갔는데, 근래에는 천하에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하고, 홍면섭은 말하기를,
"남초는 서도(西道)에 종자가 많은데, 품질도 또한 아주 좋으므로 혹 이름을 서초(西草)라고 합니다. 서도의 좋은 전지와 비옥한 토지는 태반이 남초를 심는 데 들어갔으니, 사람에게는 이로울 것이 없고 폐해만 막대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남초로 손님을 접대하는 도구로 삼지만, 중국 사람들은 차[茶]로 손님을 접대하니, 어찌 이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손님을 차로 접대하는 것은 예의가 있음을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남초를 횡죽으로 피우는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서 본다면 어찌 해괴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남초가 폐해가 되는 것은 술과 일반이겠으나, 술은 그래도 제사에 쓰고 성인(聖人)도 또한 말하기를, ‘술은 양(量)을 제한하지 않되 난잡한 데 미치지는 않는다.’ 하였는데, 남초에 이르러서는 마땅한 것이 없고 해로움만 막심한 것이다. 속습(俗習)이 이에 이르렀으니, 끝내 금지할 수 없겠는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남초는 금지할 수 있음을 사람들은 모두 말하지만, 신은 일찍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주금(洒禁)이 어려운 것은 대개 술을 좋아하여 깊이 빠진 자가 많기 때문이며, 남초에 이르러서는 이미 몸에 이익이 없는데도 드러나게 좋아하는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만약 법을 엄하게 하여 금지한다면, 죄를 무릅쓰고 금법을 범하는 것이 반드시 주정(洒政)보다 심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홍면섭은 말하기를,
"백성들로 하여금 전지에 심을 수 없게 한다면, 수년 후에는 저절로 금지될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술은 진실로 쓸모가 있어서 남초보다 나은 듯하나, 일체 드러나게 좋아하는 것이 폐해가 되고 또한 크게 술에 취하여 여리(閭里)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자가 근래에도 많이 있다. 승지가 근래에 서곤(西閫)을 거쳤는데, 외읍(外邑)에는 이러한 폐해가 없었는가?"
하니, 이광익이 말하기를,
"술이 사람을 어지럽힘은 경향(京鄕)이 다름없습니다. 무릇 살옥(殺獄)의 문서 가운데 그 근본을 상고해 보면 태반이 술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근일에 도성 안에 떠돌며 빌어먹는 백성들이 매우 많은 데 이르지는 않았는가?"
하니, 이광익이 말하기를,
"없는 때가 없지만, 매번 세한(歲寒)을 당하면 포장(捕將)이 도복(陶復)130) 을 설치하여 그들을 전거(奠居)하게 하고 있습니다. 대저 떠돌며 빌어먹는 무리는 그 모양이 한결같지 않으므로, 더러 외읍(外邑)에서 떠돌아다니다가 경성(京城)에 옮겨 들어오는 자도 있고, 또한 더러 경성에서 태어나 자라서 성질이 빌어먹는 데 길들여진 자도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정책을 널리 시행하는 것은 요(堯)·순(舜)도 병폐로 여겼지만, 기민(饑民)을 전접(奠接)하는 것이 조정의 가장 큰 정사이다.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있으면, 각각 죄다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한기유가 말하기를,
"근래에 사치(奢侈)의 풍속이 가장 백성들을 해치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근일에 여러 신하들이 장주(章奏)에서도 또한 폐단을 많이 진달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이토록 극도에 이르렀으며, 어떻게 하면 또한 금지할 수 있겠는가?"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먼저 검소함을 밝히는 덕을 보이심으로써 풍속을 바로잡는 근본을 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좋다."
하였다. 홍면섭이 말하기를,
"신이 외읍의 백성들을 직접 보았는데, 가장 뼈에 사무친 폐해는 오직 환곡(還穀)의 폐단일 따름이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환곡의 폐단은 선조(先朝) 때부터 있었던 것인데, 곡진하게 진념(軫念)을 더해도 오히려 이정(釐正)하지 못했었다. 지금은 더욱 심한 듯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홍면섭이 말하기를,
"오로지 방백(方伯)과 수령을 가리는 데 달려 있습니다. 진찬(珍饌)을 내려서 이들을 먹이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밤의 모임은 내가 매우 즐거워서 피로한 줄을 모르겠다. 경루(更漏)가 비록 깊었으나, 여러 신하들은 갑자기 물러갈 필요가 없다."
