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묘에 배향할 공신을 빈청에서 회권하여 김창집 등을 삼다
빈청(賓廳)에서 회권(會圈)하여 영묘(英廟)에게 배향(配享)할 공신(功臣)을, 영의정 최규서(崔奎瑞)·좌의정 민진원(閔鎭遠)·좌의정 조문명(趙文命)·영의정 김재로(金在魯)를 9점(點)씩으로 하여 입계(入啓)하니, 하교하기를,
"이는 곧 더없이 중요하고 더없이 큰 일인데, 과연 취사(取捨)의 혐의가 없겠는가? 경들은 깊이 더 생각하여 양만리(楊萬里)101) 로 하여금 송(宋)나라에서 아름다운 명성을 혼자 독점하게 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소견하고 말하기를,
"회권이 이미 공의(公議)에서 나왔으니, 위에서 그 사이에 가타부타 할 필요는 없겠으나, 아까 ‘양만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명성을 독점하게 함이 없도록 하라.’는 하교는 내가 마침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한 말이다. 고 상신(相臣) 김창집(金昌集)이 결책(決策)했던 대의(大義)와 순신(殉身)한 위충(危忠)은 진실로 선대왕이 묘정(廟庭)에 배식(配食)하기에 합당한 것이었으나, 의난(疑難)하게 되는 소이(所以)는 특히 미처 선조(先朝) 때에 섬기지를 못했기 때문인데, 이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는 것이다. 고 중신(重臣) 민진후(閔鎭厚)는 비록 미처 섬기지를 못했었어도 또한 배향의 반열에 들어갔었으니, 이는 역시 가까운 선례(先例)로서 참조(參照)해야 할 일이다."
하매, 김상철(金尙喆) 등이 말하기를,
"지금 내리시는 분부를 받들건대, 과연 참조해야 할 가까운 사례가 있으니, 신들이 어두워 착각(錯覺)한 잘못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들이 청대(請對)하여 이미 아뢴 말이 있었으나, 조금 상례의 격식과 다르게 되었으니, 마땅히 그 가부를 순문(詢問)해 보아야 하겠다. 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을 영묘(英廟)의 묘정에 배향하는 것이 합당한지 않은지를, 와서 모인 대신 및 육경(六卿)·삼사(三司)·관각 당상(館閣堂上)·정부 서벽(政府西壁)102) 의 여러 신하들에게 수의(收議)하여 주문(奏聞)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상철 등이 헌의하기를,
"신들이 이미 연석(筵席)에서 진달한 바가 있었거니와, 고 상신이 선왕(先王)을 위하여 한 번 죽었음은 진실로 선대왕의 묘정에 배식하는 것이 합당하기는 하나, 상례의 격식과 다르게 되기 때문에 당초에는 미처 초계(抄啓)하지 못했던 것인데, 이미 고 중신 민진후를 참조해야 할 선례가 있었으니 지금 하문(下問)하시는 마당에 어찌 딴 의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병조 판서 이휘지(李徽之)는 헌의하기를,
"고 영의정 김창집은 이미 정책(定策)한 공로가 있었으니 선대왕의 묘정에 배향함은 진실로 정리(情理)와 예문(禮文)에 합당한 일입니다. 비록 더러는 미처 섬기지를 못했다는 의논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이 일은 상례만 가지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참조할 가까운 사례가 없지 않으니, 성상의 분부가 내린 마당에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형조 판서 채제공(蔡濟恭)은 헌의하기를,
"신축년103) 에 정책한 신하를 묘정에 배식함은 정리나 예문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고, 또 고 판서 민진후에게 이미 시행한 사례가 있으니, 내리신 전교(傳敎)가 지극히 합당하여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공조 판서 홍낙성(洪樂性)은 헌의하기를,
"고 영의정 김창집의 정책한 공로는 마땅히 선대왕의 묘정에 배식하는 예절이 있어야 했으나 미처 섬기지를 못한 것 때문에 주저하는 의논이 없지 않았었는데, 지금 삼가 성상께서 분부하신 말씀을 받들건대, 진실로 정리와 예문에 합당한 일이니,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우참찬 황경원(黃景源)은 헌의하기를,
