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몽인의 관작을 회복시키다
유몽인(柳夢寅)의 관작을 복원시키니, 의금부가 아뢰기를,
"서부(西部) 유학 유화(柳𤤤)의 상언(上言)에 ‘신의 7대조 몽표(夢彪)의 아우 몽인이 지난 계해년049) 에 문회(文晦)와 이우(李佑)의 무고를 입고 이름이 역안(逆案)에 들어가서 여태 신원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속히 유사에게 명하여 역적의 역명을 쾌히 씻어 주소서.’ 하였습니다만, 그의 호소에서 비록 몽인이 진하(陳賀)에 불참하였다가 그처럼 도륙을 당한 것으로 신원을 호소하는 핵심을 삼고 있으나, 산사(山寺)에서 시를 짓고 죽기로 작정하였다는 말이 단안(斷案)에 함께 들어 있고, 또 의금부 등록에 ‘포도청에서 몽인을 망명한 지 여러 날 만에 체포하였다.’라는 계사가 있고 보면, 그의 범죄가 크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그런데도 근 2백 년 뒤인 오늘날에 와서 방손(旁孫)이라는 구실로 장황한 말을 늘어 놓아서 성상의 귀를 번거롭히기까지 하면서 감히 신원할 궁리를 낸다는 것은 그 정상을 캐어 볼 때 너무도 무엄한 행위입니다. 복직을 시행하지 말고 해조로 하여금 법률을 적용하여 엄히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의금부가 또 아뢰기를,
"판중추부사 박종악(朴宗岳)의 상언에 ‘신이 언젠가 야사(野史) 속에서 유몽인의 사적을 보고 반복 강구한 바, 마침내 그 행적을 가엾게 여기고 그 정상을 용서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책을 덮은 채 탄식을 하곤 했습니다. 대저 몽인은 섬기던 임금에게 충성을 하느라 나라의 존망과 임금의 명암으로써 그 지조를 바꾸지 않고, 자취를 감추고 서산(西山)으로 들어가서 시를 지어 과부에 비견하며 끝까지 돌아서지 않고 죽기를 작정한 것으로 볼 때, 시종 한결같이 절개를 지켰다고 보아도 됩니다. 그리고 공사(供辭)로 보더라도 천명(天命)이 한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서 애당초 꼬집을 만한 패설(悖說)을 하지 않았고 보면, 어찌 신하에게 내리는 극죄를 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옛사람들의 행적을 논평하는 선비들 가운데는 지금까지도 애처로워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기자헌(奇自獻)과 김원량(金元亮)은 같은 때에 형벌을 받았어도 자헌은 흉도들과 이론(異論)을 폈다는 이유로 마침내 신원되었고 원량은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그의 비문을 지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몽인이 옛 임금을 위하여 절의를 다하다가 몸은 도륙을 당하고 이름은 죄적(罪籍)에 오른 것에 대해 억울하다고 하는 일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몽인은 혼조(昏朝) 초년에 이조 참판을 지냈는데도 흉도들과 의논을 달리하다가 십여 년 동안 산수(山水)를 방랑하였고 보면, 조정에 있을 적의 전말도 역시 취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기자헌의 사례에 의하여 특별히 신원하여 주어서 풍속을 세우고 세상을 권려하는 정치의 표본을 삼으소서. 그러나 일의 체모가 가볍지 않은 만큼, 조정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서 시행하는 것이 지당할 듯합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김희(金憙)는 ‘유몽인이 비록 흉도들과 다르기는 하나 반정(反正) 이후에도 감히 백이(伯夷)·숙제(叔齊)를 자처하며, 이미 무너진 이륜(彝倫)을 다시 바로잡겠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논한다면 당시의 극형을 어찌 감히 억울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의 두 조카가 처음에 귀양을 가기는 하였으나 마침내 사면되었고 보면, 조정의 처분이 더더욱 어찌 십분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평생 이력을 되돌아 볼 때 혼조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2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그의 7대 방손이 외람되고 잗다란 말로 갑자기 신원을 거론한다는 것은 이륜을 북돋우는 도리에 흠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였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란 오직 그 처지에서 목숨을 바칠 뿐 임금의 명암으로써 절의를 달리하지 않는 것이 떳떳한 도(道)입니다. 