하고, 각각 시를 지어 바치게 하고 친히 고열(考閱)한 다음 차등 있게 상을 베풀었다. 임금이 열성(列聖)의 어필 인본(御筆印本) 2책을 여러 신하들에게 내보이고, 박종훈·홍면섭·한 기유, 사관 신재식(申在植)에게 명하여 각각 찬(贊)을 1편씩 지어서 바치게 하였다. 인하여 물러가도록 명하고 어전의 촛불을 거두어 전도(前導)하게 하였는데, 시각이 이미 새벽이 될 무렵이었다. 인하여 응제(應製)한 검교 대교(檢校待敎) 박종훈 이하에게 시상(施賞)하도록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12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 / 윤리(倫理) / 구휼(救恤) / 재정(財政)
- [註 103]비풍(匪風)·하천(下泉) : 비풍은 《시경》 회풍(檜風)의 편명(篇名)이고, 하천은 《시경》 조풍(曹風)의 편명임. 이 두 편은 모두 현인(賢人)들이 주(周)나라의 왕권(王權)이 점점 쇠약해짐을 개탄하면서 옛날 강성했던 때를 생각하면서 지은 시임. 여기서는 명(明)나라를 추모하는 뜻으로 썼음.
- [註 104]
운한(雲漢) : 《시경》 대아(大雅)의 편명.- [註 105]
영관(瀛館) : 홍문관.- [註 106]
숭정(崇禎) :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註 107]
존주 대의(尊周大義) : 주나라 왕실(王室)을 존숭(尊崇)하는 대의(大義)란 뜻으로, 여기서는 명(明)나라 왕실을 존숭하는 대의를 가리킴.- [註 108]
국조(國祚) : 국운(國運).- [註 109]
정관(貞觀) :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 [註 110]
위징(魏徵) : 당 태종때 명신.- [註 111]
이제(二帝) : 요·순(堯舜).- [註 112]
삼왕(三王) : 우(禹)임금, 탕(湯)임금, 주 문왕·무왕(周文王武王).- [註 113]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註 114]
전사옹(田舍翁)을 죽이겠다고 한 말 : 전사옹(田舍翁)은 위징(魏徵)을 가리킴. 위징이 예의를 내세워 당 태종(唐太宗)의 사심(私心)을 견제하자, 당 태종이 노하여, "내가 결단코 전사옹을 죽이고야 말겠다." 하였는데, 장손 황후(長孫皇后)가 그 말을 듣고 "임금이 현명하면 신하가 강직하다고 합니다." 하니, 태종이 그 말을 받아들였음. 그러나 위징이 죽고 나서 위징의 비문 내용을 못마땅하게 여긴 태종은 그 비석을 쓰러뜨리게 하였음.- [註 115]
조보(趙普) : 송(宋)나라 초기의 재상.- [註 116]
두후(杜后)가 남긴 조서(詔書)에 서명하여 금궤(金匱)에 간직한 것 : 두후(杜后)는 송 태조(宋太祖)의 어머니로, 죽음에 임하여 태조에게 이르기를, "후주(後周)에 나이가 든 공자(公子)가 있었다면 네가 어찌 천하(天下)를 얻을 수 있었겠느냐? 이 다음에 마땅히 네 아우 진왕(晉王:뒤의 태종)에게 왕위를 전하도록 하라." 하고, 조보(趙普)를 불러, "내가 말한 것을 어기지 않는다고 기록한 다음, 끝에 네가 썼다는 서명(署名)을 하여 잘 보관하라."고 명했던 일.- [註 117]