"충헌공(忠獻公)은 정책한 공로가 있는데, 어찌 선왕의 묘정에 배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섬기는 여부는 논해야 할 바가 아닙니다. 신의 생각에는 묘정에 배향하는 것이 예법에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하고, 예조 판서 이경호(李景祜)는 헌의하기를,
"고 영의정 김창집은 이미 정책한 공로가 있었으니, 묘정에 배식하는 것이 진실로 정리와 예문에 합당합니다. 비록 사례에 구애되어 당초에 초계(抄啓)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고 판서 민진후를 배향한 선례가 있어 지금 내리신 전교가 지극히 합당하니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은 헌의하기를,
"당초에 고 상신 김창집은 정책하고 입근(立殣)하였기에 진실로 배향해야 마땅함을 들어 대신들과 서로 의논했던 것인데, 초계할 적에 정당(停當)하게 된 것입니다. 미처 섬기지 못한 사람을 배향함은 아래에서 앞질러 먼저 거행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들어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함부로 결단하지 못하여 마음에 매우 애석하게 여겼었는데, 지금 삼가 분부를 받들고 보니 진실로 합당한 일입니다. 또 고 판서 민진후를 이미 그렇게 한 선례가 있는데 어찌 딴 의논이 있겠습니까?"
하고,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은 헌의하기를,
"고 상신이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성은 진실로 선대왕 묘정(廟庭)의 배향하는 반열에 합당한 일이어서, 미처 섬기지 못한 것 때문에 구애할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분부를 내리어 순문(詢問)하는 마당에 신은 다시 의논할 말이 없습니다."
하고, 이조 판서 김종수(金鍾秀)는 헌의하기를,
"고 상신 김창집을 선대왕의 묘정에 배식함은 공로에 있어서나 충절(忠節)에 있어서나 진실로 정리(情理)와 예법에 맞는 일로서 문득 온나라 사람들의 공통된 의논이 되었습니다마는, 오직 미처 섬기지 못한 신하를 묘정에 배향함은 전례를 고찰해 볼 적에 이미 의거할 수 있는 데가 없는 일이어서, 마침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바가 아니니, 오직 성상께서 깊이 생각하고 널리 고찰하시어 처결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대사헌 윤동섬(尹東暹)은 헌의하기를,
"고 영의정 김창집이 정책하고 목숨을 바친 공로는 진실로 선대왕의 묘정에 배식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만일에 섬기지 못한 것을 들어 회의(懷疑)한다면 고 판서 민진후의 고사(故事)가 인용할 수 있는 사례가 되니, 내리신 전교대로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사간 서유방(徐有防)은 헌의하기를,
"고 상신 김창집이 결책(決策)한 대의(大義)와 목숨을 바친 위충(危忠)은 비록 선조(先朝)께서 등극(登極)하신 뒤에 미처 섬기게 되지는 못하였으나, 가까운 사례를 고찰해 볼 적에 또한 참조할 수가 있는 것이니, 지금 이처럼 하문(下問)하시는 마당에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응교(應敎) 임시철(林蓍喆)은 헌의하기를,
"고 상신은 이미 결책한 공로가 있으니, 섬기게 되었거나 못 되었거나에 대해서는 다시 의논할 것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고 상신 김창집의 일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고 또 의거할 만한 사례가 있는 것이니, 순문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대신이 비록 ‘특별한 분부로 배향한 예가 있었다.’고 했다마는, 육경(六卿)과 삼사(三司)가 이미 와서 모여 있으니, 당초의 별단(別單)에다 회권(會圈)하여 입계(入啓)하라."
