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대왕 시책문(諡冊文)
시책문(謚冊文)
삼가 생각하건대, 하늘이 돌보지 않아 우리 나라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훌륭한 덕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이름을 얻는 것이 사실 법과 예에 정해진 일이기는 하나 다만 더 슬프고 목이 멜 뿐 어찌 감히 덕을 드러내는 기록이라고 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께서는 안으로는 성인이요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겸비하셨으며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리는 재질을 갖추셨습니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총명예지하신 바탕이 있으셨고, 다섯을 아시면 셋은 실천으로 옮기신 온화하고 신실하고 검소하신 분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대임을 맡으시면서 온갖 험난을 다 맛보셨고, 문조(文祖)의 덕을 거듭 빛나게 이어받고 기무를 대신 살피셨습니다. 윤음을 반포하여 종통(宗統)의 바름을 밝히신 것은 한나라 황제가 남월(南越)에 조서005) 를 내렸던 내용보다 훌륭했고, 책을 저술하여 의리를 표방하신 일은 공자께서 《춘추(春秋)》를 지으신 것과 같았습니다. 현자를 등용하고 인척만을 내세우지 않아 용사 출척(用舍黜陟)을 공정하게 하였고, 양(陽)을 붙들어주고 음(陰)은 눌러 사정 숙특(邪正淑慝)을 분명히 가리셨습니다. 제독(提督)006) 은 자손들의 제사를 받게 하고 명나라 유민(遺民)들은 용만(龍灣) 제터에서 합동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니 덕음을 이에 그리워한 것이요 영고(英考) 묘정에다 충헌(忠獻)을 배양하고 여강(驪江) 사당에다는 대로(大老)의 이름을 현판 걸어 영원한 국시(國是)를 정하였으니 나라 다스리는 법이 그보다 더할 수 없었고 으뜸가는 현철하신 임금이었습니다. 풍속을 바로잡고 혼미한 자를 계도함에 있어 혹은 비와 이슬같이 따스하게도 혹은 서리 눈처럼 매섭게도 하였으며, 만민을 대화합의 길로 이끄는 데 있어 혹은 훈훈한 술로도 혹은 무서운 병기로도 하였습니다.
하우씨(夏禹氏)가 몸소 농사일을 가르쳤던 것처럼 농부의 어려움을 알아 거기에 힘을 썼고, 주(周) 문왕(文王)이 하루도 겨를이 없었던 것과 같이 백성을 편안케 하려고 자신은 놀이를 즐기지 않으셨습니다. 형형 색색 많은 책들은 규장각에 규벽(奎壁)이 비치고 있는 듯하고, 용호 같은 도략은 각 병영에 풍운이 일었습니다. 백성 대하길 상한 자 다루듯 하여 옥사를 살필 때는 슬프고 경건한 마음으로 결정하였으며 이웃 나라와 수교할 때는 충신(忠信)을 앞세워 하셨습니다. 제사 술잔을 정하게 친히 올려 그 정성이 신들에게 나타나고, 뭇사람이 애원한 찬양의 길 굳이 마다하셔 그 겸손이 더욱 빛나셨습니다. 단장하지 아니한 방에서 거처하고 세탁한 옷도 입으실 정도로 누가 뭐래도 검소하셨으며, 상공(常供)의 쌀은 쌓아두고 수리하는 공사를 못하게 하실 만큼 사리 판단이 정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정책이나 명령들은 모두가 학문을 기반으로 하여 겉으로 나타난 것들이었습니다. 경(敬)을 지키고 실천하신 것은 《소학(小學)》·《대학(大學)》을 거쳐서 나온 것들이었으며, 의(義)를 모으고 인(仁)을 찾으신 것은 맹씨(孟氏)·공씨(孔氏)의 교훈을 이어받으신 것들이었습니다. 공사(公私)와 의리(義利)에 있어서는 그 결과를 미리 짐작하고 처음부터 한계를 분명히 했으며, 깊은 못에 임한 듯 얼음을 밟은 듯 전전긍긍하는 공부에 대하여는 남보다 1백 배의 힘을 쏟으셨습니다. 본원(本源)이 맑고 깨끗하기에 모든 것이 선(善) 뿐이었으며, 하늘과 사람이 서로 통할 만큼 늘 상제(上帝)를 대하는 엄숙한 자세였습니다. 강송(講誦)할 때면 침식도 다 잊은 채 모든 경전의 글자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았으며, 치교(治敎)에 관하여는 임금이자 스승으로서 옛 성인들의 정통을 이으셨습니다. 역대 역사와 전기를 기록하여 그를 보고 거울로 삼고, 백가의 좋은 저술들을 다 뽑아 모두 포괄하셨으니 사물을 대하시면 강물이 막힘없이 흐르듯 했고, 문장으로 표현할 때는 저 빛나는 은하수 같았습니다. 옛 향음(鄕飮)의 예를 다시 실현하여 순박한 풍속이 만회되었다고 좋아하시고, 너도나도 주자의 바른 길을 가도록 많은 선비들을 만들어내셨습니다.
