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29권, 정조 14년 1월 29일 경술 4/4 기사 /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관서의 도신에게 관서·해서 고을의 민사에 대해 하유하다
국역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에게 하유하기를,
"서도(西道) 고을의 민사(民事)가 매우 마음에 걸린다. 이것은 다 고을 수령들을 제대로 얻지 못해서, 백성들이 고달픔을 겪고 고장에서 안주를 못한 채 그처럼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다. 만약 이전의 도백(道伯)이, 조정의 명령을 제대로 받들어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수령들에 대해서는 문관이건 무관이건 막론하고 즉시 개차하여 징계하고 두려워할 줄 알게 하였더라면, 어찌 오늘날의 말썽거리가 있겠는가.
또 듣건대, 요즈음 유민(流民)들이 대부분 토지도 있고 집도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고을 수령들이 제 구실을 못한다는 것을 더욱 증험할 수 있다. 신임 도백은 도임하는 날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을 크게 떠서, 고을 수령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데에 따르는 폐단은 걱정하지 말고 꼭 따끔하게 일깨우는 보람이 있도록 하라.
오늘 빈청(賓廳) 연석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다들 사신을 파견하여 유민들을 안집(安集)시키자고 말을 하는데, 이것은 신임 도백이 곧 관할 고을을 순찰하게 될 것이므로 임금의 명령을 선포하는 책임을 우선 도백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뒤따라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고을 수령들의 근만(勤慢)을 조사할 것이다. 그렇다면 안집시키고 보살펴 돌보는 일이 도신과 수령의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안집시키고 보살펴 돌보는 데에도 또한 여러가지 방안이 있을 것이다. 우선 토착민(土着民) 중에 살림살이가 알찬 가호(家戶)에 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다독거려 놓이게 함으로써 편안하게 생업에 재미를 붙이게 하라. 그렇게 하자면 역시 그들의 감정을 사납게 하지도 말고, 앞뒤 안가리고 무작정 다독거리지도 말고, 무관심하지도 말고, 성급하게 조장(助長)하지도 말고, 뒤흔들어 귀찮게 하지도 말고, 농사철을 빼앗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 한 집을 무마하고 내일 한 마을을 무마하는 식으로, 정성이 미치는 곳에 마음속으로 감동을 느끼게 한다면, 비록 날마다 매질하면서 떠나가라고 다그친들 어찌 흩어져서 사방으로 떠나갈 생각을 하겠는가.
굶주리어 죽게 된 백성들로 말하자면, 입을 벌리고 먹여달라고 하면서 바라는 것은 주린 배를 달랠 쌀 한 됫박과 물 한 보시기에 불과하다. 진정 정해진 규정대로 먹여주고 후하게 구휼함으로써, 떠나가면 죽고 떠나지 않으면 산다는 점을 알게 한다면, 어찌 반걸음이나마 발길을 돌려 떠나고자 하겠는가. 그들을 살려내는 길은, 역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에서 성과를 거두기가 쉬울 것이다. 명색이 고을의 수령이라고 하면서 고을 안 백성들의 목숨을 구원하지 못하여 유리걸식한다는 말이 연석(筵席)에까지 들리게 한다면, 서도의 고을에는 수령이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해서(海西)의 서너 고을 민사(民事)도 관서 지방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도백(道伯)이 어떤 조처를 취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관청의 구제이건 사적(私的)인 구제이건 간에 아직까지 보고된 것이 없으니, 이 또한 매우 의아스럽다. 대체로 풍년이 든 해에 곡물을 저축하는 것은 흉년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관서와 해서의 도백이 곡식을 이렇게까지 아끼는 것은 역시 상정(常情)이 아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또 북관(北關)의 도신(道臣)에게 하유하기를,
"북관 지방의 민사(民事)는 경에게 모조리 위임하였으니, 생각건대 무마하는 데 방도가 있고 곡식을 제때에 꾸어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곤궁하여 허덕이며 떠돌아 다니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요즈음 연석(筵席)에서 듣자니, 어린 것을 안고 늙은이를 끌고서 북쪽으로부터 오는 자들이 하루에 몇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가을과 겨울철에 조세 독촉에 시달리고 옷도 없고 집도 없는 사람들이 딴 곳으로 떠돌아다니게 한 것만 해도, 도백과 수령들이 백성들을 보살펴 돌보는 책임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였다고 말할 만하다.