윤대(輪對)의 일에 대해 한 번 조서를 내리어 갑자기 마음을 돌이켜 후회하는 빛을 보였으니 : 윤대(輪對)는 서역(西域)의 소국(小國)의 이름.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상홍양(桑弘羊) 등이 이 지역에 둔전병(屯田兵)을 보내 흉노(匈奴)를 제압할 것을 청하자, 무제가 누차의 기병(起兵)으로 백성들이 괴로워한다고 하면서 서역을 공략하려던 계획을 뉘우치는 조서(詔書)를 내리고 이 지역을 포기했던 일.- [註 118]
영씨(嬴氏) : 진(秦)나라를 이름.- [註 119]
윤위(閏位) : 정통이 아닌 임금의 자리.- [註 120]
대풍가(大風歌) :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天下)를 평정하고 고향인 패(沛) 땅을 지나다가 종실(宗室)과 고인(故人)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술이 거나하게 되자 고조가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큰 바람[大風:자신을 비유함]이 일어나 구름[雲:병란을 이름]이 흩날렸도다. 사해(四海)에 위엄을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어떻게 맹사(猛士:훌륭한 인재를 말함)를 얻어 사방을 지킬고?"라 하였음.- [註 121]
팽해(烹醢) : 사람을 삶아 죽이거나 절임.- [註 122]
발종 지시(發縱指示) : 사냥개의 맨 줄을 풀어놓고 짐승이 있는 곳을 가리켜 잡도록 한다는 말로,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얻은 뒤 논공(論功) 때 신하들이 소하(蕭何)의 거수(居首)를 불평하자, 고조가 전쟁을 수렵(狩獵)에 비유하여, 짐승을 쫓아서 잡은 개의 공[狗功]과 그것을 지휘한 사람의 공[人功]을 비교 논박하매, 감히 말을 못하였음.- [註 123]
홍구(鴻溝)의 맹약(盟約) : 초·한(楚漢)의 대전(對戰)에서 항우(項羽)가 전세(戰勢)의 불리로 인해 유방(劉邦)과 "홍구를 중심으로 하여 천하를 반으로 나누어 서쪽은 한나라로, 동쪽은 초나라로 하자."고 약조한 후, 인질로 잡고 있던 태공(太公)과 여후(呂后)를 돌려보내고 병졸을 이끌어 동으로 돌아간 일.- [註 124]
자산(子産) : 춘추 시대(春秋時代)정나라 현상(賢相).- [註 125]
악무목(岳武穆) : 악비(岳飛)의 시호.- [註 126]
어수계(魚水契) : 군신(君臣)간의 서로 믿고 의지하는 깊은 교계(交契).- [註 127]
남초(南草) : 담배.- [註 128]
○庚辰/召對, 又夜對于寶文閣, 講《歷代君鑑》。 侍讀官洪冕燮曰: "御製序文中, ‘《風》、《泉》之感, 發於《雲漢》’, 奉讀一回, 竊不勝感嘆。 伏見瀛館故事之批, 御筆書下者, 紀年之際, 表揭崇禎二字, 殿下繼述之德, 孰不欽仰?" 上曰: "善哉言也! 尊周大義, 乃千古所不可廢, 自我列聖朝, 闡明遵守, 式至今日, 何以則可得永垂萬世, 一如今日耶?" 冕燮曰: "吾邦之有大報壇, 卽天下列國之所無也。 心法相傳, 固守此義, 則可以永有辭於千百代矣。" 