이번에 유몽인이 벌을 받은 것은 그 죄가 진하(陳賀)의 반열에 참석하지 않고 시를 읊어 올린 데 있는데, 그 시의 인용어가 비록 불륜(不倫)하기는 하나 자신의 결심을 드러낸 것일 뿐 애당초 분의(分義)를 벗어난 말이 없고 보면, 당시에 극형에 처한 것은 대개 인심을 진정시키고 후환을 방지하자는 뜻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또 조정에 있을 적의 전말을 상고하여 보아도 혼조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벼슬을 한 적이 없었으며 끝내 흉도들과 의논을 달리하여 외진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반정한 뒤에도 기꺼이 폐칩(廢蟄)하여 나름대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리를 자처하였으므로, 당시 노성(老成)들의 말에서도 이미 살려주자는 논의가 있었고 후세 유식자들 중에서도 아직까지 그를 안타깝게 여기는 논의가 많습니다. 더구나 문회(文晦) 등이 고발한 사람들은 벌써 다 신원되었고 보면, 오늘날 그의 방손의 호소는 외람되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된 중대한 사안이고 대신의 헌의도 서로 다르므로 본부에서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주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판부(判付)하기를,
"억울한 원한을 품은 지가 1백 년이 넘도록 신원을 언급한 사람이 없었으니 잘못된 일이며 궐전(闕典)이라 하겠다. 대저 유몽인의 사적은 하인배와 아녀자들까지도 일컫는 사실이므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노성한 장자(長者)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속일 수 없은 공론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남의 신하가 되어 몸을 버리거나 목숨을 끊은다는 것은 큰 절의를 지키자는 의도는 마찬가지이지만, 어느 한쪽을 택함에 있어서 그 난이도는 각기 다르다. 이러므로 조용히 의리를 지키는 것이 비분강개하여 목숨을 끊는 쪽보다 나은 듯도 하다. 유몽인으로서야 어찌 어렵고도 어려운 입장이 아니었겠는가. 《시경(詩經)》 백주편(栢舟篇)을 상스럽고 비속한 말이라고 하지 말라. 그의 남록시(南麓詩)는 참으로 천고의 절조(絶調)로서, 그 음조는 원망을 하는 듯도 하고 애원을 하는 듯도 하며, 그 뜻은 흥(興)인 듯도 하고 비(比)인 듯도 하여 읽던 자가 책을 덮어버리고 듣던 자가 눈물을 흘리게 하니, 이것 또한 몽인의 생사(生死)간의 단말마적 절규이다. 그가 혼조 때에는 정도(正道)를 지키느라 자취를 감추어 기꺼이 폐칩(廢蟄)하였고 반정 뒤에 와서는 일월이 빛을 뿜으며 천지가 다시 밝아졌어도 절의를 굽히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으니, 떳떳한 분수에 있어서 조금의 하자도 없다. 기자헌은 같은 때에 무고를 당하고서도 용서를 받아 죄를 입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죄를 입었다가 곧바로 복관이 되었으나, 유독 몽인만은 그같은 조행(操行)으로도 마침내 그에 대한 논의가 금지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길재(吉再)·김시습(金時習) 등을 관용하던 성조(聖祖)의 뜻이 아니라 하겠다.
또 듣자니 몽인의 친조카 숙(潚)과 혁(㴒)이 귀양지에서 풀려나 한 사람은 병조 당상이 되고 한 사람은 승지가 되었고 보면, 또한 성조의 뜻을 우러러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죄안이 아직 의금부에 남아 있으니, 널리 자문을 구하고 있는 오늘날인 만큼, 비록 서로간에 의견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참으로 당연히 시행하여야 될 일이고 또 성조의 뜻을 잘 계승하는 데 빛이 나는 것이라면 어찌 그 차이가 더욱 분명해지길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유몽인의 신원은 원하는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40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72면
- 【분류】인사(人事)
- [註 049]계해년 : 1623 인조 1년.