인륜(人倫) 사이에 도리를 다하신 것은 그 하늘에서 타고난 효성에 근원한 것이었으니, 10년 동안 병간호를 하면서도 하루도 성의가 해이할 때가 없었으며, 말 못할 슬픈 한을 죽을 때까지 품고서 임금노릇이 좋은 줄을 모르셨습니다. 대왕의 병이 쾌유하심으로써 두 성상의 사랑과 효도가 아울러 빛났고, 주구(珠邱)007) 를 옮겨 정하여 만세토록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장엄한 사당을 세워두고 달이면 달마다 가 뵈었으며, 궁중에 계신 어버이를 기쁘게 봉양하면서 세월이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간절하셨습니다. 그 사당에 알맞은 제사 의식을 정하여 후일 더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하시고, 수원에 웅장한 새 성을 쌓으면서도 국가 재정을 축내지는 않으셨습니다. 수신(修身)으로 시작하신 그 효과는 나라 풍속을 순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우리 부모 모시는 마음으로 팔도 늙은이들 모두를 봄 속에서 놀게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상서가 늘 풍년으로 나타나 금고(金膏)·옥촉(玉燭)이 등장할 정도였고, 덕 못지않게 건강하셔 북두(北斗)·남산(南山)으로 송축을 올렸는데, 이제 막 하늘이 주신 경사가 무르익을 무렵에, 어인 일로 하찮은 병이 그리 도지셨습니까. 신에 제사하여도 신의 응험이 없었으니 저 하늘을 어떻게 믿겠으며, 옥궤(玉几)에 갑자기 마지막 음성을 남기셨으니 이 소자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49세에 성상의 수명이 거기에서 그칠 줄 생각이나 했겠으며, 하늘이 수명을 연장시켜 주지 않았으니 대업(大業)을 마무리 못하신 것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으며, 자리를 이어받고 예를 행하는 것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사물을 대할 때마다 교훈으로 남기신 음성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다행히도 새로 정한 산릉(山陵)이 원침(園寢)과는 바로 산등성이 하나 사이여서 정월에 우위(羽衛)가 멎게 되면 천심(天心)이 아마 묵묵히 열어주실 것이며, 두 산의 상설(象設)이 매우 가까워 신도(神道)끼리 서로 의지하시게 되었습니다. 계시던 자리가 비게 되었으니 정중하신 그 모습 어디서 다시 뵈오며, 마지막 가실 길을 준비하고 있으니 어쩌면 세월이 이리도 빠릅니까. 이에 마지막을 장식할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자리에 계실 때의 훌륭한 업적들을 살펴보니, 동서 남북 할 것 없이 모두 다 심복할 만큼 이미 중화(中和)의 덕업을 쌓으셨으며, 예악형정(禮樂刑政) 모두가 알맞게 작용하여 고금을 두고 그 지덕(至德)이 이보다 더한 이가 없었습니다. 신하로서 천지와 같은 성상의 덕을 기림에 한 가지 덕으로만 칭하기는 어려워도, 옥을 새기고 금을 새기고 영원히 못잊을 아름다운 덕을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공의(公議)에 따라 감히 조심스레 이 말씀 올리고 이내 신으로 하여금 옥책(玉冊)을 받들어 존시(尊諡)를 문성 무열 성인 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 올리고, 묘호(廟號)를 정종(正宗)이라고 올리게 하였으니 우러러 바라건대 성령께서는 굽어살펴주소서. 보록(寶籙)에는 거룩한 이름 실리어 꽃다웁게 전대를 빛낼 것이며, 요도(瑤圖)에는 경사가 쌓이어 하늘의 대명 받아 자손들 복될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삼가 말합니다. 【 병조 판서 김조순(金祖淳)이 제술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1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89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歷史)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05]한나라 황제가 남월(南越)에 조서 : 한 고제(漢高帝)가 천하를 통일한 뒤 위타(尉佗)가 어지러운 틈을 타 자기 스스로 남월왕(南越王)이 되자 한나라는 육가(陸賈)를 보내 그를 남월왕으로 봉하고는, 앞으로 모든 월족(越族)과 화친하여 남변(南邊)이 시끄럽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사기(史記)》 권113 남월열전(南越列傳).
