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히 지은 대행 왕비의 행장
임금이 친히 대행 왕비의 행장(行狀)을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후(王后)는 성이 서씨(徐氏)로 본관(本貫)이 대구(大丘)인데, 고려조(高麗朝)의 소윤(少尹) 서한(徐閈)의 후손이다. 10대조 서미성(徐彌性)은 조선조[我朝]에 들어와 그의 아들 찬성 서거정(徐居正)의 공훈(功勳)으로 달천 부원군(達川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고, 9대조는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된 서거광(徐居廣)이니 바로 서거정의 형(兄)이다. 5대조 서성(徐渻)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중추부사를 지냈는데,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으로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두 조정의 명신(名臣)이었다. 고조(高祖) 서경수(徐景需)는 전첨(典籤)으로 판서에 추증되었고, 증조(曾祖) 서형리(徐亨履)는 첨정으로 찬성에 추증되었고, 조부(祖父) 서문도(徐文道)는 사평(司評)으로 의정에 추증되었다. 고(考) 서종제(徐宗悌)는 군수로 처음에는 찬성(贊成)에 추증되었다가, 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갑진년026) 에 내가 왕위(王位)를 이어받은 뒤에 영의정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에 추증되고 효희(孝僖)로 증시(贈諡)되었다. 비(妣) 잠성 부부인(岑城府夫人) 이씨(李氏)는 본관이 우봉(牛峰)이다. 시조 이공정(李公靖)은 고려조의 삼중 공신(三重功臣) 문하 시중(門下侍中) 잠성 부원군(岑城府院君)으로,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8대조 이순(李淳)은 조선조에 들어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5대조 이세명(李世銘)은 승지(承旨)로 추증되었는데, 기묘 명현(己卯名賢)027) 이다. 고(考)는 통덕랑(通德郞) 이사창(李師昌)이다. 왕후는 임신년028) 12월 초7일 술시(戌時)에 가회방(嘉會坊)의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는데, 갑신년029) 에 길례(吉禮)를 행하고, 달성 군부인(達城郡夫人)에 봉(封)해졌으며, 황형(皇兄) 원년(元年) 신축년030) 에 자교(慈敎)를 받들어 세제빈(世弟嬪)으로 책봉(冊封)되고, 갑진년031) 에 비(妃)로 책봉되었다. 경신년032) 에 혜경(惠敬)이란 호(號)를 받고, 임신년(任申年)033) 에 장신(莊愼)이란 호를 더하고, 병자년034) 에 강선(康宣)이란 호를 더하였는데 정축년035) 2월 15일 신시(申時)에 창덕궁(昌德宮)의 관리합(觀理閤)에서 훙서(薨逝)하니 향년(享年)이 66세이다. 시호를 정성(貞聖)이라고 의정(議定)하고, 같은 해 6월 초4일에 고양(高陽)의 창릉(昌陵) 왼쪽 산등성이 신향(辛向)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바로 명릉(明陵)의 오른쪽 산기슭이다. 이상이 왕후의 성씨와 본관 세계(世系)의 시말(始末)이다. 아! 왕후는 나이 겨우 13세 때에 우리 성고(聖考)의 간택(揀擇)을 받아 나의 배필(配匹)이 되었는데, 은혜와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었다. 언제나 진현(進見)할 적이면 반드시 웃는 낯빛으로 뵈었는데, 이는 바로 내가 직접 보았던 일이다. 