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로의 관작을 추탈하다
김상로(金尙魯)의 관작을 추탈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김상로의 죄악을 이루 주벌할 수 있겠는가? 정축년067) 12월 25일 공묵합(恭默閤)에 입시하였을 때를 당하여 대행 대왕께서 하교하신 바가 있었는데, 김상로가 감히 망측하고 부도한 말로 어전(御前)의 자리에서 앙대(仰對)하는 짓을 했었다. 진실로 조금이라도 북면(北面)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천하 만고에 어찌 차마 양궁(兩宮)의 사이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선대왕께서 그를 풍도(馮道)068) 에 비유하셨다.
임오년069) 에 다시 동궁(東宮)을 설치한 후에 나에게 하교하시기를,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 내가 강제로 치사(致仕)시킨 것은 천하 후세에 나의 마음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임오년의 일을 비록 감히 훗날 다시 들먹이지는 않겠지만, 임오년 5년 전의 때는 5년 뒤인 임오년의 조짐을 양성한 것이 곧 하나의 김상로일 뿐이다.’라고 하셨으니 삼가 머리를 숙여 명을 듣고서 가슴속에 명심했었다. 공제(公除) 후에는 바야흐로 하교하려고 하였는데, 김치현(金致顯)이 난역(亂逆)의 아들로서 방자하게 남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기를 마치 아무 일이 없는 사람처럼 하였다. 이와 같은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장차는 오랑캐와 중국이 혼동되고 맑은 것과 간특한 것이 같아져 버려, 동방의 예의를 지키는 인류가 모두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 지경에 돌아가버리게 될 것이다. 어젯밤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며 날짜를 알아보니, 부절(符節)을 맞춘 듯 하였다. 이런 마당에 어찌 공제까지 기다리겠는가? 마땅히 역률(逆律)을 뒤좇아 시행하여 임금과 신하의 대의(大義)를 바로잡아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들이 두렵게 여길 바를 알도록 해야 하겠는데, 뒤좇아 죄주는 율(律)은 이미 선조(先朝)에 정해 놓은 금령이 있으니 내가 어찌 새로 만들 수 있겠는가? 우선 관작을 추탈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채제공(蔡濟恭)을 소견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정축년에 공묵합에 입시하였을 때 그 자리에서의 한 말을 들었었는가?"
하니, 채제공이 대답하기를,
"신이 그때에는 외방에 있었기 때문에 듣지 못했고, 무인년070) 무렵에 신이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입시하였는데, 김상로가 매양 귀에다 대고 비밀히 아뢰었기 때문에 승지와 사관도 또한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대행조(大行朝)께서 병환이 계시어 잠자리에서 대신들을 인견하셨는데, 요강을 내던지며 하교하시기를 나의 병으로 만일 내가 죽는다면 종사(宗社)와 신민(臣民) 들을 어찌할 것인가? 오늘날에는 위관(衛瓘)이나 손순효(孫舜孝) 같은 사람이 없는 것인가?’라고 하시니, 김상로가 짐짓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전하께서 어찌하여 지나치게 염려하십니까? 저군(儲君)이 이러하고, 신도 또한 이미 요량한 바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대답한 말을 보건대 고금의 극역(劇逆)이 아니겠는가? 그 뒤에 김상로가 계속하여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대조(大朝)071) 에서의 일은 소조(小朝)072) 에 고하고 소조에서의 일은 대조에 고하여 이리저리 속이고 가리며 참소와 모함을 끝없이 하였다. 진실로 양궁(兩宮)의 인자하시기만 하고 효도하시기만 하는 성덕(聖德)이 아니었다면 종사(宗社)가 어느 지경에 놓이게 되었겠는가? 정축년 이후에 임오년의 일을 빚어내어 그의 죄상은 이루 기록할 수가 없고, 경기 감영(京畿監營)에 역림(歷臨)한 일은 더욱 큰 관계가 있는 것이다. 뒷간에 가듯이 잠깐 임어(臨御)한 것이 무슨 예덕(睿德)에 누가 되는 것이라고 대조(大朝)께 모함하여 아뢰는 짓까지 하였는가? 이것이 이른바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인 것이다. 선조(先朝)께서 재유(在宥)하실 적에 나에게 명령하는 분부를 하신 것이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하고, 이어 사관(史官)에게 이 날 이 자리에서의 말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중외(中外)에 반시(頒示)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김상로의 아들 김치현이 대관(臺官)의 직에 있으면서 상소한 말 때문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66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註 067]정축년 : 1757 영조 33년.
- [註 068]
풍도(馮道) : 중국 오대(五代) 때 후주(後周)의 사람으로, 사성(四姓) 십군(十君)의 임금을 섬기면서 20여년 동안 상위(相位)에 있었으므로, 후세에서 비루하게 여겼음.- [註 069]
임오년 : 1762 영조 38년.- [註 070]
○辛丑/追奪金尙魯官爵。 敎曰: "嗚呼! 尙魯之罪, 可勝誅哉? 當丁丑十二月二十五日恭默閤入侍時, 大行大王有所下敎, 則尙魯敢以罔測不道之語, 仰對前席。 苟有一分北面之心, 萬古天下, 豈忍發此等言於兩宮之聞乎? 先大王譬之溤道。 壬午復設東宮後, 敎予曰: ‘尙魯汝之讎也。 予之勒令致仕, 白予心於天下後世也。 壬午雖不敢更提於他日, 前壬午五年之時, 釀壬午五年後兆, 卽一尙魯而已。’ 拜稽聞命, 銘諸心腑。 公除之後, 方欲下敎, 致顯以亂逆之子, 肆呈誣人之疏, 有若無故者然。 若此不已, 其將混夷夏同淑慝, 而使東土衣冠之倫, 盡歸於無君無父之域。 昨夜見《政院日記》, 考知日字, 符如合節。 到此之時, 何待公除? 當追施逆律, 以正君臣之大義, 使亂臣賊子知所懼, 而追律旣有先朝禁令, 予何可創爲? 姑先追奪官爵。" 召見刑曹判書蔡濟恭, 上曰: "卿聞丁丑恭默閤入侍筵話乎?" 濟恭對曰: "臣時在外未聞, 而戊寅年間, 臣以知申入侍, 則尙魯每附耳密奏, 承史亦不得聞也。" 上曰: "其時大行朝有患候, 引見大臣於臥內, 擲溺器敎曰: 予病若不諱, 其於宗社臣民何? 今日無衛瓘、孫舜孝乎? 尙魯陽若垂涕而奏曰: ‘殿下何過慮乎? 儲君之如此, 臣亦先有料量矣。’ 觀此所對, 非亘古劇逆乎? 其後尙魯連據首相, 以大朝事告小朝, 以小朝事告大朝, 互相欺蔽, 讒構罔極。 苟非兩宮止慈止孝之聖德, 置宗社於何地? 丁丑以後釀成壬午, 其罪不可勝記, 而畿營歷臨事, 關係尤大。 爲如廁暫臨, 何累於睿德, 而至於搆奏大朝乎? 此所謂不共戴天之讎。 先朝在宥時, 命予之敎, 良有以也。" 仍命史官詳錄是日筵話, 頒示中外。 時尙魯之子致顯以臺職, 上疏言事。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66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註 0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