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사 서명응에게 남한 산성에 대해 물으시다
행궁(行宮)에 나아가 임금이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膺)에게 이르기를,
"이곳의 형승(形勝)은 천험(天險)이라 할 수 있다마는, 무비(武備)가 닦이지 않아서 한 번 전란(戰亂)을 당하면 수습하지 못하니, 어찌 지리(地利)가 부족한 것이겠는가? 이 성은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쌓은 것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인묘(仁廟)갑자년212) 에 쌓기 시작하여 병인년213) 에 일을 끝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둘레가 몇 보(步)쯤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성 안쪽은 6천 2백 97 보이고 바깥은 7천 2백 95 보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민응수(閔應洙)가 수어사이었을 때에 이 성을 중수(重修)하면서 돌벽돌을 철거하고 비로소 기와를 이었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민응수가 비로소 성역(城役)을 하였으나 곧 갈리고 조관빈(趙觀彬)이 갈음하여 비로소 일을 끝냈으며 천신(賤臣)이 명을 받고 수개(修改)할 때에 기와를 철거하고 벽돌을 덮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문(四門)의 편액(扁額)은 다 경이 쓴 것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봉(汗峰)에 성을 쌓은 것은 어느 때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숙묘(肅廟)계유년214) 에 수어사 오시복(吳始復)이 쌓기 시작하였는데 을유년215) 에 민진후(閔鎭厚)가 수어사이었을 때에 훼철(毁撤)하였다가 선조(先朝) 기미년216) 에 조현명(趙顯命)이 개축(改築)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병자년217) 에 노인(虜人)이 이 봉우리에 올라 대포(大砲)를 쏘았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때 포환이 행궁의 전주(殿柱)를 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봉우리에 오르면 성 안을 굽어볼 수 있다 하니, 이곳에 성을 쌓아 적인(敵人)이 먼저 점거하는 것을 막는 것은 참으로 그만둘 수 없다. 남장대(南將臺)는 산성의 주봉(主峰)이고 그 요해(要害)가 되는 것이 한봉보다 심하므로 고 판서(判書) 민진후가 성을 쌓을 것을 건백(建白)하였으나 중간에 폐기되었고, 선조 임신년218) 에 유수(留守) 이기진(李箕鎭)이 또 연중(筵中)에서 건백하여 이어서 두 돈대(墩臺)를 쌓았는데, 이제는 성은 없고 돈대가 있을 뿐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성은 이미 중간에 폐기되고 다만 돈대가 있을 뿐인데 한 돈대에 1백 인을 용납할 수 있으니, 이것을 전력(專力)하여 굳게 지키면 산성과 기각(犄角)의 형세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병자년에 묘당(廟堂)에서 의논하여 일부의 군사로 이 길을 막으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였다, 이어서 적인에게 점거되어 안팎이 단절되었다."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때 군사로 지켰다면 양남(兩南)에서 성원(聲援)하여 서로 통할 수 있었을 것인데, 마침내 적이 점유하였으므로 성 안과 성 밖의 소식이 오래 막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을 유식(有識)한 자들이 지금까지도 한탄하고 아깝게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온조왕(溫祚王)의 옛 성터가 아직도 있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높은 봉우리와 가파른 재 위에 아직도 돌로 쌓은 자취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다 하였다. 비록 이런 천참(天塹)의 성이 있더라도 인화가 없다면 어떻게 보존하여 지키겠는가? 군사와 식량 두 가지 일은 다 한쪽을 폐기할 수 없으나, 식량이 있고서야 군사를 모아서 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병자년 때의 일로 말하면 이서(李曙)가 1만여 석을 미리 저축하였으나 겨우 40일의 식량을 대었을 뿐이고 마침내 성지(城池)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또한 식량을 잇지 못한 까닭이다. 지금 전란에 대비하는 것은 군사를 조련(操練)하는 것뿐이 아니라 양곡을 저축하는 방도도 각별히 더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창고에 남겨 둔 군향(軍餉)은 얼마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군향은 조적(糶糴)219) 하는 쌀 2만 5천 석과 각곡(各穀), 3만 석을 합하여 5만 7천 석 영(零)인데 이제는 다 절미(折米)가 되어 4만 4천 석 영에 지나지 않으며, 그 가운데에서 1만 5천 석은 민간에 나누어 주고 지금 창고에 남겨 둔 것은 다만 2만 9천 석 영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본영(本營)에 해마다 들어온 돈은 얼마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저서소(儲胥所)의 본전(本錢)은 1만 6천여 냥인데 선조 신사년220) 사이에 장신(將臣)이 연중(筵中)에서 아룀에 따라 이식(利息)을 면제하고 내청(內廳)·외청(外廳)에 대하(貸下)하였으며, 경영(京營)의 별비전(別備錢)은 2천 7백여 냥이고 그 밖에 각 항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7천여 냥인데 한 해 경비(經費)의 나머지는 수천 냥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동문(東門) 밖의 전토(田土)는 예전에 사옹원(司饔院)의 시장(柴場)에 붙였는데 효묘(孝廟) 때 수어사 이시방(李時昉)이 계청하여 면세(免稅)하고 성 안 민호(民戶)에 붙여서 경작하게 하였다 하는데 지금도 그러한가?"