기쁜 얼굴빛과 온순한 자태로 양전(兩殿)을 섬기며 7년 동안 시탕(侍湯)하였는데, 오래도록 대궐 안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자년036) 에 성고(聖考)께서 돌아가시자, 왕후는 더 한층 몹시 애모(哀慕)하여 3년상을 마친 뒤에도 오히려 진전(眞殿)의 배알(拜謁)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이가 이미 많아 쇠약해졌지만 그 정성은 더욱 돈독하여 우리 자성(慈聖)께서 보산(寶算)이 더욱 높으신 것을 민망히 여겨 일정한 때가 없이 진찬(進饌)하고, 기거(起居)에 대한 안부를 받들어 묻기를 쇠모함을 꺼리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하였으며, 또 육상궁(毓祥宮)의 제전(祭奠)에는 반드시 성심(誠心)을 다하였다. 계유년037) 에 시호를 올리던 날에는 몸소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렸고, 매번 원릉(園陵)의 기신(忌辰)을 당하면 3일 동안의 소선(素膳)을 그치지 않았으며, 증 영상의 자손에게도 성심으로 대우하였다. 자애(慈愛)하는 마음에 이르러서는 나이가 많은데도 한결같아서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하는 효성스런 마음은 말할 때마다 번번이 눈물을 흘렸는데, 비록 이번에 정신이 혼미하고 기운이 가라앉았을 적에도 오히려 사모하여 잘 보호할 것을 권면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탄복하는 까닭인 것이다. 아! 내가 왕후와 한두 살 차이가 있지만, 모두 60세를 넘기고서도 위로 80을 바라보는 자성(慈聖)을 받들어 모시고 있으니, 지난 사첩(史牒)에서 찾아보아도 드문 일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더욱 쇠모해져 원기(元氣)가 한 번 가라앉자,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도 아무 효과가 없을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아, 그가 재궁(梓宮)에 들어가던 날 하나의 봉치(封置)된 것을 보았더니, 바로 옛날의 어찰(御札)과 대궐에 들어온 뒤에 사명(賜名)한 것이었으니, 여기에서 왕후가 항상 추모(追慕)하던 마음을 알 수 있어서 더욱 슬펐다. 그러나 장락(長樂)038) 을 받들면서 기쁘게 한 나머지 조용히 돌아가서 오르내리며 배알(拜謁)할 것인데, 왕후가 어찌 슬퍼하겠는가? 내가 이러한 때에 미리 택조(宅兆)039) 를 점지하고, 능호(陵號) 오른쪽을 비워두는 제도를 적용하였으니 또한 무슨 유감(遺憾)이 있겠는가? 아! 부문(浮文)을 크게 과장하는 것은 바로 내가 마음속으로 바라지 않는데, 더구나 이 글에 있어서 어찌 한 글자라도 근거없는 것을 꾸미겠는가? 글이 비록 간략하지만, 왕후의 미덕(美德)을 대략 기술하였다. 시탕하며 초조하고 민망스러운 나머지 조금 심신(心身)을 수습하여 이 한 편(篇)을 불러주어 적게 하는데, 내용은 간단하지만 뜻은 다 표현하였으니, 구원(九原)으로 돌아간 왕후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맏이는 효장 세자(孝章世子)로 정빈(靖嬪) 이씨가 낳았는데, 처음에 경의군(敬義君)으로 봉하였다가 원년에 세자로 책봉하였고, 효순 현빈(孝純賢嬪) 조씨(趙氏)는 풍릉 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딸이다. 다음은 원량(元良)으로 영빈(暎嬪) 이씨(李氏)가 낳았는데, 왕후가 즉시 데려다 아들로 삼고 원자로 봉하였다가, 이듬해에 세자로 책봉하였으며, 빈(嬪)은 홍씨(洪氏)로 판서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다. 원량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의소 세손(懿昭世孫)이고 다음은 원손(元孫)에 봉해졌다. 두 군주(郡主)가 있으니 두 왕손(王孫)과 모두 나이가 어리다. 친히 행록(行錄)을 짓고, 인하여 지문(誌文)을 지어서 영원토록 후세에 전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3책 89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42면
