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히 지은 대행 대왕 대비의 행록
임금이 친히 대행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행록(行錄)을 지었다.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할 때가 닥쳤으므로, 밤에 승지를 불러 눈물을 삼키며 글을 불러주고 적도록 하였는데, 기운이 피로하여 이튿날에야 비로소 마치고 하교하기를,
"정신이 더 쇠모(衰耗)해지기 전에 자성(慈聖)의 덕행(德行)을 만에 하나라도 유양(揄揚)하려고 한다."
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우리 대행 자성은 바로 우리 성고(聖考) 숙종 대왕의 계비(繼妃)로서,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인데, 시조는 김알지(金閼智)이니 세조(世祖)로 추존(追尊)되었다. 27대손 김부(金傅)는 고려조에서 경순왕(敬順王)으로 봉(封)하였다. 그의 후손 김지윤(金智允)은 충근 양절 찬화 공신(忠勤亮節贊化功臣)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판도평의사(判都評議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들 김균(金稛)은 조선조에 들어와 개국 공신 좌찬성 계림군(鷄林君)으로, 시호는 제숙(齊肅)이다. 손자인 김종순(金從舜)은 청백리(淸白吏)에 뽑히고 시호는 공호(恭胡)인데, 세종(世宗)·문종(文宗)·단종(端宗)·세조(世祖)·예종(睿宗)·성종(成宗)을 대대로 섬겼었다. 6대조 김만균(金萬勻)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헌에 이르렀는데, 공훈으로 영의정 월성 부원군(月城府院君)에 추증되었으며, 생부(生父) 김천령(金千齡)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직제학에 이르렀다. 5대조 김명원(金命元)은 선묘조(宣廟朝)의 이름난 훈신(勳臣)인 좌의정 경림 부원군(慶林府院君)으로,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고조(高祖) 김수렴(金守廉)은 영의정 오원군(鰲原君)에 추증되었다. 증조(曾祖) 김남중(金南重)은 예조 판서 경천군(慶川君)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조(祖) 김일진(金一振)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고(考)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비(妣)는 가림 부부인(嘉林府夫人) 조씨(趙氏)이다. 시조 조천혁(趙天赫)은 고려에 벼슬하여 가림백(嘉林伯)이 되었고, 9대조 조연성(趙連城)은 처음으로 조선조에 들어와 지홍주사(知洪州事)가 되었다. 고조(高祖) 조원(趙瑗)은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가 되었고, 증조(曾祖) 조희일(趙希逸)은 진사시에 장원하고 문과와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었다. 조(祖) 조석형(趙錫馨)은 진사시에 장원하고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고(考) 조경창(趙景昌)은 소자(小子)가 왕위를 계승한 지 31년 만에 옛날의 고사(故事)를 준용(遵用)하여 특별히 좌찬성으로 추증하였다. 정묘년041) 9월 29일 축시(丑時)에 우리 자성께서 순화방(順化坊) 사제(私第)의 양정재(養正齋)에서 탄강(誕降)하셨으니, 바로 조희일의 구제(舊第)이다. 임오년(任午年)042) 에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고, 이어서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성후(聖后)께서 어렸을 적에 종조모(從祖母) 권씨(權氏)가 보고 특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걸음걸이가 얌전하고 행동이 단정하니 범상하지 않음이 틀림없다.’ 