하매, 부윤(府尹) 송환억(宋煥億)이 말하기를,
"선조 무오년221) 에 부윤 심성희(沈聖希)가 다시 조세를 거두어 연말에 쌀 한 말을 성안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향을 저축하는 것은 몇 창고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합하여 여덟 창고이고 이 밖에 또한 숙창(稤倉)·승창(僧倉)·송파창(松坡倉) 세 곳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숙창·승창이라는 것에도 저축한 곡식이 있으며 그 수는 얼마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숙창을 설립한 뜻은 대개 호조(戶曹)·진휼청(賑恤廳)·상평청(常平廳)의 예(例)와 같습니다. 모든 제향(祭享)의 비용과 진휼의 비용과 인부·쇄마(刷馬)의 삯이 다 여기에서 나오는데 잡곡이 모두 4천여 석입니다. 승창은 고(故) 수어사 이세백(李世白)이 공명첩(空名帖)222) 으로, 곡물을 운영하고 해마다 조적하여 모곡(耗穀)223) 을 받았고, 그 뒤에는 창고를 지어 저축하여 또한 군향에 붙였는데 잡곡이 또한 2천여 석이 못되지는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열 집이 있는 고을[十室之邑]에도 또한 충신(忠信) 한 사람이 있는데, 이 고을로 말하면 경내(境內)의 호구를 통틀어 셈하면 1만 호의 고을[萬戶之邑]이라 할 수 있거니와 지령(地靈)·인걸(人傑)에는 본디 고금의 차이가 없으니, 또한 어찌 인재가 없겠는가? 병자란 때로 말하면 서흔남(徐欣男)은 사노(私奴)에 지나지 않는데 노병(虜兵)이 세 겹으로 에워 쌌을 때에 홀몸으로 빠져나가 능히 삼남(三南)의 여러 도(道)에 명을 전하였고, 맹원빈(孟元賓)은 한낱 한산(閑散)일 뿐인데 성조(聖祖)께서 행행(行幸)하셨을 때에 제 말을 바치기를 청하여 무사히 입성(入城)하실 수 있게 하였고, 여조(麗朝)의 김방경(金方慶)·조견(趙狷)이 다 이곳에서 났으니, 광주(廣州) 한 부(府)는 인재의 부고(府庫)라 할 수 있을 만하다. 요즈음에도 향당(鄕黨)에서 이행(異行)·기재(奇才)로 이름난 자가 있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신이 본주(本州)의 읍지(邑誌)를 보니, 병자란 이전에 노협(魯協)이라는 자가 이곳에서 한 이인(異人)을 만났는데 능히 병자란을 예견하였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세상에서 모른 가운데에 어찌 뛰어난 인재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유(金瑬)의 군관(軍官) 박진귀(朴震龜)가 일찍이 한 나무 거북을 김유에게 바치며 이것을 쓰면 일면(一面)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김유가 오활하고 괴이하다고 생각하여 물리쳤다. 대개 박진귀는 그것으로 스스로 비유한 것인데, 당시 사람이 모르고서 병자년에 수용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신도 그 말을 들었습니다. 대개 또한 이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남한(南漢)은 본디 이름이 일장산(日長山)이었으나 국조(國朝) 중엽 이후에 비로소 청량산(淸凉山)이라 칭하였는데, 사람들이 청나라 군사가 와서 침범할 조짐이라 하였다. 이런 말이 과연 있는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것은 고로(故老)가 서로 전하는 말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16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인사-관리(管理)
- [註 212]갑자년 : 1624 인조 2년.
