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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47권, 정조 21년 9월 6일 임신 1번째기사 1797년 청 가경(嘉慶) 2년

동래 용당포 앞바다에 표류한 이국의 배에 대해 논의하다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치계(馳啓)하기를,

"이국(異國)의 배 1척이 동래(東萊) 용당포(龍塘浦) 앞바다에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배 안의 50인이 모두 머리를 땋아 늘였는데, 어떤 사람은 뒤로 드리우고 머리에 백전립(白氈笠)을 썼으며, 어떤 사람은 등(籐)으로 전립을 묶어 매었는데 모양새가 우리 나라의 전립(戰笠)과 같았습니다. 몸에는 석새[三升] 흑전의(黑氈衣)를 입었는데 모양새가 우리 나라의 협수(挾袖)와 같았으며 속에는 홑바지를 입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파랗습니다. 역학(譯學)을 시켜 그 국호(國號) 및 표류해 오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한어(漢語)·청어(淸語)·왜어(倭語)·몽고어(蒙古語)를 모두 알지 못하였습니다. 붓을 주어 쓰게 하였더니 모양새가 구름과 산과 같은 그림을 그려 알 수 없었습니다. 배의 길이는 18파(把)이고, 너비는 7파이며 좌우 아래에 삼목(杉木) 판대기를 대고 모두 동철(銅鐵) 조각을 깔아 튼튼하고 정밀하게 하였으므로 물방울 하나 스며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 윤득규(尹得逵)가 치계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상우(鄭尙愚)의 정문(呈文)에 ‘용당포에 달려가서 표류해 온 사람을 보았더니 코는 높고 눈은 푸른 것이 서양(西洋) 사람인 듯하였다. 또 그 배에 실은 물건을 보니 곧 유리병·천리경(千里鏡)·무공은전(無孔銀錢)으로 모두 서양 물산이었다. 언어와 말소리는 하나도 알아 들을 수 없고, 오직 「낭가사기(浪加沙其)」라는 네 글자가 나왔는데 이는 바로 왜어(倭語)로 장기도(長崎島)이니, 아마도 상선(商船)이 장기도부터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한 것 같다. 우리 나라 사람을 대하여 손으로 대마도(對馬島) 근처를 가리키면서 입으로 바람을 내고 있는데, 이는 순풍을 기다리는 뜻인 듯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풍이 불면 떠나보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47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41면
  • 【분류】
    외교(外交)

    ○壬申/慶尙道觀察使李亨元馳啓: "異國船一隻, 漂到東萊 龍塘浦前洋。 船中五十人, 皆編髮, 或垂後, 頭戴白氈笠, 或籐結笠, 形如我國戰笠。 身披三升黑氈衣, 形如我國挾袖, 裏着單袴。 其人皆鼻高眼碧。 令譯學, 問其國號及漂到緣由, 則之語, 俱不曉解。 授筆使書, 則形如雲山圖畫, 不可曉得。 船長十八把, 廣七把, 左右下杉板, 俱以銅鐵片鋪之, 堅緻精完, 點水不透云。" 三道統制使尹得逵馳啓: "東萊府使鄭尙愚呈稱: ‘馳往龍塘浦, 見漂人, 則鼻高眼碧, 似西洋人。 且見其所載物貨, 卽琉璃甁、千里鏡、無孔銀錢, 皆是西洋産也。 言語聲音, 一未曉解, 惟浪加沙其四字, 卽長崎島也, 似是商船之自長崎島, 轉漂到此者。 對我人以手指對馬島近處, 以口吹噓, 似是待風之意云。’" 命依其願, 候風發送。


    • 【태백산사고본】 47책 47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41면
    • 【분류】
      외교(外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