하였으니,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성모(聖母)께서는 성품이 본래 단정하고 엄숙하며 정숙하고 전일하며 조용하고 말수가 적어서 주남(周南)의 교화043) 가 궁곤(宮壼)에 가득히 넘치고, 탁룡(濯龍)의 경계044) 가 심상(尋常)한데서 뛰어나셨으며, 본가(本家)의 자손에 대해서는 비록 미관(微官)이나 소직(小職)이라 하더라도 번번이 지나치다고 일컬으셨다. 7년 동안 성고(聖考)를 시탕(侍湯)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게을리 하심이 없었고, 다섯 달 동안 빈전(嬪殿)에서 모시며 아무리 혹독한 추위와 찌는 듯한 더위라 하더라도 일찍이 혹시라도 떠나시지 않았다. 3년 동안의 제전(祭奠)은 반드시 정성과 공경으로 하시니, 이 때문에 해사(該司)에서 올리는 제물(祭物)도 감히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의 성덕(聖德)을 깊이 본받아 백성을 사랑하는 은혜와 백성을 가엾게 여겨 돌보시는 혜택이 피부와 뼈속에 젖어드는데, 자애(慈愛)로운 어진 마음이 한(漢)나라 명덕 황후(明德皇后)보다도 뛰어나시니, 소자(小子) 같은 얕은 효성으로도 자성의 두터운 은혜를 입게 되었다. 비록 조용히 조섭(調攝)하는 가운데 계시면서도 오히려 잊지 않고 돌보아 마지 않으셨으니, 아! 자성의 은혜는 하해(河海)와 같아 헤아릴 수가 없다. 옥책(玉冊)을 올려 휘호(徽號)를 드날리고 칭상(稱觴)045) 하여 기쁨을 받드는 것은 신자(臣子)로서 당연한 일인데, 스스로 매우 겸손하여 억제하셔서 절대로 받지 않으셨으며, 비록 간혹 억지로 따르셨지만, 몇 차례의 진호(進號)와 몇 번의 진연(進宴)에 모두 몸소 나오지 않으셨다. 그러나 고복(顧復)하는 은혜는 쇠모해지기에 이르러 더욱 돈독하여 한 가지의 의복과 한 가지의 음식에 있어서도 자성의 은혜가 미치지 않음이 없었다. 이번에 병환이 낫지 않고 오래 끄는 가운데에서도 미음을 마시는 일에 있어서 소자(小子)를 위해 반드시 억지로 올리게 하면서 굽어 권면하셨는데, 25일 이후부터 다시 그런 말씀을 받들어 듣지를 못하였으니, 이것이 소자가 울부짖어 애모(哀慕)하며 차라리 죽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또 몸소 검소하여 절약하셨으니 이번의 대비전(大妃殿)에서 글로 남기신 것으로 살펴보면 우러러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무릇 제전(祭奠)에 대해서도 모두 그릇 수를 정해 놓으면서 예전에 있었던 것을 지금에 줄인 것이 많았다. 그리고 내탕(內帑)의 은자(銀子)와 어고(御庫)의 필단(疋緞)은 도감(都監)에 내려주도록 유명(遺命)을 남기셨고, 능전(陵殿)에 쓰는 은기(銀器)도 경자년046) 에 진용(進用)했던 것을 쓰도록 명하셨으며, 오늘날 염습(斂襲)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구와 빈전(殯殿)에 드는 물건은 유장(帷帳) 등속과 대여(大轝)의 장식이라 하더라도 모두 대비전에서 갖추어 두셨으니, 옛날을 사모하는 인자한 마음과 경비를 염려하는 아름다운 덕은 바로 옛날 사첩(史牒)에서도 듣지 못했으며, 옛날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 돌보신 융성한 뜻은 지금까지 추모하고 있다. 한 번 바람이 불거나 한 번 비가 내리는 것도 한결같이 지나쳐 버리신 적이 없었고, 만약 소자가 능묘(陵廟)에 행례(行禮)할 때를 당하면, 혹 합문(閤門)을 열고 기상을 관측하거나 혹은 뜰에서 거닐며 하늘을 쳐다보고 관찰하였는데, 만약 날씨가 맑고 바람이 잔잔하면 소자를 대해 기쁜 뜻을 먼저 유시하셨으나 혹 오래도록 장마가 지거나 오래도록 가뭄이 들면 한 번 구름이 끼고 한 번 개일 때마다 번번이 소자를 위로하셨다. 아! 책으로 엮어 이미 유시하였으니 이는 바로 나의 마음을 아는 이로는 부모(父母)만한 이가 없다는 것이다. 