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서 암행 어사 이면응이 복명하고 수령들의 죄를 성론하는 서계를 올리다
관서(關西) 암행 어사 이면응(李冕膺)이 복명(復命)하니, 상이 소견하고서 백성들의 고락(苦樂)과 수령들의 정사에 대하여 물었다. 면응이 서계(書啓)를 올려, 구성 부사(龜城府使) 김형주(金衡柱), 철산 부사(鐵山府使) 박광적(朴光迪), 전 부사(前府使) 홍백유(洪百游), 자산(慈山) 전 부사 채위하(蔡緯夏), 희천(熙川) 전 군수 정욱세(鄭勗世), 숙천(肅川) 전 부사 임영로(林永老), 태천(泰川) 전 현감 목만중(睦萬中), 황해도 전 관찰사 이홍재(李洪載), 평산 부사(平山府使) 서유화(徐有和) 등의 불법적인 일에 대하여 논하고, 또 평안도 관찰사 정창성(鄭昌聖), 덕천 군수(德川郡守) 신엄(申曮), 영변(寧邊) 전 부사 허근(許)의 죄를 성론(盛論)하기를,
"정창성은 사무에 전혀 어두운 데다가 노쇠하기까지 하여 막하(幕下)의 요속(僚屬)들과 관아의 식객(食客)들이 제멋대로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여러 고을에서 기민(飢民)의 수효를 뽑아올리면 숫자를 전부 줄여버려, 죽을 지경에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나 누락되었습니다. 정주(定州)의 부자(富者)를 막하(幕下)에다 불러다놓고 청북(淸北) 지방에 흩어져 있는 영작전(營作錢)을 그로 하여금 주관하여 처리하게 하였고, 차임할 때 일찍이 아무런 허물이 없던 사람을 느닷없이 갈아치웠으므로 호소하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오고 민심을 잃어왔습니다. 신엄은 장기간 동안 정신이 혼매한 상태로 있어 정사(政事)가 여러 통로로 나오고,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하니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맡기기가 어렵습니다. 간사한 향리(鄕吏)가 나쁜 짓에 앞장서고 관아의 식객들과 짜고서 제멋대로 소임(所任)을 팔아 관청으로 돈을 받아들이는데, 천금(千金)들이 돈궤를 좌우에 죽 벌여놓고 아침 저녁으로 어루만지며 아끼고 있습니다. 환곡에 있어서는, 5냥(兩)을 바치게 하고는 3냥어치만 내주며, 대동미(大同米)의 경우는 8냥을 대신 바치게 하고는 좁쌀로 바꾸어 충당하며, 굶주리는 백성에 대해서는 수효를 늘려 허위 기록을 하고서 진휼 밑천을 써 없앱니다. 그리고 환호(還戶)에 대해서는, 관계없는 사람을 끼워넣고는 환곡을 나누어준 것으로 하여 어지럽게 뒤섞어 놓았습니다. 또한 창속(倉屬)들에 대해서는, 민간에 나눠줘야 할 돈을 빚으로 주어 이자를 늘리고 매번 민간에 나눠줘야 할 때마다 이곳 저곳에서 끌어다 메꾸어 넣으며, 유민(流民)들에 대해서는, 더러 이미 납부한 환곡이 많은데도 모두 아직 바치지 않은 것으로 등록해 놓았습니다. 또 죽을 쑤어주는 일에 있어서는, 대신 생콩을 한 줌씩 나눠준 까닭에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 찼습니다. 창고는 텅 비고 민정(民情)은 황급하니, 이 허다한 죄상에 대해 마땅히 무거운 처벌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허근은 사람됨이 거칠고 패려한 데다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려대며 종일토록 취해 지내므로, 송사 문건이 많이 지체되어 있고, 무고한 자에게 형장(刑杖)을 치는 일이 계속하여 발생하는데, 술이 깬 후에도 살피지 못하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놀라며 분개하고 있습니다. 밤낮으로 일삼는 것이라곤 잇속만 늘리는 일이어서, 성루(城樓)에 회칠한다는 것을 빙자하여 회를 실어오기 위한 값을 가난한 백성들에게까지 두루 거두었으며, 뇌물의 통로를 넓게 열어놓아 향임(鄕任)의 첩(帖)은 모조리 부잣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또 지난해의 흉작을 그는 만나기 쉽잖은 기회로 여기고서 조세를 대부분 농작물을 심지도 않은 토지에다 징수하고 환곡을 받아들일 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벌거숭이에게까지 엄하게 독촉을 하였습니다. 채찍질을 마구 가하여 고혈을 다 짜낸 다음에는 5, 6 꿰미의 돈을 받아들인 데 대하여 겨우 3냥어치만을 나누어주며, 여덟 가지 곡식을 대신 바치게 하고는 서로 절미(折米)하되 가장 귀한 곡식은 모두 내다 파는 것으로 들어가고 품질이 나쁜 곡식으로 구차하게 환자 납입곡을 채워넣었습니다. 또 원납곡(願納穀)을 강제로 받아들여 태반은 몰수해 버리다시피 하고, 기민을 구제하는 정사는 대략 벌여 되도록 줄이는 데 힘을 썼습니다. 