上曰: "伏羲氏始畫八卦, 而天下之人, 君君臣臣, 父父子子, 三綱五常, 秩秩有序。 如非伏羲之畫卦, 則天敍天秩, 竟無以得其序, 而人文之貿貿, 亦將如上古洪荒而止乎?" 冕燮曰: "伏羲之世, 人文始闢, 比及文王、孔子, 而燦然益明。 若無伏羲之畫卦示象, 文王、孔子, 必當有著明而啓蒙矣。" 上曰: "善可爲法, 惡可爲戒, 善惡之分, 甚於霄壤之不侔。 治日常少, 亂日常多, 治亂之萌, 判於公私之各異, 何以則惡少善多, 亂可使治歟? 試觀往牒主意, 則非出於人欲而做事, 則終歸於牽私者, 間多有之。 如此等人, 原其心, 豈必甘心於舍善而從惡乎? 亦惟曰公私之辨, 不嚴而已矣。" 仍命掩卷, 敎曰: "冬夜政長, 筵席從容, 夜氣淸明, 精神專一, 讀書則好玩索, 論事則易領會。 故古人亦云, ‘夜對勝晝對’, 此言儘有味矣。 劇論古今, 以永今夕, 不亦樂乎? 其宜簡其禮貌, 開懷盡情, 悉陳無隱也。" 檢討官韓耆裕曰: "堯、舜之道, 傳之禹、湯、文、武, 而三代以降, 仁義掃地, 雖欲求治, 其可得乎?" 冕燮曰: "歷代治亂, 觀於國祚, 脩短可知矣。 姬周積德, 卜世三十, 嬴秦暴虐, 二世而亡矣。" 上曰: "孟子不云乎? 得衆則得國, 失衆則失國。 寬厚立國者, 罔不長遠, 征伐尙威者, 罔不短促, 鑑乎歷代, 昭昭可見矣。" 閣臣朴宗薰曰: "三代以後, 漢、唐、宋立國規模, 亦各有長短。 而漢之篤實唐之撥亂宋之忠厚, 皆有功利之及人, 卽朱子所謂鐵中之金也。 此所以歷年久遠者也。" 上曰: "成湯、武王, 雖出於弔民伐罪之意, 而猶不免爲征戰, 成湯亦曰, ‘予恐後世以台爲口實。’ 夷、齊不食周粟, 餓死首陽。 由此觀之, 宋之得國從容, 規模仁厚, 未嘗殺一不辜, 雖或謂之賢於殷、周, 亦未爲不可乎?" 冕燮曰: "宋之得國, 雖曰純正, 賢於殷、周則未也。" 宗薰曰: "湯、武之事則征戰, 而湯、武之心則弔伐也, 何嘗有利天下之心乎? 其心則至公而已, 是天下歸湯、武也, 非湯、武取天下也。" 上曰: "湯、武用兵, 不得已也。 孟子言, ‘聞誅一夫紂’, 人心有歸, 天命已改, 當是時, 安得不征戰乎? 天命若未改, 則湯、武亦不得爲湯、武, 惟彼紂, 倘有一分改過之望, 則湯、武豈樂爲此擧乎? 使伊尹五就於桀者, 冀桀之庶幾改之, 卽此可見湯之心也。" 宗薰曰: "聖敎誠至當矣。" 上曰: "此卽天人合一之理也, 聖人之所作爲, 亦一天也。" 宗薰曰: "果然矣。" 上曰: "唐之貞觀, 治法、政謨, 爀然可觀。 魏徵則以爲, ‘二帝可三, 三王可四。’ 此雖出於贊揚之過語, 若以貞觀論之, 誠是三代後所未有。 惜乎! 其始勤終怠, 竟不免爲假仁借義之歸也。" 冕燮曰: "太宗只是無學問人耳, 政令、施措, 雖有可觀, 徒以私欲, 掩人耳目矣。" 上曰: "此則不須提, 而大本已壞矣。 如無貞觀之措治, 無一可稱, 平日行己, 誠桀、紂之不遠矣。 然而宋臣范祖禹, 稱之以賢, 特取其貞觀之治, 而然歟?" 宗薰曰: "本領固無可言, 而能致貞觀之治者, 特其明於利害, 能知用人從諫之爲利故也。" 上曰: "只是從諫一事, 太宗之好處也。" 宗薰曰: "從諫固可許, 而亦非能誠心好之矣。" 上曰: "從諫之不能誠實, 有何可徵乎? 會須殺此田舍翁之語, 亦其驗乎?" 宗薰曰: "貞觀之初, 已置梨園之女樂, 又營九成之壯麗, 其侈靡從逸之念, 已藏在心頭矣。" 上曰: "太宗比諸漢 文, 則孰勝?" 冕燮曰: "漢 文姿質粹正, 勝於太宗矣。" 上曰: "漢 文之治, 始終如一, 可謂賢主, 而論以英明, 則或巽於太宗耶?" 宗薰曰: "漢 文帝, 天姿近道, 規模篤實, 恐不可以唐 太宗比而同之也。" 