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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48권, 정조 22년 6월 1일 계사 1번째기사 1798년 청 가경(嘉慶) 3년

좌의정 채제공이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불응하다

좌의정 채제공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요즘에 신을 탄핵하는 상주(上奏)가 앞뒤에서 서로 호응하여 나와서, 신을 지척하는 일이 아니면 하루의 책임을 메꿀 수 없는 실정이 되었습니다. 신은 매이지 않은 빈 배[虛舟]와 같은 몸으로 공공연히 세상 사람 출세길의 매개체가 되어 있으니, 인생의 피곤하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신은 한갓 조정을 선뜻 떠나버리는 것이 차마 못할 일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몸을 보전하는 것이 명철(明哲)하다는 것은 알지 못하여,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한 채 시일을 보내고 있으니, 이는 곧 노망(老妄)으로 그런 것입니다. 또 처음에는 묘천(廟薦)의 일에 대해서 한사코 명을 어기려고 했다가 끝내 정중하신 은비(恩批)를 인하여 수치를 무릅쓰고 강행하였으니, 이 또한 노망으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천거함에 미쳐서는 한갓 신의 마음만 믿고 마치 맹인(盲人)이 지팡이로 땅을 더듬으면서 길을 찾듯 무턱대고 행하여, 남의 비난을 많이 받고 나라의 체모를 대단히 손상시킬 것은 생각하지 않았으니, 이 또한 노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삼가 생가건대, 신은 전하의 특수한 은총을 입었으니, 비록 신의 자자 손손으로 하여금 사주(蛇珠)와 작환(雀環)113) 을 다 바치게 할지라도 오히려 그 은총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기에 부족한데, 더구나 신의 일신에 있어서도 몸과 마음을 다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고 마치 몸을 사리어 물러나려는 태도가 있다면 이는 인간의 도리상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유독 신명께 죽임을 받을 일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일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비록 엄중한 예의의 교훈으로도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을 또한 억지로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으로 말하자면 조복(朝服)을 몸에 덮고 큰 때를 끌어다 그 위에 얹은 예가 있고,114) 늙은 것으로 말하자면 팔십 세가 되면 임금이 부르지 않는다는 말이 있으니, 이런 처지에 이르면 정상적인 도리로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이 조정에 벼슬한 지 5, 60년 동안에 몸이 세망(世網)에 걸리어 공포심이 끝내 병이 되어 서, 남들이 혹은 신을 일러 기혈(氣血)은 그리 쇠한 데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나 정신은 죽은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한창 성상께서 국사를 위해 근심 걱정하며 정신을 가다듬으시는 이때를 당하여, 보상(輔相)이란 명칭을 가진 신이 빈청(賓廳)의 모임이나 주사(籌司)의 자리에 한 해가 다가도록 나가지 못하고도 뻔뻔스레 마치 못 들은 것처럼 하고 있으니, 이는 대체로 노망이 빌미가 되어 일이 문득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신의 얼마 안 남은 여생 중에 대죄(大罪)를 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조정에서 물러나는 것 한가지 일뿐이니, 바라건대 속히 치사(致仕)를 윤허하시어 생성(生成)의 은택에 유종의 미를 거두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연령이 80에 가까운지라, 치사를 하려는 간절한 말이 이미 연초부터 나왔었으나, 내가 윤허하지 않았고 경도 마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은 곧 우리 두 사람이 법도를 변통해서 다같이 절로 헤아림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오직 경의 강마(講磨)한 것이 이미 익숙해 졌으므로 나는 경을 독실히 믿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경의 소장을 보건대 ‘걸해(乞骸)’ 두 글자를 꺼내서 늙었다는 이유로 치사(致仕)를 하려고 뜻을 굳힌 것이 마치 수레를 기다리지 않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버리려는 듯한 기상이 있으니, 우리가 서로 면대해서 짐작하여 결정했던 뜻과 어찌 그리도 상반된단 말인가. 대신의 출처는 가볍지 않은 것이라, 한 때에 관함(官銜)을 사양하는 것도 오히려 혹 화를 발끈 내고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영원히 치사하기를 기약한단 말인가. 연석에서 질정하여 말했고 굳게 결정한 오래 전의 승락이 ‘식양(息壤)이 저기에 있다.115) 는 고사에 비할 바가 아니니, 경은 모름지기 주청한 것을 속히 단결하고 전유(傳諭)하는 승지를 따라 조정에 나와서, 이 글로 다 말하지 못한 하유를 들으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59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89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註 113]
    작환(雀環) :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사주는 옛날 수후(隋侯)가 부상당한 큰 뱀을 보고 영이(靈異)하게 여기어 약을 발라 치료를 해주었던 결과, 그 뱀이 보답으로 명주(明珠)를 뱉어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고, 작환은 한(漢)나라 때 양보(楊寶)가 일찍이 부상당한 황작(黃雀)을 구해주었던 결과, 뒤에 그 황작이 갑자기 황의 소년(黃衣少年)으로 변하여 보답으로 옥환(玉環)을 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탐신기(搜神記)》, 《속제해기(續齊諧記)》.
  • [註 114]
    조복(朝服)을 몸에 덮고 큰 때를 끌어다 그 위에 얹은 예가 있고, : 공자(孔子)가 병이 있을 때 임금이 문병을 오면, 누워 있는 몸이라 조복을 갖춰 입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평상복으로 임금을 볼 수도 없기 때문에 누은 채로 조복을 가져다 몸에 덮고 그 위에 큰 띠를 끌어다 얹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논어(論語)》 향당(鄕黨).
  • [註 115]
    ‘식양(息壤)이 저기에 있다. : 식양은 지명. 전국 시대 진무왕(奏武王)이 좌승상 감무(甘茂)와 식양에서 서로 맹약(盟約)을 한 바 있었는데, 뒤에 진 무왕이 그 맹약을 파기하려 하자, 감무가 말하기를, "식양이 저기에 있습니다." 하니, 진 무왕이 다시 그 맹약을 이행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권71.