이제는 환곡에 대한 정사가 이미 끝났고 구제하는 일이 시작되었으니, 살림이 튼실한 가호는 환곡에 붙일 수 있고 가난한 백성들은 먹여달라고 하기에 바쁠텐데 이때에 유랑민이 세전(歲前)보다 더 많은 것은, 어찌 사리로 보나 형편으로 보나 의외가 아니겠는가. 만약 그 이유를 찾아본다면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방금 묘당으로 하여금 여러 도에 관문(關文)으로 신칙하여 희망하는 대로 돌려 보내도록 하였는데, 경이 만약 성의를 다하였다면 어찌 오늘같은 말썽이 생기겠는가. 경이 한 일은 단지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그 자세한 내막을 사실에 입각하여 장계로 보고하라.
그리고 또 열읍(列邑)에 엄히 신칙하여 특별한 규정을 통하여 안집(安集)시키되, 만일 죄를 모면하려고만 하여 백성들을 잔뜩 얽매어 놓고 손발조차 제대로 놀리지 못하게 한다면, 그 해독은 도리어 그보다 더 심할 것이다. 아울러 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88면
원문
○諭關西道臣曰: "西邑民事, 極關心, 此皆邑倅不得其人, 而民受困苦, 不奠厥居, 蕩析乃爾。 若使前伯能體朝令, 不堪任不畏法者, 勿拘文武, 果卽遞改, 俾知懲畏, 則豈有今日之酬應乎? 且聞, 近日流民多是有土有室之類云, 卽此尤驗守令之無狀。 新伯自到任日, 銳意着眼, 莫恤迎送之弊, 期有警動之效。 今日賓筵僉議, 多以遣使安集爲說, 此則新伯行部在卽, 旬宣之責, 姑欲專委道伯, 追當分遣暗行御史, 以考勤慢。 然則安集懷保, 非道臣守令之急務乎? 安集與懷保, 亦有許多般道理, 先就土着實戶, 寧其心界按堵而樂業。 其要亦在不激不隨, 勿忘勿助, 無撓無奪。,今日撫一戶, 明日撫一村, 精誠所及, 中心感結, 則雖日撻而求其去, 寧有散而之四之計乎? 至若顑頷濱死之民, 張吻伺哺, 所望不過升勺之救飢。 苟能飼之如式, 賙之從厚, 知去則死, 不去則生, 奚暇旋踵於跬步之外, 而濟活之道, 亦必易爲力於還民。 名以邑宰, 不能救得邑中民命, 流離之說, 至登於筵席, 西邑謂之無守宰可也。 海西之數邑民事, 無異關西, 則道伯未知有甚別般措劃, 而公賑私賑之間, 迄無登聞, 亦甚可訝。 大抵樂歲儲穀, 所以爲救荒, 而兩西伯之慳穀如許, 亦非常情, 第令廟堂嚴飭。" 又諭北關道臣曰: "北關民事, 悉委於卿, 意謂撫摩有方, 賑貸以時, 使民不至顚連而流離。 聞於近日筵席, 保抱携持, 自北來者日計十百云。 秋冬之際, 困於催科, 無衣靡室之類, 轉而之他, 尙謂之道伯守宰不能盡懷保之責。 顧今糴政已畢, 賑事且始, 實戶可以付還, 窮民急於就哺, 而此時流民之甚於歲前, 豈非理勢事情之外乎? 苟求其故, 必有所以。 才令廟堂關飭諸道, 從願還送, 而卿若悉心殫竭, 豈有今日之酬應乎? 卿之事不可但以辜負言, 其委折據實狀聞, 仍又嚴飭列邑, 拔例安集。 萬有一免罪爲事, 拘之縶之, 使不得容措, 則其害反有甚焉, 竝令知悉。"
-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88면
정조 14년 (1790) 1월 29일
국역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에게 하유하기를,
"서도(西道) 고을의 민사(民事)가 매우 마음에 걸린다. 이것은 다 고을 수령들을 제대로 얻지 못해서, 백성들이 고달픔을 겪고 고장에서 안주를 못한 채 그처럼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다. 만약 이전의 도백(道伯)이, 조정의 명령을 제대로 받들어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수령들에 대해서는 문관이건 무관이건 막론하고 즉시 개차하여 징계하고 두려워할 줄 알게 하였더라면, 어찌 오늘날의 말썽거리가 있겠는가.