上曰: "比諸光武, 則孰勝?" 冕燮曰: "光武似勝矣。" 上曰: "全保功臣, 最是光武之好處。 然殺韓歆一事, 乃其闕失, 而太宗則能有不信譖言之事, 反復勝耶?" 耆裕曰: "太宗亦殺張蘊古、盧祖尙, 皆是無辜者也。" 上曰: "若無魏徵、房玄齡、杜如晦諸臣, 安保其有貞觀之美乎? 若使諸臣立於文帝、光武之朝, 其爲治也, 當復勝於貞觀耶?" 耆裕曰: "似然矣。" 上曰: "魏徵比於趙普, 孰賢?" 耆裕曰: "先儒論魏徵以爲, 口稱堯、舜之言, 時或有中, 似勝於趙普也。" 上曰: "趙普嘗言, ‘以半部《論語》, 佐太祖取天下, 又將以半部, 佐陛下致太平。’ 由是言之, 其文學亦可知, 豈可少覷耶?" 宗薰曰: "推本其出處, 則魏徵、趙普, 俱不足言, 單論人物, 則魏徵優矣。" 耆裕曰: "趙普爲人陰刻, 亦多有譖人之習矣。" 上曰: "見譖者, 誰也?" 耆裕曰: "盧多遜諸人也。" 上曰: "杜后遺詔之金匱署名, 亦是趙普之失也。" 宗黨曰: "雖是在上者之所失, 趙普承順之, 其失亦大矣。" 上曰: "三代以後, 明君哲辟, 誰可以稱第一等耶?" 耆裕曰: "漢 文帝、宋、仁宗可稱也。" 宗薰曰: "漢 昭烈, 寬仁豁達, 慈惠英明, 不資學問之力, 而見處極高。 且諸葛亮, 卽三代以上人物。 用人之善, 莫有如昭烈者矣。" 耆裕曰: "昭烈之三顧草廬, 可以幷美於夢卜之求賢, 而且其言曰: ‘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 豈不賢乎?" 上曰: "旨哉言乎! 此言果可謂發前人之所未發, 孰謂昭烈無學問之工乎? 朱夫子亦嘗收入於《小學》, 如後世帝範諸篇, 果能有此語否? 抑其次, 則其惟宋 仁宗乎? 四十二年之間, 治法可見矣。" 宗薰曰: "論史者, 果多以昭烈、仁宗, 冠稱於歷代矣。" 上曰: "若使昭烈恢復中原, 二帝三王之盛, 可得復見乎?" 宗薰曰: "何敢質言, 而有可致之本領, 無可劃之疪纇矣。" 上曰: "唐 太宗與漢 武孰勝?" 宗薰曰: "太宗不及漢 武矣。" 上曰: "輪對一詔, 翻然示悔, 漢 武此一着, 可謂高矣。" 宗薰曰: "果是磊落, 正所謂先病後瘳。" 上曰: "漢之昭帝, 年祚不永, 且有苛察之譏。 然能審上官之譖書, 以暴霍光之無罪, 以若幼齡, 不資人言, 由中出來, 英斷若此, 可謂明快矣。" 冕燮曰: "沖年臨朝, 能辨譖說, 此是史記中開眼處。" 上曰: "項羽爲人, 語其仁則近於婦人, 語其勇則喑啞叱咜, 一何其駁雜也?" 冕燮曰: "本無操守, 其所謂仁者, 非仁, 其所謂勇者, 非勇也。" 上曰: "若能終始聽范增之計, 且韓信、陳平之徒, 皆爲收用, 不使歸漢, 則可得如嬴氏之閏位, 能成一時之統合否?" 冕燮曰: "以其强暴, 二、三豪傑之不見容, 事理之必然也。" 上曰: "漢 高, 亦可以學問言歟?" 冕燮曰: "恐無一分學問底意思矣。" 上曰: "納陸賈 《詩》、《書》之說, 而喜看其所進新語, 則固不可謂不識一字之類也。" 冕燮曰: "是以有《大風之歌》, 文章亦好矣。" 上曰: "《大風歌》, 亦可以文章言耶?" 宗薰曰: "比諸後世, 所謂文章, 則體段雖異, 論其氣槪與範圍, 則雖使工於文章者, 亦難作《大風歌》矣。" 上曰: "儘有氣力矣。 漢 高之僞遊雲夢, 而擒韓信者, 似非正道。 何以則使韓信, 初無叛心, 可以保全, 竟無僞遊之擧乎?" 宗薰曰: "漢 高御下, 全用籠絡之術, 以平日忌疑之心, 釀成僞遊之張本矣。" 上曰: "陳平之計, 固非正道, 韓信亦非矣。 言於黥布者及稱兵送將之事, 豈成說乎? 且當謝送武涉之時, ‘食我衣我’ 之說, 已不免有戰國時餘風矣。 