이에 굶주린 인구를 뽑을 즈음에는 허실(虛實)이 서로 뒤섞이고, 각면(各面)의 소임(所任)은 제멋대로 그냥 두기도 하고 뽑아버리기도 합니다. 기민들에게 죽을 먹일 때는 물을 반사발씩 타고, 양식거리를 줄 때는 겉곡식을 몇되씩 섞어서 나눠줍니다. 이에 촌락에서는 그를 원수보듯 미워하고 인근 사람들은 그를 도적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안찰(按察)하는 사신(使臣)이 부락(部落)을 순찰하게 되면, 자기의 잘못이 상부에 알려질까봐 겁을 내어 교졸(校卒)들을 많이 풀어 정소(呈訴)하는 길을 막아버리니, 길가는 사람들조차 팔을 걷어붙이며 지금껏 격분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여러 조목은 무겁게 처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상원 군수(祥原郡守) 이언영(李彦煐), 희천 군수(熙川郡守) 이득신(李得臣), 운산 군수(雲山郡守) 서유봉(徐有鳳), 양덕 현감(陽德縣監) 송준재(宋俊載)는 치적(治績)이 볼 만한 것이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조가 계청(啓請)하기를,
"철산 부사 박광적, 평산 부사 서유화, 중화 부사(中和府使) 유회원(柳晦源)은 모두 파출(罷黜)하고, 구성 부사 김형주, 덕천 군수 신엄은 파출한 후 죄상을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심문하여 감률(勘律)하여 처벌하도록 하고, 자산 전 부사 채위하, 태천 전 현감 목만중은 모두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처결토록 하고, 철산 전 부사 홍백유, 희천 전 군수 정욱세, 숙천 전 부사 임영로, 영변 전 부사 허근은 모두 해부로 하여금 붙잡아다가 심문하여 엄하게 감률(勘律)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면응이 또 별단(別單)을 올려 아뢰기를,
"관서 지방의 작년 흉작은 수십년 이래 없던 것이었습니다. 민간에서는 지나치게 웅성거리면서 점차 소요를 일으키는데도, 도신(道臣)은 보고 듣는 것이 넓지 못하고 보니 풍년인지 흉년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조세 독촉이 급한 줄만 알고서 면대하여 책망하고 관문(關文)으로 신칙하는 것이 열읍(列邑)에 붐비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환곡의 봉납이 엄하지 않고 봉창(封倉)을 하는 것이 지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읍의 수령들은 큰 소리로 위협하는 데 겁을 먹고 이를 봉행하기에 겨를이 없으며, 그 가운데 특히 못된 자는 또 덩달아 기회를 노려 사리(私利)를 도모함으로써, 재해를 기회삼아 백성들을 괴롭히는 죄과를 스스로 저지르고 있습니다. 평상시에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현재의 일로 원망이 한창 일어남에 고을 수령에게 하소연을 하려면 고을 수령이 본체만체 여기고, 도백(道伯)에게 하소연을 하려면 도백 역시 들은체만체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한 집이 비고 내일 두 집이 비어, 점점 더하여 동쪽 마을이 이렇게 되고 서쪽 마을이 또 이렇게 됩니다. 심지어 살림이 약간 유족(裕足)하다는 집에서도 먹을거리가 곤란한 걱정이야 없더라도 또한 이웃과 친족들이 내야 할 조세의 독촉을 받느라 못견디고 게다가 유리 걸식하는 자들이 함부로 약탈하는 것을 버티어낼 수가 없어서, 규모가 큰 집은 토지와 집을 팔아 없애 소와 말에다 싣고 떠나며 규모가 작은 집은 해진 신발에 누더기를 걸치고 길에서 갈팡질팡 헤매는 꼴이 거의 천리 백리나 되도록 널려 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성명(聖明)께서는 백성들의 고통을 곡진히 보살피어 따스한 윤음(綸音)을 거듭 내렸으며, 본토로 돌려보내어 신역(身役)을 감면해주고 연로에서 끼니를 먹여주면서 관청 사람이 호송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소문이 퍼지게 되자 보고 듣는 사람들이 다들 귀가 솔깃해졌고 이로부터 민정(民情)이 안정될 것을 장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서(海西) 지방의 경우는, 이미 일로(一路)가 모두 흉년인 것이 아니고 단지 곡산(谷山) 고을이 특히 심한 정도인데도 유민(流民)들이 이렇게 많은 것은, 전적으로 방백과 수령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전 