또 듣건대, 요즈음 유민(流民)들이 대부분 토지도 있고 집도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고을 수령들이 제 구실을 못한다는 것을 더욱 증험할 수 있다. 신임 도백은 도임하는 날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을 크게 떠서, 고을 수령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데에 따르는 폐단은 걱정하지 말고 꼭 따끔하게 일깨우는 보람이 있도록 하라.
오늘 빈청(賓廳) 연석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다들 사신을 파견하여 유민들을 안집(安集)시키자고 말을 하는데, 이것은 신임 도백이 곧 관할 고을을 순찰하게 될 것이므로 임금의 명령을 선포하는 책임을 우선 도백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뒤따라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고을 수령들의 근만(勤慢)을 조사할 것이다. 그렇다면 안집시키고 보살펴 돌보는 일이 도신과 수령의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안집시키고 보살펴 돌보는 데에도 또한 여러가지 방안이 있을 것이다. 우선 토착민(土着民) 중에 살림살이가 알찬 가호(家戶)에 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다독거려 놓이게 함으로써 편안하게 생업에 재미를 붙이게 하라. 그렇게 하자면 역시 그들의 감정을 사납게 하지도 말고, 앞뒤 안가리고 무작정 다독거리지도 말고, 무관심하지도 말고, 성급하게 조장(助長)하지도 말고, 뒤흔들어 귀찮게 하지도 말고, 농사철을 빼앗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 한 집을 무마하고 내일 한 마을을 무마하는 식으로, 정성이 미치는 곳에 마음속으로 감동을 느끼게 한다면, 비록 날마다 매질하면서 떠나가라고 다그친들 어찌 흩어져서 사방으로 떠나갈 생각을 하겠는가.
굶주리어 죽게 된 백성들로 말하자면, 입을 벌리고 먹여달라고 하면서 바라는 것은 주린 배를 달랠 쌀 한 됫박과 물 한 보시기에 불과하다. 진정 정해진 규정대로 먹여주고 후하게 구휼함으로써, 떠나가면 죽고 떠나지 않으면 산다는 점을 알게 한다면, 어찌 반걸음이나마 발길을 돌려 떠나고자 하겠는가. 그들을 살려내는 길은, 역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에서 성과를 거두기가 쉬울 것이다. 명색이 고을의 수령이라고 하면서 고을 안 백성들의 목숨을 구원하지 못하여 유리걸식한다는 말이 연석(筵席)에까지 들리게 한다면, 서도의 고을에는 수령이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해서(海西)의 서너 고을 민사(民事)도 관서 지방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도백(道伯)이 어떤 조처를 취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관청의 구제이건 사적(私的)인 구제이건 간에 아직까지 보고된 것이 없으니, 이 또한 매우 의아스럽다. 대체로 풍년이 든 해에 곡물을 저축하는 것은 흉년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관서와 해서의 도백이 곡식을 이렇게까지 아끼는 것은 역시 상정(常情)이 아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또 북관(北關)의 도신(道臣)에게 하유하기를,
"북관 지방의 민사(民事)는 경에게 모조리 위임하였으니, 생각건대 무마하는 데 방도가 있고 곡식을 제때에 꾸어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곤궁하여 허덕이며 떠돌아 다니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요즈음 연석(筵席)에서 듣자니, 어린 것을 안고 늙은이를 끌고서 북쪽으로부터 오는 자들이 하루에 몇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가을과 겨울철에 조세 독촉에 시달리고 옷도 없고 집도 없는 사람들이 딴 곳으로 떠돌아다니게 한 것만 해도, 도백과 수령들이 백성들을 보살펴 돌보는 책임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였다고 말할 만하다.