○癸巳朔/左議政蔡濟恭上疏曰:

"近日白簡之論, 前倡後應, 非指斥臣身, 無以塞一日之責。 臣以虛舟不繫之身, 公然爲名塗奇貨者, 人生疲惱, 孰過於此? 而臣則徒懷便訣之爲不忍, 不知保身之爲明哲, 遲徊不去, 歷時度日, 此老妄而然也。 始欲抵死違命於廟薦之事, 竟因恩批鄭重, 包羞忍恥, 强而行之, 此老妄而然也。 及其薦似, 徒信己心, 冥行擿埴, 不念厚招人譏, 重傷國體, 此亦非老妄而何? 竊念臣蒙被殿下之隆恩異渥, 雖使臣子子孫孫, 盡效雀蛇之珠環, 猶不足報其萬一, 況在臣身, 不思所以盡瘁之道, 有若奉身而退者, 不特人理之所不敢出, 獨不畏神明殛之乎? 然事到無可奈何處, 雖以禮訓之嚴, 亦不能使强其所不强。 故以言乎病則有加朝服拖紳之例, 以言乎老, 則有八十君不召之文, 到此地頭, 不可以常道論也。 臣立朝五十六年之間, 身絓世網, 怖畏成疾, 人或謂之以榮衛不至甚脫, 而其甚精則死已久矣。 當此聖上憂勤勵精之時, 名以輔相, 賓廳之會, 籌司之坐, 終歲不赴, 恬若無聞, 此蓋老妄之爲祟, 而事便到無奈何處也。 見今息黥補劓於桑楡奄奄之中者, 惟乞骸一着是已, 伏乞亟許休致, 以卒生成之澤。"

批曰: "卿之年齡, 將近八耋矣, 乞骸致政等辭懇, 已自年至之初, 予之所不許, 卿之黽勉遲回者, 檃括之衡尺, 俱有自來稱量也。 惟其講磨旣熟, 予則篤信之而已。 今見來章, 便說出乞骸二字, 決意於致政告老, 有若望望然去不俟駕者然, 與面對斟定之義, 何太相反乎? 大臣出處, 不輕而重, 一時之辭官銜, 猶嫌其或涉悻悻, 何況乞骸期限? 質言於筵間, 牢定之宿諾, 不啻息壤之在彼, 卿須亟斷所請, 隨傳諭承宣造朝, 聽此書不盡言之諭。"


  •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59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89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