아! 이 뒤로 소자가 아무리 옥음(玉音)을 다시 받들어 듣고자 한들 어떻게 받들 수 있겠는가? 불러주고 쓰기를 여기까지 이르니, 눈물이 불러주는 소리를 따라 흘러내림을 깨닫지 못하겠다. 아! 당론(黨論)은 바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근본이므로 이 폐단을 매우 염려하셨는데, 말씀이 간혹 이 문제에 미치면 반드시 척속(戚屬)은 서로 경계하여 편당(偏黨)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매우 강개하셨으니, 국구(國舅)의 집안에만 훈계한 것이 아니고 이는 또한 성자(聖慈)의 교화가 미치는 바였다. 그러다가 소감(昭鑑)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 이르러서는 자성께서 기뻐하여 하교하시기를, ‘이것으로 인하여 만약 편당(偏黨)이 없어진다면 나라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셨다. 아, 지난날의 역사를 상고하여 보면 비록 현명한 임금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편당 없애는 것을 어렵게 여겼었다. 후비(后妃)에 이르러서는 송(宋)나라 선인 황후(宣人皇后)가 있었지만, 이런 일이 있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아! 성대하도다. 아! 소자가 4기(紀)047) 동안 이 마음을 지키면서 오히려 혹시라도 게을러질 것을 두려워한 것은 한편으로는 성고(聖考)의 마음을 우러러 본받으려 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자성(慈聖)의 뜻을 위로해 드리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지나간 해에 편당을 제거했던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성께서 부지런히 잊지 않고 돌보신 것은 이와 같이 옛날 사첩보다 탁월하셨지만, 소자가 불효(不孝)하고 불초(不肖)하여 성고의 뜻을 본받지 못하고 자성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지 못하였고, 그런 뜻을 천명(闡明)한 뒤에도 옛날의 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이것은 지난날 〈편당을 없애려던 자성의 뜻을〉 저버린 것이다. 따라서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가 않다. 아! 우리 자성께서 국모(國母)로 계신 지 5기(紀) 동안 자애로운 교화가 널리 미치었고, 보산(寶算)이 영묘하여 80을 바라보는 데 이르도록 장수하셨으므로, 애일(愛日)의 정성과 수복(壽福)이 강릉(岡陵)처럼 크고 길기를 축원하는 마음이 가슴속에 번갈아 간절했었다. 며칠 전에 편찮으셨을 적에는 다행스럽게도 천지 신명께서 가만히 도와주심을 의뢰하여 빨리 회춘(回春)하시는 데 이르렀으므로, 이 일로 인하여 송백(松栢)처럼 변함없이 오래사시기를 송축(頌祝)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했었는데, 쇠약해져 피로한 증세에다 외부의 해로운 기운을 끼게 되어 원기가 날마다 가라앉아 의약의 효과가 없어져서 정축년 3월 26일 사시(巳時)에 창덕궁(昌德宮) 경복전(景福殿) 서쪽의 영모당(永慕堂)에서 승하(昇遐)하실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이는 대체로 소자의 정성스러운 효심(孝心)이 천박(淺薄)한 소치이니, 하늘에 부르짖어 울어도 하늘이 응답하지 않고 땅을 치며 죽고 싶어도 땅이 또한 응답이 없으니 아득한 저 하늘이여,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이것이 바로 소자가 평생동안 영모(永慕)해야 할 것이다. 아! 이 달은 무슨 달인가? 