- [註 006]
제독(提督) :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을 이름.- [註 007]
주구(珠邱) : 장헌 세자(莊獻世子)의 묘를 이름.○謚冊文。 竊以皇穹不弔, 降割我家。 大德得名, 式遵彝典, 祗增摧咽, 敢云揄揚? 恭惟大行大王, 內聖外王, 天經地緯。 聞一知十, 聰明睿智之姿, 達五行三, 溫良恭儉以得。 大任降是自沖歲, 而備嘗險艱, 重華協于受文祖, 而攝理機務。 頒綸諭宗統之正, 邁漢皇詔南越之辭, 編書揭義理之明, 符魯聖止西狩之筆。 右賢左戚, 審用舍黜陟之權, 扶陽抑陰, 嚴邪正淑慝之辨。 提督受支孫之祀, 遺民腏龍灣之墠, 好音載懷, 忠獻躋英考之庭, 大老扁驪江之祠, 國是永定, 猗歟治法之盛, 卓爲哲辟之冠。 矯俗牖迷, 敎多術於雨路霜雪, 保和歸極, 化一世於杯酒戈鋋, 致力在畎畝之艱。 夏禹氏之躬稼天下, 康功絶盤遊之樂, 周文王之不遑日中, 縹帙芸緗。 樆院應奎璧之象, 龍鞱虎略, 壯營蔚風雲之奇。 視民如傷, 審獄情則哀敬以折, 交隣有道, 修聘好則忠信爲先。 躬薦瓚之精禋, 誠著昭格, 拒揚冊之群籲, 志光撝謙。 御不采之室, 服澣濯之衣, 克儉吾無間, 已峙常供之米, 寢修理之役, 精義自有寓焉。 惟玆政令間措施, 罔非典學中推去。 居敬踐實, 由《小學》、《大學》之門, 集義求仁, 述孟氏、孔氏之訓。 公私義利之界, 劈頭䐉於差毫謬千, 戰兢臨履之工, 盡精力於人一已百。 萬善俱足, 炯乎本源之澄淸, 一理相通, 儼然上帝之對越。 講誦則忘寢與食, 群經之隻字不遺, 治敎則以君兼師, 千聖之大統斯接。 歷代史傳之記載, 監戒常存, 百家著作之叢長, 包括都盡, 應乎事物, 沛若江河, 發爲文章, 倬彼雲漢。 鄕飮之舊禮旣復, 喜淳俗之挽回, 考亭之正路爭趨, 藹吉士之興作。 若夫人倫之盡性, 原乎聖孝之出天, 十載殫侍疾之誠, 曾不懈於一日, 終身抱含恤之痛, 蓋無樂乎千乘。 金縢啓頒, 兩聖之慈孝克闡, 珠邱遷卜, 萬世之隆奉罔虧。 覲月之禮常行, 肅肅悶宮之貌, 愛日之心冞篤。 瀜瀜長樂之歡, 稱洛南之兕觥, 重有待於後甲, 壯新豐之雉堞, 自不煩於度支。 二南正風化之原, 親親乃修身之效, 八域躋春臺之上, 老老推錫類之仁。 休祥屢驗於豐登, 治臻金膏玉燭, 康强克配於乾健, 頌騰北斗南山, 方當慶貺之潛, 周夫何微痾之示憊? 圭幣之冥應, 莫賴彼蒼難諶, 玉几之末音遽揚, 小子何怙符衍策之虛一? 詎意聖壽之止斯, 靳夢齡之與三, 忍說大業之未卒, 踐位行禮之擧曷堪? 摧腸遇物, 垂誨之音宛猶在耳。 幸玆山陵之新兆, 廼在園寢之隔岡, 孟春之羽衛爲停, 意者天心之默啓, 兩麓之象設孔邇, 庶幾神道之相依。 丹扆永虛, 衋儀刑之寢邈, 素廞將戒, 慨光陰之莫留? 肆擧崇終之縟儀, 爰稽在宥之盛績, 東西南北之無思不服, 神功旣致於中和, 禮樂刑政之咸秩有文, 至德莫尙乎今古。 摸天畫日, 縱難節一惠之稱, 撿玉鏤金, 允爲觀七廟之美。 寔遵公議, 敢有溢辭, 爰命使臣, 奉玉冊上尊謚曰文成武烈聖仁莊孝, 廟號曰 正宗, 仰冀聖靈, 俯賜昭鑑。 播芳寶籙, 揭鴻號而光前, 毓慶瑤圖, 迓駿命而裕後。 嗚呼! 哀哉。 謹言。 【兵曹判書金祖淳製。】
- 【태백산사고본】 55책 1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289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歷史)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