然韓信之才, 果是桀驁, 反心已萌, 其勢不可長矣。 漢 高之事, 不得已也。 然而早使漢 高誠心待之, 豈至於是耶?" 耆裕曰: "韓信之謝送武涉, 牢拒蒯徹, 可知其本心, 而至於請假齊王, 期會不進二事, 無怪高帝之起疑也。" 上曰: "漢 高之於諸功臣, 無一全保, 至有烹醢之擧, 史言, ‘其豁達大度, 而何其處事? 或近於暴猛也。’ 蕭何雖不被堅執銳, 功則爲首, 發縱指示之論, 實是善喩, 且秦府之先收圖籍, 果是經綸之士, 然比之諸葛亮, 則似不及矣。" 耆裕曰: "諸葛亮出處之正大, 非蕭何之比也。" 上曰: "蕭何之建宮室, 極爲壯麗者, 何如?" 宗薰曰: "蓋欲以威四海示諸候, 而非所以尙儉約, 垂子孫之道也。" 上曰: "見其新建之宮室, 責其壯麗, 以若漢 高之無學問, 何以辨此? 且初入秦關, 樂其宮室帷帳, 今能責之以壯麗, 何也?" 宗薰曰: "初入秦都, 創見華麗, 欣然樂之, 及聞樊噲之言, 亦能改悟, 此亦智有過人處也。 及爲天子, 監於亡秦之轍, 而有此語矣。" 上曰: "曺叅、陳平、周勃孰勝?" 冕燮曰: "以材則陳平似勝矣。" 上曰: "安劉必勃, 漢 高預料, 知人可謂明矣。 陳平之收諸將金, 已涉不正, 而縱金反間, 惡草具待, 范增之使, 皆是詭計也。" 冕燮曰: "鴻溝盟成之後, 謂 ‘以猛虎遺患’ 而逐之者, 亦是詭而不正者。 是故程子嘗論陳平, 以不忍之人矣。" 上曰: "歷代臣鑑之必始於鄭 子産, 何也? 孔、孟則任以王道, 固不當以臣道論列, 而七十二弟子, 亦不槪見, 至於皐陶、稷、契, 豈不賢於子産, 而亦不爲之表章乎?" 宗薰曰: "孔、孟之門, 別無立朝事君之蹟。 皋陶、稷、契則《尙書》所載之外, 別無事實故不錄, 而子産適以年代之先後而爲首矣。" 上曰: "宋之南渡以後, 秦檜之孫, 過岳武穆之墓, 有暴死者云, 其說出於何書?" 冕燮曰: "此事未及聞之, 而臣曾見海內奇觀, 有畫岳武穆之廟, 門外左右, 縳致四箇人, 一是秦檜, 一是王夫人, 一是万俟卨, 一是張俊。" 上曰: "弄橘時王夫人耶?" 耆裕曰: "東窓弄橘之時, 王夫人言於秦檜曰, ‘縳虎易而縱虎難’, 勸成秦檜之計矣。" 上曰: "王夫人之罪, 與秦檜一般矣。 秦檜是萬古小人, 而比於嚴嵩, 固何如?" 耆裕曰: "似是一轍矣。" 上曰: "趙文華、鄢懋卿, 皆是嚴嵩之徒, 而夏言、徐階, 則可稱賢相乎?" 耆裕曰: "徐階則足可爲賢相, 而夏言非純臣也。" 上曰: "宋之終未復雪, 罪專在於秦檜乎?" 冕燮曰: "高宗實無此意, 已極慨然, 而小人又從以迎合之矣。" 宗薰曰: "高宗若有臥薪嘗膽之意, 則雖有秦檜百輩, 豈敢售其姦乎? 檜固無足言, 而高宗事, 誠千古之慨恨處也。" 上曰: "岳武穆幾乎成功, 而秦檜猜之, 至於誤了矣。" 冕燮曰: "秦檜之心, 猶恐其復雪也。" 上曰: "金人迫之, 而徽、欽之出城, 可謂失計。 此與皇明 英宗帝事, 亦不同, 蓋其時無人故耳。 秦檜之計, 全爲金人之地, 是誠何心哉?" 宗薰曰: "秦檜是(索)〔素〕 性小人, 專爲利己, 以圖富貴, 其意未必爲金, 而利在和金而然也。 英宗皇帝事, 果有異焉, 此則皆是王振之罪也。" 上曰: "我朝儒賢中, 誰可稱以第一流耶?" 冕燮曰: "以其道學之盛, 先正臣趙光祖, 當稱以第一矣。" 宗薰曰: "姿品之純正、學問之正大, 趙光祖果合以第一稱, 而若以道學造詣言之, 恐當以先正臣李滉爲第一矣。" 耆裕曰: "先正臣李珥, 亦當以第一稱也。" 上曰: "三賢臣, 固如諸臣所奏, 而予意則當以尤菴爲第一也。" 