지난번 육상궁(毓祥宮)의 기일(忌日)에 자성께서 옛날을 생각하여 눈물을 머금고 소자에게 가도록 권면하셨는데, 겨우 한 번 바라보고 나자 붕어(崩御)하셨으니, 아무리 따르려고 하여도 용염(龍髥)048) 에는 미칠 수가 없고, 아무리 봉양하려고 하여도 장락궁(長樂宮)은 고요하기만 한데, 아득한 저녁 구름을 바라보니,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 아! 소자가 머리를 땋을 때부터 우리 자성을 받들었는데, 자성께서는 80을 바라보도록 사시고 소자의 나이 또한 70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는 진실로 지난 사첩에서도 보기드문 일이므로, 마음 속으로 가만히 경사스러워하며 다행으로 여겼는데, 근래에 기운이 더욱 쇠모해져 갈수록 두려워하는 마음이 간절했었다. 무술년049) ·경자년050) ·갑진년051) ·경술년052) 에 최마(衰麻)를 입고 상장(喪杖)을 짚었었는데, 64세가 되어 다시 최마를 입고 다시 상장을 짚을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아! 저 내전(內殿)은 오늘날의 일을 보지 않아도 되는데, 아! 불초(不肖)한 나는 하얗게 머리가 센 나이에 머리를 풀지만, 자성의 음성은 아득하기만 하다. 아! 지난해 육상궁(毓祥宮)의 동향 제문(冬享祭文) 가운데 우리 자성의 한 가지 의복과 한 가지 음식도 잊지 않고 돌보았다는 귀절이 전적으로 위로하고 이해하려는 뜻에서 말미암기는 하였지만 아! 우리 자친(慈親)이 지금 자성을 모셨으면 반드시 기뻐하여 다행으로 여기셨을 터이고, 소자를 돌보시는 마음이 그 또한 갑절이나 더하실 것이니, 이것이 바로 소자가 더욱 상심하게 되는 까닭이다. 아! 자성의 자애로운 마음은 황형(皇兄)에게나 소자에게 조금도 차이가 없었는데,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염려하고 황형에게 후사(後嗣)가 없음을 민망하게 여겨, 특별히 건저(建儲)하도록 명하신 것은 지나간 사첩에서도 듣지 못한 바였으며, 이 일로 인하여 황형에게는 후사가 있게 되고 소자는 의지할 데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신년053) 의 역모(逆謀)와 을해년054) 의 역모가 있을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이러한 일들은 소자만이 곧바로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고, 실제로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분개하던 바였는데도, 자성께서는 이 사건을 듣고 웃으면서 답하시는 것이 평상시와 다름이 없으셨다. 이것이 소자가 흠모하며 탄복하는 까닭이니 크고도 지극하도다. 승하[禮陟]하신 지 7일 만에 휘호(徽號)를 정의 장목(定懿章穆)으로 의정(議定)하고 6월 13일에 시호(諡號)를 인원(仁元)으로 올렸으며, 7월 12일에 명릉(明陵)의 오른쪽 산등성이 신향(辛向)의 언덕에 봉장(奉葬)하였는데, 춘추(春秋)는 71세이다. 부장(祔葬)한 것은 바로 옛날의 유교(遺敎)이었고, 자성의 지극한 소원이기도 하였는데, 마침 옛날에 표시해 두었던 좌향(坐向)에 기피할 일이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이 산등성이를 점지하게 되었다. 그전의 곳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아주 가깝게 되었다. 구정자각(舊丁字閣)을 그대로 사용하고, 세 탑(榻)이 엄연하여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에 모두 흡족하니, 이것이 어찌 신명(神明)이 오르내리면서 돌보고 도와주며 자애로운 정성이 미친 바가 아니겠는가? 이제부터 이후로는 소자가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돌아가 배알(拜謁)할 면목이 있게 되었으니, 애모하는 가운데서도 거의 이 마음에 위로가 된다. 현궁(玄宮)에 내릴 명정(銘旌)과 재궁(梓宮) 위의 글자, 표석(表石)의 전면·후면을 모두 몸소 써서 애모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펴려고 하였다. 