부사 김노성(金魯成)은 아둔한 데다 지각이 없어 흉년을 풍년으로 인식하고, 흉년 실태를 쉬쉬하며 숨겨야 할 일로 여기고, 환곡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능사(能事)로 여긴 까닭에, 백성들이 다들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영읍(營邑)에 호소를 하였으나 어디에서고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백성들이 서로 의논하여 짚신 감발을 하고 먼길을 떠나 대궐문에 호소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노성은 이 기별을 먼저 듣고 이미 서울에 들어간 사람을 화급히 뒤따라 붙잡아다가 여러달 동안 가두어놓고 죄를 다스렸습니다. 또 도백은 조정이 유민들을 호송한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편비(褊裨)를 급히 차비 차려 보내어 밤낮없이 달려가 진장(賑場)을 허둥지둥 벌려놓게 하고는 겨우 읍내(邑內)의 백성들을 먹였는데, 영읍(營邑)은 이미 파면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영읍(營邑)에 새 부임자가 와 일로(一路)의 면모가 달라졌으니 앞으로의 구제 정책은 아마 걱정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사납고 거친 풍속과 투박하고 야멸찬 버릇이 관서(關西)에 비해 거의 갑절이나 더하니, 실로 매우 다스리기 어려운 곳입니다. 근래에는 방백·수령들이 뜨거운 맛에 너무 지나치게 징계되어 그저 고식적인 혜택만을 베풀고자 생각하고 미연(未然)에 단속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으므로, 민정(民情)은 갈수록 타성에 젖어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시작한 일을 계속적으로 이어나가지 못하다가 장차 우려를 끼치게 될까 걱정됩니다.
관서 지방의 폐단의 근원은, 조적(糶糴)이나 금점(金店)이나 향임(鄕任)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이 이곳을 지나올 적에 대략 마음속에 떠오르는 시정 방법이 있었기에, 감히 이에 덧붙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적법은 10년 동안에 3년분의 식량을 저축함으로써 수한(水旱)이나 기근(饑饉)에 대비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백성들이 이미 힘들여 농사지어 태반을 관청 창고의 저축에 들여놓고서 바라는 것은 몇년 뒤에 있을 흉년에 쓰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미 흉년을 만났어도 또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이 어찌 크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환곡이 가장 많은 곳에는 한 집에서 받는 것이 거의 10여 포(包)가 넘으니 실로 가난한 백성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간악한 향임(鄕任)과 교활한 아전들은 그 속에서 자손들을 키우면서 절입(折入)하고 번작(反作)을 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탐욕스런 관리와 수령들은 그것을 외부(外府)의 기화(奇貨)로 여기고서 ‘가분(加分)’·‘전환(錢還)’ 등 교묘하게 명목을 붙이는 것입니다. 간혹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법을 지켜나가는 관리가 있기는 하지만, 명목이 이미 번거로우므로 총명함이 미치지 못하고 간사한 행위를 살핌이 정밀하지 못하므로, 전처럼 잘못을 답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폐단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한 도의 회부(會付)하는 원곡(元穀)을 모두 백성들의 숫자가 많고 적음에 따라 고을마다 분배하되, 분(分)과 유(留)의 법은 한결같이 2유 1분으로 기준을 정하고, 세칙(細則)을 엄하게 세워 감히 이를 어기지 못하게 한다면, 풍년에도 백성들이 많이 받게 되는 걱정이 없고, 흉년이 들어도 고을에 믿을 만한 저축이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곡식을 창고에 쌓아두면 벌겋게 썩을까 염려를 하는데, 그래도 터무니없는 빈 장부만 끼고 있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관서 일로(一路)에는 본래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가문이 없어 향리에서 떠받드는 것은 유생(儒生)과 향임(鄕任)들에 불과합니다. 