○戊戌/復柳夢寅官爵。 義禁府啓言: "西部幼學柳𤤤上言以爲, 其七代祖夢彪弟夢寅, 昔在癸亥, 爲文晦、李佑所誣告, 名在逆案, 尙未伸雪, 伏乞亟命有司, 快雪逆名云。 其所呼籲, 雖以夢寅之不參陳賀, 蒙此重戮, 作爲鳴冤昭脫之肯綮, 而山寺題詩, 以死自劃, 俱屬斷案。 臣府謄錄, 有自捕廳, 捉得夢寅於亡命日久之啓, 則其所犯之叵測, 明若觀火, 而今於近二百年之後, 稱以旁裔, 張皇拖引, 瀆擾天聽, 敢生伸雪之計者, 究其情狀, 萬萬無嚴。 請勿施, 令該曹照法嚴勘。" 命議于大臣。 義禁府又啓言: "判中樞府事朴宗岳以爲: ‘臣嘗於野史中, 見柳夢寅事。 反復講究, 終有愍其跡而恕其情者, 未嘗不掩卷而歎也。 蓋夢寅, 忠於所事, 不以存亡明暗, 而易其操。 屛跡而入西山, 作詩而擬孀婦, 百折不回, 一死自期, 則雖謂之終始一節可也。 且以供辭觀之, 明知天命之所歸, 初無悖說之可執, 則豈容加之以人臣之極罪乎? 是以至今尙論之士, 自不無爲之惻傷者矣。 粤若奇自獻、金元亮同時抵罪, 而自獻則以立異凶論, 竟蒙伸雪, 元亮則先正臣宋時烈爲作墓文。 推此以觀, 夢寅之爲舊君盡節, 而身陷大戮, 名在丹書者, 其所稱冤, 不是異事。 況夢寅在昏朝初年, 一經亞銓, 而與凶徒議論岐貳, 放浪山水者, 爲十數年所, 則立朝顚末, 亦有可取者。 依奇自獻例, 特許洗案, 以爲樹風勵世之政, 而事體不輕, 博詢在廷, 恐爲至當’ 云。 判中樞府事金憙以爲: ‘柳夢寅, 雖與凶徒有異, 乃敢於改玉之後, 自處以夷、齊, 不顧彝倫之旣斁而復正。 以此論之, 則當時誅殛之典, 豈敢曰冤乎? 況其兩姪, 始雖被謫, 終皆蒙宥, 則朝家之所以處之者, 尤豈不十分稱停乎? 跡其平生, 不過爲昏朝效死者, 則今於近二百年之後, 以其七代旁孫猥濫屑越之言, 遽議伸雪, 恐有欠於扶植倫彝之道’ 云矣。 人臣事君之義, 惟其所在而致命, 不以明暗而異節, 自是經常之道。 今此柳夢寅之伏法, 罪在不參賀班, 誦告詩辭, 而其所引擬, 雖云不倫, 只暴自矢之意, 初無犯分之語, 則當時之斷以極律, 蓋出定人心、防後患之義, 而夷考立朝本末, 其在昏朝, 未嘗膴仕, 終能岐貳凶論, 屛跡窮山, 更化之日, 甘心廢蟄, 自附於不二之義。 伊時老成之言, 旣有傅生之議, 後世有識之士, 尙多愍傷之論。 況文晦等所告之人, 旣皆伸雪, 則今其旁裔之訟冤, 不可謂濫越, 而係是年久重案, 大臣獻議, 甲乙不齊, 臣府不敢輕議。 請上裁。" 判曰: "茹恨齎冤者百年, 而人莫有議到於伸屈, 雖謂之欠事闕典, 可也。 大抵柳夢寅之事蹟, 輿儓誦之, 婦孺傳之, 不待老成長者從緩之說, 槪可驗公議之不誣。 人臣之捐軀捨命, 其爲判大節則一也。 熊魚之所欲, 難易各異, 以是從容就義, 勝似慷慨殺身。 夢寅者, 豈不是難之難者? 《栢舟》之唱, 莫云下俚鄙辭; 《南麓》之詠, 誠爲千古絶調。 其音如怨如訴, 其義如興如比, 見者掩卷, 聽者墮淚。 此又夢寅爲人爲鬼之節拍。 其在昏朝也, 守正而屛跡, 自甘淪廢; 逮夫改玉之辰, 日月光華, 大明中天, 乃能矢心不渝, 亦未嘗於常分上絲毫有虧缺處。 奇自獻之同時被誣, 而恕不加罪, 因他伏辜, 而旋獲復官。 獨於夢寅, 反以夢寅之操行, 竟歸勿論之科者, 有非所以處吉再、金時習諸人之聖志也。 且聞夢寅之親姪潚、㴒, 自謫蒙宥, 一爲騎堂, 一爲承宣云爾, 則聖祖聖念, 尤亦可以仰認。 然而丹書鐵案, 尙在王府。 今於博詢之下, 雖有甲乙之論, 事苟當爲, 且有光於仰體志事之一端, 則何待參差之爛漫? 柳夢寅伸雪事, 依願施行。"
- 【태백산사고본】 40책 40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472면
- 【분류】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