이번의 행록(行錄)에는 단지 사실만 열거하여도 오히려 다 기록할 수 없는데, 어찌 감히 쓸데없는 말을 번거롭게 수식하여 자성께서 날마다 겸양하신 덕(德)을 저버리겠는가?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이 글을 가지고 그대로 지문(誌文)을 짓게 하였는데, 한 편의 작은 정성을 여기에 모두 기재하고 불러서 쓰게 하기를 마치니, 피눈물이 얼굴을 덮는다. 우리 성고(聖考) 39년 계사년에 혜순(惠順)이란 존호(尊號)를 받으셨고 황형(皇兄) 2년 임인년에 또 자경(慈敬)이란 존호를 올렸고, 소자가 왕위를 계승한 2년째 되던 병오년에 또 헌렬(獻烈)이란 존호를 올렸고, 16년인 경신년에 또 광선(光宣)이란 존호를 올렸고, 같은 해에 또 현익(顯翼)이란 존호를 올렸고, 23년인 정묘년에 또 강성(康聖)이란 존호를 올렸고, 27년인 신미년에 또 정덕(貞德)이란 존호를 올렸고, 28년인 임신년에 또 수창(壽昌)이란 존호를 올렸고, 29년인 계유년에 또 영복(永福)이란 존호를 올렸고, 32년인 병자년에 또 융화(隆化)란 존호를 올렸었다. 아! 자성의 덕(德)을 유양(揄揚)하면 이 정도에 그치겠는가? 소자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효장 세자(孝章世子)로 처음에 경의군(敬義君)에 봉(封)해졌다가 왕위를 계승한 원년(元年)에 〈세자로〉 책봉(冊封)되었으며, 풍릉 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바로 효순 현빈(孝純賢嬪)이다. 다음은 처음에 원자(元子)로 봉해졌다가, 병진년055) 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판서 홍봉한(洪鳳漢)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12옹주(翁主)를 두었는데, 둘째인 화순 옹주(和順翁主)는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하가(下嫁)하였으니 바로 의정(議政) 봉조하(奉朝賀)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이다. 셋째인 화평 옹주(和平翁主)는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하였는데, 바로 참판으로 의정에 추증된 박사정(朴師正)의 아들이며, 계자(繼子)인 박상철(朴相喆)은 문과 정시(文科庭試)에 합격하였고 현령 김간행(金簡行)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여덟째 화협 옹주(和協翁主)는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에게 하가하였는데, 바로 우의정 신만(申晩)의 아들이며, 계자가 있는데 나이가 어리다. 아홉째 화완 옹주(和緩翁主)는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에게 하가하였는데, 추증된 시호는 효민(孝敏)이니 바로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의 아들이며, 소주(小主)가 있다. 열째 화유 옹주(和柔翁主)는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 하가하였는데, 바로 참판 황재(黃梓)의 아들이다. 열한째·열두째는 아직 어리다. 세자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의소 세손(懿昭世孫)이고, 다음은 원손(元孫)이니 모두 세자빈(世子嬪)이 낳았다. 두 왕손(王孫)은 모두 나이가 어리며, 두 군주(君主)가 있는데 나이 또한 어리다. 겸해서 행록(行錄)에 부쳐 천억 년 동안 영구히 전하게 한다."
하였다. 【승하한 지 7일만이라는 데서부터 그 이하는 뒤에 더 보태어 지은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63책 89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43면