이것으로 가문을 유지하고 이것으로 자녀들의 혼사를 치루므로, 이름있는 벼슬자리보다 더 한사코 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일심으로 그 첩경을 모색하고 온갖 방법으로 청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유한 사람은 천금도 아끼지 않고 가난한 사람까지도 앞다투어 잘못을 본뜨게 되니, 고을의 수령이 된 자들은 번번이 두둑한 뇌물에 움직일 때가 많고 긴절한 청탁에 끌리어 제멋대로 팔아먹는 것입니다. 고을의 정사가 혼란스러워지고 백성의 풍습이 분경(紛競)을 일삼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만약 이를 방지하는 법을 만들어, 수령으로서 이 법을 범하면 탐오죄를 적용하여 뇌물의 액수를 따져 처벌을 하고, 향인(鄕人)으로서 금령을 어겼을 경우에는 천역(賤役)으로 강정(降定)함으로써, 준 자나 받은 자나 모두 죄를 주어 단연코 용서하지 않는다면, 혹시 폐단을 바로잡는 하나의 방도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금점(金店)을 설치한 것은, 나라를 위해서는 만분의 일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백성들에게는 무궁한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 밭이랑을 파헤치게 되고, 둘째 농민들이 모두 이 일에 달려들어 농사를 폐지하는 지경에 이르고, 셋째 무뢰배들을 많이 모아들어 작간(作奸)하기가 쉽고, 넷째 변경의 관문(關門)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법으로 금하는 물건이 마구 나돌게 됩니다. 또 쌀값이 금처럼 비싸지는데 사방 사람들이 다들 여기에 모여들어 술과 고기를 진탕 마시고 먹어대니, 하루 소비하는 것이 거의 몇사람 몫에 해당합니다. 만약 혹시라도 하루 아침에 금이 바닥나서 나오는 것이 없게 되면, 형세상 서로 이끌고 도적이 되어 반드시 길가는 나그네를 약탈하고 마을을 소란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금이 산출되는 여러 곳의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삼가 듣건대, 금을 캐는 사람은 온종일 흙탕물 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바람과 이슬을 쐬어서 몸에 상해를 가장 많이 받기 때문에, 전후로 돌림병에 걸려 죽게 된 이가 많다고 합니다. 이 어찌 더욱 불쌍하고 측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서북 지방의 풍속은 본래부터 무지하여 도학 선생의 유풍(流風)이나 여운(餘韻)이 없습니다. 즐기는 것이라곤 청탁질이고, 소중히 치는 것이라곤 재화(財貨)여서, 학문이나 행의(行義)에 대해서는 마치 울타리 가의 물건마냥 무용 지물로 여깁니다. 간혹, 유학을 공부하고 글을 아는 사람이 있어도 장구(章句)나 익히고 잡술(雜術)이나 익히는 데 불과하며 마음을 두는 것이라곤 그저 허랑(虛浪)한 것뿐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고을 서당에 참된 선비가 없고 가정에 훌륭한 교훈이 없는 까닭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경서를 잘 아는 학문이 있는 자는 비록 만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만약 향임(鄕任)을 달가워하지 하고 과거 공부에서 벗어나 조용히 살며 글을 읽고 처신을 약간 잘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처음에는 각 고을로부터 해마다 두서너 명씩 천거하게 하고 이어 도신(道臣)이 실적(實蹟)을 상세히 살펴 전관(殿官)에 비의(備擬)하고 또 탁월하고 특이한 칭찬이 있을 경우 조정에 올려보내어 사적(仕籍)에 올림으로써, 사람들이 이를 보고 고무되고 본받을 대상이 되게 한다면, 지난날에 청탁질과 돈벌이에 정신이 팔린 자들도 혹시 부끄러워 할 줄 알게 될 것이며, 법을 어겨가면서 사리(私利)를 도모하던 수령들 가운데도 혹시 두려워하면서 주저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에게 유시하기를,
"어사(御史)의 이 별단(別單)을 살펴보니, 서너 가지 진술한 것들이 자문으로서의 체모에 딱 들어맞고 모두 현실에 부합되는 말들이었다.