- [註 213]
병인년 : 1626 인조 4년.- [註 214]
계유년 : 1693 숙종 19년.- [註 215]
을유년 : 1705 숙종 31년.- [註 216]
기미년 : 1739 영조 15년.- [註 217]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218]
임신년 : 1752 영조 28년.- [註 219]
조적(糶糴) : 환곡(還穀)을 방출하고 수납하는 것, 즉, 봄에 백성들에게 나라 곡식을 꾸어 주는 것은 조(糶)라 하고, 가을에 백성에게 봄에 꾸어 주었던 곡식에 10분의 1의 이자를 덧붙여 거두어 들이는 것을 적(糴)이라 함.- [註 220]
신사년 : 1761 영조 37년.- [註 221]
무오년 : 1738 영조 14년.- [註 222]
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않은 임명장(任命狀). 관아(官衙)에서 부유층(富裕層)에게 돈이나 곡식 따위를 받고 관직(官職)을 내리되, 관직 이름은 써서 주나 성명은 기입하지 않음. 이에 의하여 임명된 사람은 실무(實務)는 보지 않고 명색만을 행세하게 됨. 공명 고신첩(空明告身帖).- [註 223]
모곡(耗穀) : 각 고을 창고(倉庫)에 저장한 양곡(糧穀)을 봄에 백성에게 대여했다가 추수(秋收) 후 받아들일 때 말[斗]이 축나거나 창고에서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10분의 1을 첨가하여 받는 곡식.○御行宮, 上謂守禦使徐命膺曰: "此地形勝, 可謂天險, 而只緣武備之不修, 一遇烟塵之警, 收拾不得, 豈地利之不足歟? 此城, 乃完豐府院君 李曙所築乎?" 命膺曰: "仁廟甲子始築, 丙寅畢役矣。" 上曰: "周回畿許步?" 命膺曰: "城內則六千二百九十七步, 外則七千二百九十五步。" 上曰: "故相臣閔應洙爲守禦使時, 重修此城, 而撤去石甓, 始爲蓋瓦云, 然否?" 命膺曰: "閔應洙始城役, 尋見遞。 趙觀彬代之, 始訖工, 而賤臣之承命修改也, 撤瓦覆甓矣。" 上曰: "四門扁額, 皆卿所書乎?" 命膺曰: "然。" 上曰: "汗峰城築, 在何時?" 命膺曰: "肅廟癸丑, 守禦使吳始復, 始築;乙酉, 閔鎭厚爲守禦使時, 毁撤;先朝己未, 趙顯命改築矣。" 上曰: "丙子, 虜人登此峰, 放大砲乎?" 命膺曰: "其時砲丸, 至擊行宮殿柱矣。" 上曰: "若登此峰, 則俯瞰城中云。 此處築城, 以防敵人之先據, 誠不可已矣。 南將臺, 乃山城之主峰, 而其爲要害, 甚於汗峰。 故判書閔鎭厚建白築城矣, 中間廢棄。 至先朝壬申, 留守李箕鎭, 又爲筵白, 仍築兩墩臺。 今則無城, 而只有墩臺乎?" 命膺曰: "城則已爲中廢, 只有墩臺, 而一墩可容百人。 此若專力固守, 則於山城, 爲掎角之勢矣。" 上曰: "丙子, 廟堂議論, 欲以一枝兵, 遮絶此路而未果。 仍爲敵人所據, 以至內外斷絶矣。" 