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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62권, 영조 21년 7월 12일 임오 2번째기사 1745년 청 건륭(乾隆) 10년

서얼 허통, 정몽주의 치제, 이존오·정추의 자손 녹용, 무신란의 공신 녹용 등을 논하다

임금이 이조·병조의 당상(堂上)과 각사(各司)의 관원(官員)을 소견(召見)하고 하교하기를,

"오늘 대관(大官)으로부터 겸춘추(兼春秋)에 이르기까지 모두 입시(入侍)하였는데, 겸춘추의 아들이 영의정의 아들보다 나은 자도 있겠으나, 단지 문벌(門閥)의 고하(高下)로 인하여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쓰이지 못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수용되지 못하여 띳집[窮廬]에서 억울함을 품은 자가 많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중인(中人)과 서얼(庶孽) 중에도 역시 양반(兩班)보다 우수한 자가 매우 많은데, 혹은 과제(科第)에 뽑혔어도 저지하고 억제하여 등용하지 않고 있다. 중국(中國)에서는 비록 노예(奴隷)라도 급제하면 한림(翰林)이 되는데, 이는 모두 우리 나라의 규모가 매우 좁아서 그렇게 된 결과이다. 그러나 국조(國朝)의 성헌(成憲)을 가지고 말한다면 중인·서얼과 사부(士夫)를 어찌 혼용(混用)할 수야 있겠는가? 이판(吏判)의 뜻이 공평하고 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런 길이 한번 열리게 되면 장래에 반드시 관방(官方)154) 이 문란해지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와 같이 인견(引見)한 것은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또 옥(玉)이 도리어 돌[石]이 된다고 한 것은 여러 신하들이 직분을 다하지 못함을 비유한 것이고, 돌이 옥이 된다고 한 것은 여러 신하들이 직분을 다하였음을 비유한 것이다. 돌이 옥이 된다고 함은 곧 국가에서 반드시 돌이라 하여 버리지 않는 것이고, 옥이 돌이 된다고 하는 것은 곧 국가에서 옥이라고 하여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賞)을 주는 데 있어서 천하다고 빠뜨리지 않을 것이며, 벌(罰)을 가하는 데 있어서 귀한 사람이라고 피하지 않을 것이니, 여러 신하들은 각별히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고 편당(偏黨)을 버리는 데 힘써서 함께 치세(治世)의 충신이 되어야 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는 바로 해동(海東)에 있어서 도덕(道德)의 종주(宗主)인데, 얼마 전에 선죽교(善竹橋)에서 포충(褒忠)을 한 뒤로 아직까지 치제(致祭)의 거조(擧措)가 없었다. 옛날 주(周)나라 무왕(武王)비간(比干)의 묘(墓)를 봉분(封墳)하였고, 상용(商容)의 여문(閭門)에 경의를 표하였다고 하니, 매우 훌륭한 뜻이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묘에 치제하도록 하라. 또한 옛날에 어제(御製)로 인하여 사현사(四賢祠)를 태학(太學)의 곁에 건립하였는데, 하물며 전조(前朝)의 충신이겠는가? 일찍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보다가 이존오(李存吾)정추(鄭樞)의 충성에 깊이 감탄하였다. 지금 이로 인하여 깨달은 것이 있으니, 그의 자손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녹용(錄用)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국가에서 쓰는 것은 향온(香醞)과 법온(法醞)뿐이고, 백화주(百花酒)나 비방문주(比方文酒)는 더욱 쓸 수 없다. 하우(夏禹)가 단지 의적(儀狄)155) 은 멀리했지만 술을 버리지 못한 것에 대해 나는 마음에 일찍이 개탄하였다. 국가의 흥망(興亡)이 오로지 여기에 관계되는데, 지금 만일 이러한 명목(名目)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후세에 이 명목을 상고하여 이 술을 찾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내자시(內資寺)의 문서(文書) 중에 이 두 가지 술을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이덕중(李德重)이 청하기를,

"무신년의 변란(變亂)156) 때에 청주(淸州)의 효로 장사(效勞將士) 2등 공신(二等功臣) 가운데 제직(除職)할 만한 사람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명단을 적어 장문(狀聞)하게 하여 바로 녹용(錄用)하소서."

하니, 옳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62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87면
  • 【분류】
    인사(人事) / 식생활(食生活)

  • [註 154]
    관방(官方) : 관리의 규율.
  • [註 155]
    의적(儀狄) : 하(夏)나라 때 술을 처음 만든 사람.
  • [註 156]
    무신년의 변란(變亂) : 영조 4년(1728)에 김일경(金一鏡)의 여당(餘黨) 이인좌(李麟佐) 등이 밀풍군 이탄(李坦)을 추대하여 일으킨 병란(兵亂). 곧 이인좌의 난을 가리킴.

○上召見吏、兵曹堂上及各司官員, 敎曰: "今日自大官至兼春秋皆入侍, 兼春秋之子, 亦有勝於領議政之子, 而只因門閥之高下, 才多不用, 能多不收, 多有抱冤窮廬者, 豈不慨然乎? 中、庶亦有優於兩班者甚衆, 而或登科第, 沮抑不用。 中國雖奴隷及第, 則爲翰林, 此莫非我國規模狹隘之致矣。 然如以國朝成憲爲言, 則中、庶、士夫何可混用也? 吏判之意非不公厚, 而此路一開, 則將來必有官方蕩然之弊。 今此引見, 直欲爲此言矣。 且玉反爲石者, 諸臣不盡職之喩也, 石反爲玉者, 諸臣盡職之喩也。 石而爲玉, 則國家必不以石而棄, 玉而爲石, 則國家亦不以玉而貴。 賞不遺賤, 罰不避貴, 諸臣各別盡心國事, 務祛偏黨, 同作治世之忠臣可也。" 又敎曰: "文忠公 鄭夢周, 卽海東道德之宗, 頃者善竹橋褒忠之後, 尙無致祭之擧。 昔周武王, 封比干墓, 式商容閭, 甚盛意也。 其令禮官致祭于墓。 且因昔年御製, 建四賢祠於太學之傍, 況前朝忠臣乎? 曾覽《三綱》, 深歎李存吾鄭樞之忠。 今因此有覺悟者, 其子孫, 令該曹特爲錄用。" 又敎曰: "國家所用, 曰香醞曰法醞而已, 百花酒、比方文酒尤不可矣。 夏禹之只疏儀狄, 而不能去酒, 心嘗慨然。 國家興亡, 專係於此, 今若不祛此名目, 則安知後來不按此名而索此酒乎? 內資文書中, 此二酒去之。" 承旨李德重請: "戊申亂時, 淸州效勞將士二等功臣中, 可合除職者, 令道臣指名狀聞, 卽爲錄用。" 可之。


  • 【태백산사고본】 46책 62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87면
  • 【분류】
    인사(人事) / 식생활(食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