이제는 환곡에 대한 정사가 이미 끝났고 구제하는 일이 시작되었으니, 살림이 튼실한 가호는 환곡에 붙일 수 있고 가난한 백성들은 먹여달라고 하기에 바쁠텐데 이때에 유랑민이 세전(歲前)보다 더 많은 것은, 어찌 사리로 보나 형편으로 보나 의외가 아니겠는가. 만약 그 이유를 찾아본다면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방금 묘당으로 하여금 여러 도에 관문(關文)으로 신칙하여 희망하는 대로 돌려 보내도록 하였는데, 경이 만약 성의를 다하였다면 어찌 오늘같은 말썽이 생기겠는가. 경이 한 일은 단지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그 자세한 내막을 사실에 입각하여 장계로 보고하라.
그리고 또 열읍(列邑)에 엄히 신칙하여 특별한 규정을 통하여 안집(安集)시키되, 만일 죄를 모면하려고만 하여 백성들을 잔뜩 얽매어 놓고 손발조차 제대로 놀리지 못하게 한다면, 그 해독은 도리어 그보다 더 심할 것이다. 아울러 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88면
원문
○諭關西道臣曰: "西邑民事, 極關心, 此皆邑倅不得其人, 而民受困苦, 不奠厥居, 蕩析乃爾。 若使前伯能體朝令, 不堪任不畏法者, 勿拘文武, 果卽遞改, 俾知懲畏, 則豈有今日之酬應乎? 且聞, 近日流民多是有土有室之類云, 卽此尤驗守令之無狀。 新伯自到任日, 銳意着眼, 莫恤迎送之弊, 期有警動之效。 今日賓筵僉議, 多以遣使安集爲說, 此則新伯行部在卽, 旬宣之責, 姑欲專委道伯, 追當分遣暗行御史, 以考勤慢。 然則安集懷保, 非道臣守令之急務乎? 安集與懷保, 亦有許多般道理, 先就土着實戶, 寧其心界按堵而樂業。 其要亦在不激不隨, 勿忘勿助, 無撓無奪。,今日撫一戶, 明日撫一村, 精誠所及, 中心感結, 則雖日撻而求其去, 寧有散而之四之計乎? 至若顑頷濱死之民, 張吻伺哺, 所望不過升勺之救飢。 苟能飼之如式, 賙之從厚, 知去則死, 不去則生, 奚暇旋踵於跬步之外, 而濟活之道, 亦必易爲力於還民。 名以邑宰, 不能救得邑中民命, 流離之說, 至登於筵席, 西邑謂之無守宰可也。 海西之數邑民事, 無異關西, 則道伯未知有甚別般措劃, 而公賑私賑之間, 迄無登聞, 亦甚可訝。 大抵樂歲儲穀, 所以爲救荒, 而兩西伯之慳穀如許, 亦非常情, 第令廟堂嚴飭。" 又諭北關道臣曰: "北關民事, 悉委於卿, 意謂撫摩有方, 賑貸以時, 使民不至顚連而流離。 聞於近日筵席, 保抱携持, 自北來者日計十百云。 秋冬之際, 困於催科, 無衣靡室之類, 轉而之他, 尙謂之道伯守宰不能盡懷保之責。 顧今糴政已畢, 賑事且始, 實戶可以付還, 窮民急於就哺, 而此時流民之甚於歲前, 豈非理勢事情之外乎? 苟求其故, 必有所以。 才令廟堂關飭諸道, 從願還送, 而卿若悉心殫竭, 豈有今日之酬應乎? 卿之事不可但以辜負言, 其委折據實狀聞, 仍又嚴飭列邑, 拔例安集。 萬有一免罪爲事, 拘之縶之, 使不得容措, 則其害反有甚焉, 竝令知悉。"
-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88면
원본
정조 14년 (1790) 1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