조적에 관한 폐단은 어느 도(道)인들 그렇지 않겠는가. 도백(道伯)이 자기에게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먼저 잇속을 노리고 나서니, 수령들이 이 잘못을 본뜨는 것은 형세상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본도의 경우는, 영읍(營邑)에서만 범법(犯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정이 그렇게 하도록 이끌어준 점도 있다고 본다. 대체로 서울의 아문(衙門)에서 내다 파는 명색(名色)은 곧 다른 도에는 없는 것들이다. 호수(戶數)를 헤아려 곡식을 계산하고 산간 고을의 곡식을 떼어다가 연해 고을에 보태줄 일에 대해서는, 얼마 전의 신칙하는 하교에서 비록 그처럼 강조하고 반복을 하였건만, 근본을 바로잡는 정사를 강구하지 않아 여전히 폐단이 되고 있다. 지금 만약 2유(留) 1분(分)의 방식을 시행하게 되면, 먼저 해마다 으레 내다 파는 곡식의 총수량을 줄인 다음에라야, 백성들의 식량을 유족하게 하고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는 방도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경은 전곡(錢穀)에 관한 일에 익숙한 만큼, 산간 고을의 곡식을 떼어내어 연해 고을에 보태주는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와 또 서울의 아문에서 내다 파는 명색들을 어느 곳에서 감량(減量)을 해야 할 것인지 등, 시행하기에 마땅한 것들을 별도로 생각을 해보고, 아문과 곡식 이름을 구별하여, 하나로 지적(指的)하여 사리를 따져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라.
금점(金店)에 관한 한 가지 일은, 경 스스로 유사의 직임에 있으니 조정의 본의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탁지(度支)의 신하가 안찰(按察)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끝내 지시를 제대로 받들지 못하였다. 비록 감히 금점을 낭자하게 설치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새로 생겨나는 작간(作奸)의 소지는 이른바 물품의 간색(看色)과 적간(摘奸)하는 일에 달려 있다. 끝내 조정의 명령이 시행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전적으로 계사(計士)나 감영 비장(裨將)들이 관장(官長)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번에 거듭 명한 뒤부터는 간색과 적간 등의 일까지도 엄하게 단속을 가하여, 법을 범한 자는 알려준 자와 아울러 ‘전토를 잘못 보고한 법률[田土誤告之律]’을 적용하고, 수교(受敎)에 따라 형장(刑杖)을 친 후 귀양보내도록 감률(勘律)하라. 금을 몰래 캐는 것을 엄히 금하는 일은 도백에게 달려 있으니, 경은 제도(諸道) 도백들과 함께 이점을 잘 알고 명심함으로써 실효가 있게 하라. 정원에서도 호조에 엄히 신칙을 하라.
향임(鄕任) 자리를 파는 문제는, 조정 분위기와 세상 도덕이 더럽혀지느냐 깨끗해지느냐에 관계된 일이다. 탐오 행위가 더욱 성행하고 족속들의 신분이 뒤섞이는 것은 단지 일읍(一邑)·일향(一鄕)의 일인 셈이다. 명색이 명리(命吏)로서 이런 패려한 짓을 하는데도, 감영에서는 흔히 있는 일로 보아넘기고 조정에서는 알고도 금하지 않으면서, 한갓 봉름(俸廩)이나 타먹고 이익이나 챙기는 수단을 쓰는 데 넋이 나가 있다. 이따금 규탄하는 글에 이름이 오른 적이 있지만, 그것은 근일 서흥(瑞興)·함안(咸安) 등의 일과 같다. 형정(刑政)이 도치(倒置)된 것치고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염치(廉恥)를 배양(培養)하는 일은, 물론 하루 이틀에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들은 일이고 또 금하기도 했는데 아직껏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럴진대 어찌 형법(刑法)으로 너무 심한 자를 제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뚜렷이 지적하여 복주(覆奏)하도록 하라. 경 또한 부디 시행하기 쉽고 금하기가 어렵지 않은 방책에 대하여 별도로 의견을 갖추어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라.