하였다. 이어 이조 판서 김종수에게 분부하기를,
"송(宋)나라 신하 장 위공(張魏公)104) 을 효종(孝宗) 때 건책(建策)한 일에 공로가 있다고 하여 묘정(廟庭)에 배향하자는 논이 있었는데, 그때에 여러 의논이 다른 임금 때에 있은 일임을 들어 가타부타하는 말이 있었다. 유독 양만리(楊萬里)가 ‘이 사람은 이미 건책한 공로가 있었으니, 비록 다른 임금 때에 있은 것이라 하더라도 묘정에 배향하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다.’고 운운했었다. 이 일은 비록 고 상신의 일과 아주 다른 점이 있는 것이기는 하나 족히 예로 들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 국조(國朝)의 가까운 사례도 의거할 데가 있는 것이겠는가?"
하니, 김종수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분부하신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또 고 상신은 세워 놓은 바가 우뚝하여 〈동강(桐江)의〉 한 오라기 실이 한(漢)나라 운명을 붙들었던 공[一絲扶鼎志功]105) 과는 동등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빈청에서 회권하여, 10점(點)에는 영의정 김창집으로 하고 9점에는 영의정 최규서·좌의정 민진원·좌의정 조문명·영의정 김재로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3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 [註 101]양만리(楊萬里) : 남송(南宋)의 문신(文臣). 고종(高宗) 때 진사과에 급제하여 영릉승(零陵丞)이 되었고 효종(孝宗) 때 국자감 박사(國子監博士)를 거쳐 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보모각 학사(寶謨閣學士)에 이르렀음. 그는 일찍이 장준(張浚)이 정심 성의(正心誠意)의 학문에 힘쓰게 한 영향을 받아 일생 동안 복응하였으므로 광종(光宗)이 성재(誠齋)라는 편액(扁額)을 손수 써서 내렸음. 영종(寧宗) 때 권신(權臣) 한탁주(韓侂胄)의 전횡(專橫)을 보고 우분(憂憤)하다가 병들어 그의 죄상(罪狀)을 써 놓고 죽었음.
- [註 102]
정부 서벽(政府西壁) : 서벽은 회좌(會座)할 때 좌석의 서쪽에 앉는 벼슬로, 의정부에서는 좌·우 참찬(左右參贊)이 여기에 해당됨.- [註 103]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104]
장 위공(張魏公) : 위국공(魏國公) 장준(張浚).- [註 105]
한 오라기 실이 한(漢)나라 운명을 붙들었던 공[一絲扶鼎志功] : 후한(後漢)의 엄광(嚴光)은 광무제(光武帝)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일찍이 함께 유학(遊學)했던 친구로, 광무제가 즉위 후 초빙하여 간의 대부(諫議大夫)를 제수했으나 벼슬을 싫다 하고 동려현(桐廬縣) 남쪽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는데, 한나라 때 청절(淸節)을 지킨 선비가 많았음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함. 곧 그의 청절이 혼탁한 당시를 바로잡았다는 말임.○賓廳會圈。 英廟配享功臣, 以領議政崔奎瑞、左議政閔鎭遠、左議政趙文命、領議政金在魯九點啓。 