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대신·의금부 당상을 불러 이현필·김성탁·김치후 등의 일을 소결하다
임금이 대신과 금오(金吾)의 여러 당상을 불러 희정당(熙政堂)에서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이현필(李顯弼)·조덕린(趙德隣)·강세윤(姜世胤) 등을 석방하도록 명하고, 김성탁(金聖鐸)은 위리(圍籬)를 철거하여 육지(陸地)로 내보내도록 명하고, 이관후(李觀厚)·목천현(睦天顯)·목성관(睦聖觀)도 육지로 내보내도록 명하였으며, 홍치상(洪致祥)·목지경(睦趾敬)은 복관(復官)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모두 죄가 무거운 사람들이었다. 김치후(金致垕)·이성해(李聖海)·조명리(趙明履)·한억증(韓億增) 등 여러 사람도 혹은 육지로 내보내거나 혹은 양이(量移)했는데, 이는 모두 일을 논한 것 때문에 죄를 얻은 사람들이었다. 의금부 당상이 문안(文案)을 차례로 진달하였는데, 이현필(李顯弼)에 이르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도제조 김흥경(金興慶)이 아뢰기를,
"그가 어찌 감히 성궁(聖躬)을 침핍(侵逼)했겠습니까? 그의 뜻은 오로지 결과(決科)062) 하려는 계책이었던 것입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는 아뢰기를,
"한 말이 더 없이 패리(悖理)하였으나, 처분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는 아뢰기를,
"그가 무상(無狀)하기는 하지만, 국가의 처분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한 50년쯤 지난 뒤에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현필은 국가를 위하여 곧은 말을 했다가 죄를 얻었다.’라고 한다면, 어찌 성덕에 누(累)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김재로는 아뢰기를,
"후세에 그 일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지 못하고 의논하는 사람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반유(泮儒)들이 권당(捲堂)한 것에 동요받아 부억(扶抑)할 뜻이 있었으므로, 한 번 처분을 내리려고 하여 마음속으로 요량한 바가 있었다."
하고, 특별히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김성탁의 일에 이르러 김재로가 아뢰기를,
"매우 중대한 데에 관계되니, 어찌 경솔하게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듣건대, 그에게는 늙은 어미가 있다고 하니, 긍측(矜惻)한 마음이 있습니다."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이현일(李玄逸)의 일에 대해 그가 반드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듣건대, 그의 늙은 어미가 매양 해를 향하여 하늘에 빈다고 하니, 정리(情理)가 가긍(可矜)합니다."
하고, 판의금부사 조상경(趙尙絅)은 아뢰기를,
"만약 모자(母子)로 하여금 서로 만나 보게 한다면 어찌 인정(仁政)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박문수는 아뢰기를,
"나학천(羅學川)이 이현일을 위해 복관(復官)시킬 것을 청했었는데, 나학천은 승지가 되고 참의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동일한 이현일인데, 나학천이 말하면 벼슬을 주었고, 김성탁이 말하면 형벌을 베풀고 귀양을 보냈습니다. 만약에 김재로의 말대로라면 반드시 나학천의 벼슬을 추탈(追奪)한 뒤에야 국법(國法)이 행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김재로가 아뢰기를,
"박문수가 한 말은 사리에 어긋난 말입니다. 김성탁이 이미 죽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학천을 죄 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이현일에 대한 문안(文案)을 보았더니, 계유년063) 에 민암(閔黯)과 이의징(李義徵)이 이현일을 사주하고 부탁하여 적서(嫡庶)의 구분을 밝히도록 하였으나, 그때 이미 저위(儲位)가 정해져 있었는데, 무슨 적서에 대해 밝힐 만한 것이 있었겠는가? 이 말은 매우 통탄스러운 것이어서 이관후(李觀厚)의 문안과 견줄 것이 아니었는데, 김성탁이 어찌 이를 알았겠는가? 그가 말하기를, ‘어미가 있으므로 살기를 바란다.’라고 했고, 또한 ‘이현일에 있어서는 증거가 없다.’라고 했었으므로, 단지 한 차례만 형벌을 베풀었을 따름이었다. 왕자(王者)는 효도(孝道)로써 나라를 다스려 가는 것이다."
하고, 특별히 위리(圍籬)를 철거하고 육지로 내보내도록 명하였다. 김치후에 이르러 임금이 이르기를,
"이관후는 대각(臺閣)에 들어와서 과감하게 말하였고, 김성탁은 스승을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니, 오히려 용서할 도리가 있다. 그러나 김치후와 같은 자는 오로지 시상(時象)을 위해 말하였으니, 용서할 수가 없다."
하자, 조상경이 아뢰기를,
"김치후 또한 늙은 어미가 있으니, 효도(孝道)로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서 서로 만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은 조명리(趙明履)에게는 죄가 있지만 세 사람은 죄가 없다고 여깁니다. 김치후의 죄는 당습에 불과하니 유독 참작하는 은전(恩典)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신의 마음이 불평할 것이며, 여러 신하들 또한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고, 박문수는 아뢰기를,
"우상의 말대로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시상이 겹쳐서 격렬해질 것입니다. 만약 이번에 석방하지 않는다면 소결(疏決)하는 사체가 아닐 것입니다."