서쪽 지방의 풍속이 장사하는 데로 쏠리고 잡술(雜術)을 숭상하고 있는 일로 매우 걱정을 하였다. 이에 윤음(綸音)을 인쇄하여 반포하였고 전교(傳敎)를 새기어 내걸음으로써, 정녕 훈계하여 보고 감화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사(御史)가 돌아와서 얘기한 폐단이 모두 전날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흥기시켜 권면하는 방법에 있어 그 묘책(妙策)을 얻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자그마한 고을에도 제몸 처신을 잘하는 선비가 있는 법인데, 더구나 넓은 면적의 본도에 어찌 겉치레를 버리고 실지에 힘쓰며 곤궁하게 살면서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 선비가 없겠는가. 대체로, 풍속을 바로잡는 것은, 말단에 속하는 법도에 달린 것이 아니다. 경은 우선 인재를 찾아내어 조정에 올려 보내도록 하라. 그러면 어찌 등용하기를 아끼겠는가. 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려 나감에 있어 일대 급선무인 셈이다. 이점에 더 특별히 관심을 쏟아, 조정에서 서쪽 지방의 인재를 고무하고 육성하고자 하는 지성(至誠)과 고심(苦心)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10면
- 【분류】왕실(王室)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구휼(救恤) / 광업(鑛業)
○關西暗行御史李冕膺復命, 召見問生民苦樂, 守令治否。 冕膺進書啓, 論龜城府使金衡柱、鐵山府使朴光迪、前府使洪百游、慈山前府使蔡緯夏、熙川前郡守鄭勗世、肅川前府使林永老、泰川前縣監睦萬中、黃海道前觀察使李洪載、平山府使徐有和等不法狀, 又盛論平安道觀察使鄭昌聖、德川郡守申曮、寧遠前府使許 之罪曰: "鄭昌聖專昧事務, 重以衰老, 幕僚衙客, 恣意濁亂。 列邑抄飢, 十分減削, 濱死之人, 太半見漏。 定州富人, 邀致幕中, 營作錢之散在淸北者, 使之主管區處, 差任之際, 曾無罪過, 忽地改易, 呼訴紛然, 積失民心。 申曮長時昏睡, 政出多門, 菽麥不辨, 芻牧難責。 奸鄕作俑, 締結衙客, 恣意賣任, 納錢于官, 千金之櫃, 列置左右, 朝夕愛玩。 還糴則捧以五兩, 只給以三兩; 大同米則八兩代捧, 以小米移充。 飢民則加數虛錄, 消融賑資, 還戶則竄入別人, 稱以分給, 淆亂紛雜。 倉屬則民間分還之錢, 給債取息, 每巡應分之時, 東西推移。 流民則或多已納之還, 而皆以未納懸錄。 設粥則代給生豆一掬, 怨聲載路。 倉庫枵然, 民情遑急, 許多罪狀, 宜施重勘。 許