- 【분류】왕실(王室) / 인물(人物) / 역사(歷史)
- [註 026]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 [註 027]
기묘 명현(己卯名賢) : 조선 중종(中宗) 14년(1519)에 수구파(守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파(新進派)들이 몰리어 죽거나 귀양간 기묘 사화(己卯士禍) 때 아울러 화를 입은 조신(朝臣)들을 말함.- [註 028]
임신년 : 1692 숙종 18년.- [註 029]
갑신년 : 1704 숙종 30년.- [註 030]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031]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註 032]
경신년 : 1740 영조 16년.- [註 033]
임신년(任申年) : 1752 영조 28년.- [註 034]
병자년 : 1756 영조 32년.- [註 035]
정축년 : 1757 영조 33년.- [註 036]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註 037]
○上親製大行王妃行狀, 其文曰:
后姓徐氏, 本大丘, 高麗少尹閈後孫。 十代祖彌性入我朝, 以子贊成居正勳, 贈達川府院君, 九代祖贈左通禮居廣, 卽居正之兄。 五代祖渻, 文科判中樞府事, 諡忠肅, 宣、仁兩朝名臣。 高祖景需典籤, 贈判書, 曾祖亨履僉正, 贈贊成, 祖文道司評, 贈議政。 考宗悌郡守, 初贈贊成, 又贈右議政, 甲辰予嗣服後, 贈領議政達城府院君, 諡孝僖。 妣岑城府夫人 李氏, 本牛峰。 始祖公靖 高麗三重功臣門下侍中岑城府院君, 諡文景。 八代祖淳, 入我朝, 文科參判, 錄淸白吏。 五代祖世銘贈承旨, 己卯名賢。 考通德郞師昌。 壬申十二月初七日戌時, 生于嘉會坊私第, 甲申行吉禮, 封達城郡夫人, 皇兄元年辛丑, 奉慈敎, 冊封世弟嬪, 甲辰封爲妃。 庚申受號惠敬, 壬申加號莊愼, 丙子加號康宣, 丁丑二月十五日申時, 薨逝于昌德宮之觀理閤, 享年六十有六。 議諡曰貞聖, 同年六月初四日, 藏于高陽 昌陵左罔辛向原, 卽明陵之右麓。 此后姓本世系與始末也。 噫! 后年纔十三, 被我聖考之揀配予, 而最荷恩眷。 每進見也, 必也笑顔而見之, 卽予所親覩也。 愉色婉容, 以事兩殿, 七年侍湯, 長在闕中, 夙夜不懈。 逮于庚子, 弓劍莫攀, 后哀慕轉深, 三年之後, 猶於眞殿之拜, 無一不參。 年已衰而其誠彌篤, 悶我慈聖寶算之益高, 無時進饌, 以奉問寢之節, 不憚衰而冞勤, 且於毓祥宮祭奠, 必誠必恪。 癸酉上諡日, 躬詣展拜, 攀號流涕, 每逢園陵忌辰, 不輟三日之素, 贈領相子孫, 誠心待之。 至於慈愛之心, 至暮如一, 其追思孝心, 言輒淚下, 雖在今番昏沈之時, 其猶眷戀, 勸令善護, 此予所以歎服者。 噫! 予與后, 雖一二年參差, 俱踰六旬, 上奉望八之慈聖, 求諸往牒, 可謂稀矣。 豈意近益衰耗, 元氣一陷, 蔘附罔效? 嗚呼哀哉! 及其入梓宮日, 見一封置者, 卽昔年御札及入闕後賜名者也, 於此可見后恒日追慕之心, 尤可悲也。 然奉長樂承歡之餘, 從容以歸拜于陟降, 后何慼焉? 予於此時, 先卜宅兆, 知陵號用虛右之制, 又何憾焉? 噫! 浮文夸大, 卽非予心, 況於此文, 其豈一字之浮飾焉? 文雖略, 略述后美德。 侍湯焦憫之餘, 少拾心神, 呼寫一篇, 辭簡意盡, 可謂不負后九原之心矣。 予有二男。 長孝章世子, 靖嬪 李氏所誕, 初封敬義君, 元年封世子, 孝純 賢嬪 趙氏, 豐陵府院君 文命女。 次元良, 暎嬪 李氏所誕, 后卽取爲子, 封元子, 翌年封世子, 嬪洪氏, 判書鳳漢女。 有二男, 長懿昭世孫, 次封元孫。 有二郡主, 與二王孫, 皆年幼。 親製行錄, 仍作誌文, 永垂於後。
- 【태백산사고본】 63책 89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42면
- 【분류】왕실(王室) / 인물(人物) / 역사(歷史)
- [註 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