命膺曰: "其時, 若以兵守, 則兩南聲援, 可以相通, 而竟爲敵有, 故城中城外消息久阻。 至於無可奈何之境, 有識至今歎惜矣。" 上曰: "溫祚王故城基址尙在乎?" 命膺曰: "高峰峻嶺之上, 尙有石築餘痕矣。" 上曰: "古人云, 地利不如人和。 雖有此天塹之城, 苟無人和, 則何以保守乎? 兵、食兩事, 皆不可偏廢。 而有食然後兵可聚, 而城可守矣。 以丙子時事言之, 李曙預儲一萬餘石, 僅支四十日之糧, 而畢竟城池之不守, 亦由糧餉之不繼。 目今陰雨之備, 非但操練軍兵而已, 蓄糧儲穀之道, 亦不可不另加留意。 見今軍餉之留庫幾何?" 命膺曰: "軍餉糶糴米, 爲二萬五千石, 各穀爲三萬石, 合爲五萬七千石零, 而今皆折米, 不過爲四萬四千石零。 其中一萬五千石, 分給民間。 目今留庫者, 只有二萬九千石零矣。" 上曰: "本營歲入之錢幾何?" 命膺曰: "儲胥所本錢, 爲一萬六千餘兩, 而先朝辛巳年間, 因將臣筵達, 除息貸下於內、外廳, 京營別備錢, 爲二千七百餘兩。 而其外各項所捧, 爲七千餘兩。 一年經費之餘者, 不過爲數千兩矣。" 上曰: "曾聞, 東門外田土, 舊屬司饔院柴場, 孝廟朝守禦使李時昉啓請免稅, 屬之城內民戶, 使之耕種云, 今尙然乎?" 府尹宋煥億曰: "先朝戊午, 府尹沈聖希更爲收稅, 至歲末, 以米一斗, 分給於城內民人矣。" 上曰: "軍餉所儲幾倉?" 命膺曰: "合爲八倉。 而此外亦有稤倉、僧倉、松坡倉三處矣。" 上曰: "所謂稤倉ㆍ僧倉, 亦有所儲之穀, 而其數幾何?" 命膺曰: "掠倉設立之意, 蓋如戶曹、賑恤廳、常平廳之例。 凡諸祭享之需、賑恤之資、夫刷之價, 皆出於此, 而雜穀, 合爲四千餘石。 僧倉則故守禦使李世白, 以空名帖, 經紀穀物, 年年糶糴取耗。 其後築倉儲之, 亦屬軍餉, 而雜穀, 亦不下二千餘石矣。" 上曰: "十室之邑, 亦有忠信。 至於此州, 通計境內戶口, 則可謂萬戶之邑。 地靈、人傑, 本無古今之殊, 亦豈無人才乎? 以丙子時言之, 徐欣男不過私奴, 而當虜兵圍三匝之日, 單身抽出, 能得傳命於三南諸道;孟元賓, 特一閑散, 而聖祖行幸之時, 請獻其馬, 得以無事入城;麗朝之金方慶、趙狷, 皆出於此地, 廣州一府, 足可謂人才之府庫。 近亦有異行奇才之名於鄕黨者乎?" 命膺曰: "臣見本州邑誌, 丙子前有魯恊者, 逢一異人於此地, 能逆覩丙子之亂云。 以此觀之, 世所不知之中, 豈無卓異之才乎?" 上曰: "其時, 昇平府院君 金瑬、軍官朴震龜, 嘗進一木龜於瑬曰: ‘用此則可當一面’云, 而瑬以爲迃怪, 却之。 蓋震龜以此自況, 而時人不知, 未得收用於丙子, 豈不可惜乎?" 命膺曰: "臣亦聞此言。 蓋亦異人也。" 上曰: "南漢本名日長山, 而國朝中葉以後, 始稱淸凉山, 人以爲, 淸兵來侵之徵云。 此言果有之乎?" 命膺曰: "此是故老相傳之言也。"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16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인사-관리(管理)
- [註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