爲人麤悖, 縱酒使氣, 鎭日昏醉, 訟牒多滯, 無辜之杖, 首尾相望, 醒後不省, 一府駭惋。 晝宵營爲, 惟利是殖, 憑藉城樓, 塗灰駄灰之斂, 遍及疲氓, 廣開賂門, 鄕任之帖, 都歸富戶。 前年歉荒, 視以難得之會, 收稅多徵於白地, 捧糴嚴督於赤立, 鞭扑如沸。 膏血旣浚, 則五六緡之錢納, 只分三兩, 八種穀之代捧, 互相折米。 最貴之種, 皆入發賣,下劣之品, 苟充納還。 勒捧願納之穀, 太半乾沒, 略設賑飢之政, 務從省減。 抄口之際, 虛實相蒙, 各面之任, 存拔惟意。 饋粥則和水半椀, 給糧則皮穀數升。 村閭視之若仇, 隣近目之以盜。 按使之行部, 恐己過之或聞, 多發校卒, 禁遏呈訴, 道路扼腕, 至今未已。 右項諸條, 合置重典。" 又言: "祥原郡守李彦煐、熙川郡守李得臣、雲山郡守徐有鳳、陽德縣監宋俊載治績有可觀。" 吏曹啓請: "鐵山府使朴光迪、平山府使徐有和、中和府使柳晦源竝罷黜。 龜城府使金衡柱、德川郡守申曮罷黜, 罪狀令該府拿問勘處。 慈山前府使蔡緯夏、泰川前縣監睦萬中竝令該府, 拿問處之。 鐵山前府使洪百游、熙川前郡守鄭勗世、肅川前府使林永老、寧邊前府使許
竝令該府拿問嚴勘。" 冕膺又進別單曰:
關西昨年年事, 數十年來所未有, 民間過自驚動, 轉致騷擾。 道臣則聞見不遍, 豐歉未辨, 惟知催科之是急, 面責關飭, 旁午於列邑者, 無非捧糴之不嚴, 封倉之或稽。 列邑守宰, 怵於威喝, 奉行不暇。 其中尤無良者, 又從以乘機營私, 甘自歸於幸災厲民之科。 常時之惠澤未沾, 卽事之怨讟方興, 欲訴于邑倅, 則邑倅不我顧矣; 欲訴于道伯, 則道伯不我聽矣。 於是乎今日一家空, 明日二家空, 浸浸至於東里如此, 西里又如此。 甚至稍裕之戶, 非有艱食之憂, 而亦不堪於隣族之督納, 又無賴於乞丐之侵掠, 大者斥賣田廬, 牛輸馬載; 小者弊屣鶉衣, 顚連道路, 殆遍於千百里之遠矣。 惟我聖明, 曲察民隱, 荐下溫綸, 領還本土, 蠲減身役, 沿路饋飯, 官人護行。 風聲所及, 瞻聆俱聳, 自此民情, 可保底安。 至若海西旣非一路之俱歉, 只是谷山爲尤甚, 而流民之多, 專由於方伯守宰處置失當。 前府使金魯成蒙騃沒覺, 認歉爲豐, 以凶荒爲忌諱, 捧糴爲能事, 民皆不堪其苦, 呼訴營邑, 俱不見採。 末乃相議爲裹足叩閽之計, 而魯成先聞此奇, 火急推捉於旣入京之後, 累月囚治。 道伯則聞朝家護送流民之報, 始乃裝送褊裨, 晨夜兼程, 忙忙設賑, 纔饋邑內之民, 而營邑已罷官矣。 今則營邑新莅, 一路改觀, 此後接濟, 庶可無憂, 而獷悍之俗、渝薄之習, 比關西殆有倍焉, 實是難治之甚者。 近日以來, 方伯守宰, 懲羹太過, 惟意姑息之惠, 不暇未然之禁, 民情益狃, 期望無節, 誠恐權輿之不承, 方來之貽憂也。 關西弊源, 不出於糶糴也, 金店也, 鄕任也。 臣於經過之際, 略有所檃括於心者, 敢此附陳焉。 糶糴之法, 蓋出於十年用三年蓄, 以備水旱饑饉之意也。 民旣勤力耕作, 太半入於官倉之儲, 所望不過爲幾年後凶荒之需矣。 旣逢凶荒, 又不得力, 則豈不大可悲哉? 還穀最多處, 則一戶所受, 幾過十餘包, 實爲小民難支之端, 而奸鄕猾吏, 長子孫於其中, 折入反作, 無所不有。 貪官墨守, 視作外府奇貨, 加分錢還, 巧作名色。 間或有律己守法之官, 而數目旣煩, 聰明不及, 察奸未精, 襲謬如舊, 其爲民弊一也。 臣意則摠擧一道會付之元穀, 隨民多寡, 逐邑分排, 分留之法, 一以二留, 一分爲準, 而嚴立科條, 毋敢踰越, 則在豐歲, 民無多受之患; 値荒年, 邑有可仰之積。 人或以堆積紅腐爲憂, 而豈不愈於徒擁虛簿, 無麪不托也哉? 關西一路, 本無簪纓世族, 鄕里之所推重, 不過儒鄕之任。 以此而維持門戶, 以此而得遂婚嫁, 抵死圖占, 甚於名官。 一意鑽刺, 百計干囑, 富者不惜千金, 貧者爭相效尤, 爲守宰者, 輒多動於厚賂, 牽於緊囑, 恣意賣鬻, 官政之淆亂, 民風之紛競, 不出於此。 今若設爲防禁, 守令之犯科者, 施以贓汚, 計貫抵罪; 鄕人之冒禁者, 降定賤役, 與受皆罪, 斷不饒貸, 則或可爲矯弊之一端矣。 