冕燮曰: "三賢臣淵源正脈, 傳于宋時烈, 而遭逢孝廟, 托一堂魚水之契, 任大義於天下, 垂之靑史, 將有辭於萬世矣。" 上曰: "我朝名臣中, 稱以聰明才識, 可比論於漢之張良、陳平者誰也?" 宗薰曰: "倉猝思之, 未敢質言, 而鰲城府院君 李恒福之事業、才諝、文學、見識, 似當爲第一矣。" 上曰: "漢陰 李德馨、西厓 柳成龍, 皆可以才諝稱之, 若崔錫鼎者, 亦可以許之也。" 又敎曰: "俗所謂南草, 未知始於何時, 而或云利於調胃, 或云緊於治痰, 未知其果然。 而至於近來俗習已痼, 無論男女老少, 莫不嗜之, 纔免孩提, 例爲橫竹, 世或謂 ‘八珍可廢, 南草不可廢’, 雖欲禁之而末由也已。 昔聞金汗申禁於軍中, 而猶不止云, 以金汗之威, 尙不得禁止者, 何也?" 參贊官李光益曰: "臣聞 ‘仁廟時, 自日本出來, 自我國轉入中。’ 原時金汗切禁之, 故彼人置其種子於筆管中入去, 而近則遍於天下云矣。" 冕燮曰: "南草多種於西路, 品亦絶佳, 故或名之爲西草。 西路之良田美土, 太半入於種草, 無利於人, 而弊莫大矣。" 上曰: "東人以南草爲對客之具, 而中原之人, 對客以茶, 豈不勝於此乎?" 冕燮曰: "對客以茶, 可想其有儀, 而若以南草橫竹之樣, 圖畫以看, 豈不駭怪乎?" 上曰: "南草之爲弊, 與酒一般, 而酒則猶用於祭祀。 聖人亦云, ‘惟酒無量, 不及亂。’ 至於南草, 則無所當, 而害莫甚矣。 俗習至此, 其終不可禁止乎?" 宗薰曰: "南草之可禁, 人皆言之, 而臣嘗竊思之, 酒禁之難, 蓋由於沈惑者多也, 至於南草, 旣無利益於身, 而好著至此, 若嚴法而禁之, 則其冒罪犯禁, 必有甚於酒政矣。" 冕燮曰: "使之毋得種田, 則數年之後, 自可禁止矣。" 上曰: "酒固有用, 似勝於南草, 而一切好著爲弊, 亦大酌酒而作挐於閭里者, 近亦多有之。 承旨近經西閫, 外邑則無此弊乎?" 光益曰: "酒之亂人, 京鄕無異。 凡於殺獄文書中, 考其本, 則太半是酒之所使也。" 上曰: "近日都城之內, 流丐之民, 不至甚多乎?" 光益曰: "無時無之, 每當歲寒, 則捕將爲設陶復, 而奠居之。 大抵流丐之類, 其狀不一, 或有自外邑流離漂泊, 轉入京城者, 亦或有生長京城, 性習流丐者矣。" 上曰: "博施濟衆, 堯、舜猶病, 奠接饑民, 最是朝家之大政也。 民間疾苦, 有所目覩者, 其各悉陳。" 耆裕曰: "近來奢侈之風, 最爲害民之本。" 上曰: "近日諸臣章奏, 亦多陳弊, 何故至於斯極? 何以則亦可以禁止耶?" 冕燮曰: "莫如自上先示昭儉之德, 以爲矯俗之本矣。" 上曰: "所陳好矣。" 冕燮曰: "臣目見外邑之民, 最爲切骨之害, 惟還弊是已。" 上曰: "還穀之弊, 自在先朝, 曲加軫念, 猶未及釐整矣。 今則似尤甚, 何以則爲好耶?" 冕燮曰: "惟在方伯、守令之擇人矣。 內下珍饌以饋之。" 上曰: "今夜之會, 予甚樂之, 不知其疲也。 更漏雖深, 諸臣不必遽退。" 其各賦詩以進, 親考施賞有差。 上出示列聖御筆印本二冊於諸臣, 命宗薰、冕燮、耆裕、史官申在植, 各製進贊一篇。 仍命退, 使撤御前燭導之, 時已向曙矣。 仍命應製檢校待敎朴宗薰以下施賞。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12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 / 윤리(倫理) / 구휼(救恤) / 재정(財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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