- 【분류】왕실(王室) / 인물(人物) / 역사(歷史)
- [註 041]정묘년 : 1687 숙종 13년.
- [註 042]
임오년(任午年) : 1702 숙종 28년.- [註 043]
주남(周南)의 교화 :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인 태사(太姒)의 덕(德)이 자손(子孫)과 종족(宗族)을 선화(善化)하고 여러 첩(妾)들을 감싸주었으므로, 상하(上下)가 화목하게 교화된 고사(故事).- [註 044]
탁룡(濯龍)의 경계 :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비(妃)인 마황후(馬皇后)는 후덕(厚德)한 성품으로 장제(章帝)를 아들로 삼아 마음을 다하여 양육(養育)하고, 장제 또한 지성으로 마황후를 섬겼는데, 마황후는 평소 의복(衣服)과 궁실(宮室) 등을 검소하게 하여 모범을 보였음. 만년(晩年)에는 탁룡(濯龍) 가운데에 직실(織室)을 설치하여 누에 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외척(外戚)의 전횡(專橫)을 경계하여 친가(親家) 형제의 조정 진출을 막은 고사임.- [註 045]
칭상(稱觴) : 헌수(獻壽).- [註 046]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註 047]
4기(紀) : 12년이 1기(紀)임.- [註 048]
용염(龍髥) : 황제(皇帝)가 용(龍)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자, 신하들이 용의 수염을 붙잡았으나 수염만 뽑아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임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뜻함.- [註 049]
무술년 : 1718 숙종 44년.- [註 050]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註 051]
갑진년 : 1724 경종 4년.- [註 052]
경술년 : 1730 영조 6년.- [註 053]
○上親製大行大王大妃行錄。 以議號迫近, 夜召承旨, 飮泣呼寫, 氣憊翌日始畢, 敎曰: "精神未耗之前, 欲揄揚慈德之萬一也。" 其文曰:
惟我大行慈聖, 卽我聖考肅宗大王之繼妃也, 姓金氏, 本慶州, 始祖閼智, 追尊世祖。 二十七代孫傅, 高麗封敬順王。 其後智允贈忠勤亮節贊化功臣知(文化)〔門下〕 府事判都評議事。 子稛入我朝, 開國功臣左贊成鷄林君, 諡齊肅。 孫從舜, 被選淸白, 諡恭胡, 歷事世宗、文宗、端宗、世祖、睿宗、成宗。 六代祖萬勻, 文科壯元, 都憲, 贈勳領議政月城府院君, 生父千齡文科壯元, 官至直提學。 五代祖命元, 以宣廟朝名勳左議政慶林府院君, 諡忠翼。 高祖守廉, 贈領議政鰲原君。 曾祖南重, 禮曹判書慶川君, 贈左贊成, 諡貞孝。 祖一振, 贈領議政, 考慶恩府院君 柱臣, 贈領議政, 諡孝簡。 妣嘉林府夫人 趙氏。 始祖天赫, 仕高麗, 爲嘉林伯, 九代祖連城, 始入我朝, 知洪州事。 高祖瑗司馬壯元, 文科承旨, 曾祖希逸, 司馬壯元, 文科重試, 官至參判。 祖錫馨, 司馬壯元, 贈參判, 考景昌, 小子嗣服三十一年, 遵昔年故事, 特贈左贊成。 丁卯九月二十九日丑時, 我慈聖誕降于順化坊私第之養正齋, 卽希逸之舊第也。 壬午冊封王妃, 仍行嘉禮。 聖后幼時, 從祖母權氏見而異之曰, ‘步履安詳, 擧止端正, 必也非常’ 云, 可謂鑑識之明矣。 我聖母, 性本端莊貞一, 沈默寡言, 周《南之》化, 洋溢宮壼, 濯龍之戒, 逈出尋常, 本家子孫, 雖微官小職, 輒稱過焉。 七年侍湯, 一心靡懈, 五朔殯殿, 雖隆寒盛暑, 未嘗或離。 三年祭奠, 必誠必敬, 以此該司所進祭物, 莫敢不致恪。 深體昔年聖德, 愛民之恩, 恤民之澤, 浹于肌髓, 慈愛之仁, 邁於漢之明德, 若小子淺孝, 亦蒙慈渥。 雖在靜攝之中, 猶眷眷不已, 嗚呼! 慈恩河海莫量。 上冊揚徽, 稱觴奉歡, 臣子當然之事, 而深自謙抑, 絶不受焉, 雖或勉從, 而幾次進號、幾番進宴, 俱不躬臨。 顧復之恩, 至衰彌篤, 一衣一食, 莫非慈恩攸曁。 而雖今番沈綿之中, 其於粥飮, 爲小子必也强進而俯勸, 自二十五日以後, 不復承聞, 此小子號泣哀慕, 寧欲溘然者也。 且躬自儉約, 以今番自內書留者觀之, 可以仰認矣。 凡於祭奠, 皆定器數, 古之所有, 今多減焉。 