金店之設, 於國計不足爲萬一之補, 於生民有無窮之弊, 斲傷田畝一也。 農民皆歸於此, 至廢耕作二也。 多聚無賴, 易於作奸三也。 邊門不遠之地, 禁物肆行四也。 米價如金, 而四方之人, 皆聚於此, 酒肉淋漓, 一日所費, 幾兼數人。 若或一朝金盡, 而無所得, 則勢將相率爲盜, 必至劫行旅, 擾村閭而後已。 産金諸處, 一倂驅逐, 恐爲得宜。 且伏聞, 採金之人終日出沒於泥水, 觸冒風露, 受傷最甚, 故前後遘癘, 多致死亡, 尤豈非矜惻者乎? 蓋其西土習俗, 本自貿貿, 元無道學先生流風餘韻, 所嗜者干囑, 所重者貨財, 學問行義, 視若笆籬邊物。 間或有業儒而知書者, 亦不過章句之習, 雜術之事, 宅心直是浮浪而已, 此專由於鄕塾無眞儒, 家庭乏良訓而然也。 經術學問, 雖難其人, 若得不屑鄕任, 脫跡科臼, 靜居讀書, 稍有行檢之人, 始自各官歲薦數人, 繼而道臣詳察實蹟, 備擬殿官, 又有卓絶特異之譽, 上于朝廷, 列之仕籍, 以爲聳動觀感之資, 則向之奔走於干囑貨利者, 或可以知愧, 而守宰之冒法營私者, 或不無顧畏而趑趄者矣。
諭平安道觀察使沈頣之曰: "觀此御史別單, 數條敷陳, 深得諮諏之體, 皆適時用。 糶糴之弊, 何道不然? 道伯爲其益己, 先自賭利, 守宰之效尤, 特勢也, 予則曰不然。 在本道不獨營邑之犯科, 朝廷有以導之云爾。 大抵京衙門發賣名色, 卽他道所無, 較戶量穀, 裒峽益沿, 日前飭敎, 雖如彼申複, 而不究端本之政, 依舊爲弊而已。 今若行二留一分之式, 則先減年例發賣穀摠, 然後可以議到於裕食便民之方, 卿慣錢穀間事, 裒峽益沿, 如何爲好? 京衙門發賣, 某處當減等, 合行事宜, 另加商度區別, 衙門穀名, 指一論理狀聞。 金店一款, 卿自在有司之任, 稔知朝家本意。 度支之臣, 按察之地, 終不能對揚。 雖不敢狼藉設店, 新出之奸竇, 在於所謂看色與摘奸。 竟使朝令不得行, 專由計士、營裨慫慂官長之致。 自今申令之後, 幷與看色、摘奸等事, 痛加嚴戢, 犯者幷與陳告人, 用田土誤告之律, 依受敎勘以刑配。 潛採之嚴禁, 在於道伯, 卿與諸道道伯, 知悉惕念, 俾有實效, 自政院亦爲嚴飭戶曹。 賣鄕事, 有關朝象, 世道之汚隆, 貪墨之益熾, 族類之相混, 特一邑一鄕之事。 名以命吏, 爲此悖戾之習, 監營看作例事, 朝廷知而不禁, 徒規規於俸廩贏剩之容手。 間有名登彈章, 如近日瑞興、咸安等事, 刑政之倒置, 孰大於此? 廉恥之培養, 固非一朝一夕之可責, 旣聞之又禁之, 迄未見食效之美, 則於是乎烏可不以刑法, 制其已甚乎? 此則令廟堂指一覆奏。 卿亦須以易行而不難禁之策, 別具意見狀聞。 以西俗之趨末利尙雜術, 丕加憂悶。 綸音以印布, 傳敎以鐫楣, 丁寧誡告, 期有觀感, 而繡衣說弊, 一如前日, 此蓋興勸之不得其竗而然耶? 十室尙有自好之士, 況以本道幅員之大, 豈無斂華就實, 窮居不求聞之士乎? 大抵風俗之矯改, 不在於法度之末。 卿先加採訪, 登進于朝, 則何靳收用? 此政斡運彌綸之一大先務, 另更着意, 以副朝家爲西土, 聳奬作成之至誠苦心。"
-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10면
- 【분류】왕실(王室)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구휼(救恤) / 광업(鑛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