敎曰: "此是莫重莫大之事, 果無取捨之嫌乎? 卿等深加思之, 無使楊萬里專美於有宋也。" 時、原任大臣請對。 上召見曰: "會圈旣出於公議, 則不必自上有所可否於其間。 而俄者, 無使楊萬里專美之敎, 予適有思而發矣。 故相臣金昌集決策之大義、殉身之危忠, 實合於先大王廟庭之配食。 而所以疑難者, 特以未及逮事於先朝故也。 此則有不然者。 故重臣閔鎭厚雖未及逮事, 而亦入配享。 則此又近例之可以旁照者也。" 尙喆等曰: "今承下敎, 果有近例之旁照。 臣等難免昏錯之失矣。" 上曰: "大臣請對, 旣有所奏, 而少異常格。 其宜詢問可否。 故領議政金昌集配享英廟廟庭當否, 收議於來會大臣及六卿、三司、館閣堂上、政府西壁諸臣以聞。" 領議政金尙喆等議曰: "臣等已於筵中, 有所陳達。 故相臣之爲先王一死, 實合配食於先大王廟庭, 而以其有異常格, 初未及抄啓矣。 旣有故重臣閔鎭厚旁照之例, 今於俯詢之下, 豈有他議?" 兵曹判書李徽之議曰: "故領議政金昌集, 旣有定策之功, 配享先大王廟庭, 允合情禮。 雖或有未及逮事之論, 此不可以常例言。 且不無旁照之近例, 則聖敎之下, 無容更議。" 刑曹判書蔡濟恭議曰: "辛丑定策之臣配食廟庭, 情文當然, 而且有故閔判書鎭厚已行之例。 所下傳敎, 至爲允當, 無容更議。" 工曹判書洪樂性議曰: "故領議政金昌集定策之功, 宜有配食於先大王廟庭之禮, 而以未及逮事, 不無趑趄之論。 今伏承聖敎, 允合情禮, 無容更議。" 右參贊黃景源議曰: "忠獻公定策之功, 安可不配食於先王廟庭乎? 逮事與否, 非所可論。 臣以爲配享廟庭, 合於典禮也。" 禮曹判書李景祐議曰: "故領議政金昌集, 旣有定策之功, 配食廟庭, 實合情文。 而雖以事例, 初不抄啓, 旣有故判書閔鎭厚配享之例, 今下傳敎, 至爲允當, 無容更議。" 大提學徐命膺議曰: "當初以故相臣金昌集, 爲定策立殣, 允宜配享也。 與大臣相議, 停當於抄啓矣。 有以未逮事人配享, 非自下徑先擧行爲言者, 故不敢擅決, 而心甚惜之。 今伏承下敎, 誠爲允當。 且有故判書閔鎭厚已然之例, 豈有他議?" 戶曹判書具允鈺議曰: "故相臣殉身爲國之忠, 實合於先大王廟庭配享之列, 不可以未逮事爲拘。 特敎詢問之下, 臣無容更議。" 吏曹判書金鍾秀議曰: "故相臣金昌集之配食先大王廟庭。 以功以節, 允叶情禮。 便成國人之通論, 而惟是未逮事之臣, 配食廟庭, 考之前例, 旣無可據, 則終非在下者所敢輕議。 惟在聖上深思博考而處之。" 大司憲尹東暹議曰: "故領議政金昌集定策殉身之功, 允合配食於先大王廟庭。 如以未能逮事爲疑, 則故判書閔鎭厚故事, 爲可援之例。 所下傳敎, 無容更議。" 大司諫徐有防議曰: "故相臣金昌集決策之大義, 殉身之危忠, 雖未及逮事於先朝登極之後, 而考之近例, 亦有可以旁照者。 則今此俯詢之下, 無容更議。" 應敎林蓍喆議曰: "故相旣有決策之功, 則逮事與否, 無容更議。" 敎曰: "故相金昌集事, 有不可已者, 而又有可據之例, 所以詢問者此也。 大臣雖曰: ‘有特敎配侑之例’云, 而六卿、三司, 旣已來會, 就初別單會圈以入。" 仍敎吏曹判書金鍾秀曰: "宋臣張魏公以有功於孝宗時逮策事, 有配庭之論。 而其時諸議, 以事在異朝, 有可否之說。 獨楊萬里以爲: ‘此人旣有建策之功。 則雖在異朝, 其爲配庭, 未有不可’云云。 此事, 雖與故相臣事, 煞有殊焉, 而足可以援例矣。 況有我朝近例之可據者乎?" 鍾秀曰: "聖敎誠至當矣。 且故相臣樹立卓然, 與一絲扶鼎之功, 不可同日而語矣。" 賓廳會圈。 十點領議政金昌集, 九點領議政崔奎瑞、左議政閔鎭遠、左議政趙文命、領議政金在魯。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13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 [註 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