內帑銀子、御庫疋緞, 遺命下都監, 陵殿所用銀器, 以庚子進用者命用, 今日襲斂諸具、殯殿物件, 雖帷帳之屬、大轝之飾, 俱皆自內備置, 慕昔年之慈心、恤經費之懿德, 卽往牒未聞, 昔年敬天恤民之盛意, 尙今追慕。 一風一雨, 無一放過, 若値小子行禮陵廟之時, 則或開閤觀象, 或步楹仰察, 其若日朗風淸, 則對小子而先諭心喜之意, 其或久霖久旱, 一陰一晴, 輒慰小子。 噫! 述編旣諭, 此正知我心者, 莫如父母也。 嗚呼! 此後小子, 雖欲復承玉音, 焉可得也? 呼寫及此, 不覺淚隨聲下。 噫! 黨論卽亡國之根柢, 而深軫此弊, 語或及此, 必也深慨戚屬之相戒無黨, 非徒國舅家訓, 是亦慈化攸曁。 及夫《昭鑑》已成之後, 慈心欣豫下敎曰, ‘因此而若無黨, 邦國幸矣。’ 噫! 考諸往牒, 雖賢君猶以祛黨爲難。 至於后妃, 在宋 宣仁, 亦未聞者, 猗歟盛哉! 噫! 小子之四紀守此心, 猶恐或懈者, 一則仰體聖考之心, 一則上慰慈聖之意也。 昔年祛黨, 出於至誠。 慈聖勤勤眷眷, 又若是卓越前牒, 而小子不孝不肖, 莫能體聖意慰慈心, 闡義之後, 舊習猶存, 此負昔年負慈聖也。 思之及此, 寧欲無語矣。 噫! 我慈聖母臨五紀, 慈化普洽, 實算靈長, 壽至望八, 愛日之誠, 罔陵之祝, 交切於中。 頃日違豫, 幸賴神明之默佑, 遄臻回春, 因此而彌切, 如松如栢之頌, 豈意衰憊之症, 挾表氣而眞元日下, 醫藥罔效, 乃於丁丑三月二十六日巳時, 昇遐于昌德宮 景福殿西永慕堂? 此蓋小子誠孝淺薄之致, 叫天號泣天不應, 叩地欲隕, 地亦不應, 悠悠彼蒼! 此何人斯? 此正小子終身永慕者也。 噫! 是月何月? 頃於毓祥宮忌日, 慈聖念昔飮涕, 勸小子而往焉, 纔一望仙馭上賓, 雖欲攀也, 龍髯莫逮, 雖欲養也, 長樂閴寂, 遙望暮雲, 涕淚霑臆。 小子自編髮時, 奉我慈聖, 慈聖享年望八, 小子年亦望七。 此誠往牒所稀, 心竊慶幸, 而近者氣益衰耄, 尤切懍惕。 何意戊戌、庚子、甲辰、庚戌之衰麻與杖, 復衣復杖於六十四歲乎? 噫! 彼內殿不覩今日, 而吁嗟不肖, 白首被髮, 慈音漠然。 噫! 昨年毓祥宮冬享祭文中, 我慈聖一衣一食眷戀之句, 專由慰解之意, 噫! 我慈親今侍慈聖, 必也欣幸, 而眷小子之心, 其將一倍, 此正小子所以尤爲隕心者也。 噫! 以慈聖慈愛之心, 於皇兄與小子, 無少間焉, 念三宗之血脈, 悶皇兄之無嗣, 特命建儲, 往牒無聞, 因此而皇兄有子, 小子有依。 豈意有戊申、乙亥乎? 此非徒小子之直欲溘然, 實國人之所共憤者, 而慈聖聞此, 笑而答之, 無異平日。 此小子所以欽歎者也, 大哉至哉! 禮陟越七日, 議徽號曰定懿章穆, 六月十三日上諡曰仁元, 七月十二日奉葬于明陵右罔辛向原, 春秋七十一歲。 祔葬, 卽昔年之遺敎, 慈聖之至願也, 而適因舊標坐向之有忌, 幸卜此罔。 昔之隔遠者, 今爲密邇。 丁閣仍舊, 三榻儼然, 神理人情, 俱爲洽然, 此豈非陟降之眷佑, 慈誠之攸曁耶? 從今以後, 小子有欣幸歸拜之顔, 哀慕之中, 庶慰此心矣。 下玄宮銘旌、梓宮上字、表石前後面, 皆躬自敬寫, 少伸哀慕之懷。 今者行錄, 只擧實事, 而猶不能悉, 何敢以繁文剩語, 負慈聖日撝謙之德意乎? 令都監以此文仍作誌文, 一片微誠, 盡載于此, 呼寫以畢, 血淚被面。 我聖考三十九年癸巳受尊號曰惠順, 皇兄二年壬寅又上尊號曰慈敬, 小子嗣服二年丙午又上尊號曰獻烈, 十六年庚申又上尊號曰光宣, 同年又上尊號曰顯翼, 二十三年丁卯又上尊號曰康聖, 二十七年辛未又上尊號曰貞德, 二十八年壬申又上尊號曰壽昌, 二十九年癸酉又上尊號曰永福, 三十二年丙子又上尊號曰隆化。 嗚呼! 揄揚慈德, 止於此耶? 小子有二男, 長孝章世子, 初封敬義君, 嗣服元年, 冊封, 娶豐陵府院君 趙文命女, 卽孝純賢嬪也。 次初封元子, 丙辰冊封世子, 娶判書洪鳳漢女。 有十二翁主, 第二和順翁主下嫁月城尉 金漢藎, 卽議政奉朝賀興慶子。 第三和平翁主下嫁錦城尉 朴明源, 卽參判贈議政師正子, 繼子相喆文科庭試, 娶縣令金簡行女。 第八和協翁主下嫁永城尉 申光綏, 卽右議政晩子, 有繼子年幼。 第九和緩翁主下嫁日城尉 鄭致達, 贈諡孝敏, 卽右議政羽良子, 有小主。 第十和柔翁主下嫁昌城尉 黃仁點, 卽參判梓子。 第十一十二尙幼。 世子有四男, 長懿昭世孫, 次元孫, 皆嬪所誕也。 與二王孫俱年幼, 有二郡主而年亦幼焉。 兼附行錄, 永垂千億云爾。 【自禮陟越七日以下追後足成。】
- 【태백산사고본】 63책 89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43면
- 【분류】왕실(王室) / 인물(人物) / 역사(歷史)
- [註 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