하고, 동지의금부사 박사수(朴師洙)는 아뢰기를,
"이성해(李聖海)의 일은 사람들이 모두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김치후와 이성해는 육지로 내보내고, 조명리와 한억증은 양이(量移)하도록 명하였다. 조상경이 아뢰기를,
"홍치상(洪致祥)의 손자 홍익종(洪益宗)이 상언(上言)하자, 저번에, ‘등대(登對)하여 진품(陳稟)토록 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송인명이 아뢰기를,
"홍치상은 갑술년064) 에 복관(復官)되었다가 임오년065) 에 고 상신(相臣) 조태구(趙泰耉)의 상소로 인해 추탈(追奪)되었습니다. 이사명(李師命)이 이미 복관되었는데 홍치상만 유독 복관되지 않았으니, 어찌 도치(倒置)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죄명(罪名)이 분명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처분을 내리셔야 합니다."
하였는데, 박문수가 아뢰기를,
"신이 이 집안의 일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홍치상의 아들 홍태유(洪泰猷)는 진실로 세상에 드문 선인(善人)이었는데, 가화(家禍)를 만난 이후로 천지 사이의 죄인으로 자처(自處)하여 매우 많은 가산(家産)을 분토(糞土)처럼 여기고, 초려(草廬)에서 거적 자리로 그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의 비애(悲哀)와 고통을 곁에서 본 사람들이 그를 위해 불쌍하고도 가련하게 여겼습니다. 그가 계모(繼母)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므로, 고 상신 조문명(趙文命)과 이덕수(李德壽)가 모두 사모하여 교분(交分)을 맺었었으니, 그의 사람됨을 알 만합니다. 홍치상의 죄는 복상(卜相)과 성자(姓字)의 두 가지 일에 있는데, 복상에 관한 일은 그 언근(言根)이 이미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습니다. 성자에 관한 일 한 가지에 이르러서는 모두 벽성(僻姓)이었고 ‘홍(洪)’ 자도 그 가운데 들어 있었으니, 어찌 자기의 성을 아울러 그 가운데 써 넣을 리 있겠습니까? 홍치상은 귀주(貴主)의 한 아들로 효묘(孝廟)의 외손이었으니 교만한 습성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교만하고 망령되고 경솔할 뿐이며, 남에게 기만당한 것에 불과 한 것이었지만, 일단 국옥(鞫獄)에 들어가서 불행하게도 질투하여 미워하는 사람이 당국(當國)한 때를 만났었으니, 어떻게 죽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초 갑술년066) 에 숙묘(肅廟)께서 특별히 그의 관작을 회복하게 했었으니, 이는 의친(議親)과 수목(修睦)하는 성덕(聖德)이었는데, 조태구(趙泰耉)의 상소로 인해 마침내 추탈(追奪)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언근(言根)을 낸 사람도 이미 복관(復官)되었는데, 홍치상에게 복관을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영성(靈城)의 말을 들어보건대, 홍치상은 교만하고 안일하게 생장(生長)한 소치에 불과하고, 효묘의 외손 혈속(血屬)으로 단지 이 집안이 있을 뿐이니, 여러 신하들이 이의(異議)가 없다면 특별히 복관시키도록 윤허하겠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홍치상을 이미 복관시키도록 하셨습니다. 그의 아들 홍태유(洪泰猷)의 효행(孝行)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니 정문(旌門)을 세워 포양(褒揚)하게 하는 은전(恩典)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이어 아뢰기를,
"경술년067) 옥사(獄事)에 목천현(睦天顯) 부자가 연좌(連坐)되어 귀양간 것은 원통한 일입니다."
하니, 양이(量移)하도록 명하였다. 송인명이 또 목지경(睦趾敬)의 원통함을 진달했는데, 대개 그의 아들이 바야흐로 아버지를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무신년의 옥사(獄事)에 대해서는 내가 관대하였으나, 경술년에는 너무 준엄하게 했었다."
하자, 박문수가 아뢰기를,
"경술년 옥사도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목지경·심유의(沈游義)·권세장(權世長)이 모두 동일한 일에 연좌되었는데, 심유의는 복관(復官)되고 권세장은 석방되었지만, 유독 목지경은 아직도 단서(丹書)에 남아 있습니다. 또 노미(老味)가 속여서 공술(供述)한, ‘원곡(院谷)에 모였었다.’는 날은 곧 목지경이 엄경우(嚴慶遇)의 잔치에 갔던 날입니다. 엄경우의 아우 엄경하(嚴慶遐)가 승선(承宣)으로서 바야흐로 입시(入侍)했으니, 분명한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엄경하가 아뢰기를,
"신의 형의 수연(壽宴) 자리에 목지경과 함께 같이 모여서 시를 지으며 단란하게 밤을 새웠습니다. 그 날이 속여서 공술한 모였다는 날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는 분명한 증거이다. 권세장은 생존해 있기 때문에 전석(全釋)했지만,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도 없는데, 하물며 형장 아래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겠는가? 목지경과 심유의는 이동(異同)이 있을 수 없으니 일체로 복관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47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95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인사(人事) / 인물(人物) / 정론(政論) / 가족(家族)
- [註 062]결과(決科) : 과거에 오름.
- [註 063]
계유년 : 1693 숙종 19년.- [註 064]
갑술년 : 1694 숙종 20년.- [註 065]
○癸酉/上召大臣及金吾諸堂, 行疏決于熙政堂。 命放李顯弼、趙德隣、姜世胤等, 命金聖鐸撤籬出睦, 李觀厚、陸天顯、睦聖觀出陸, 命復洪致祥、睦趾敬官, 皆重罪者也。 金致垕、李聖海、趙明履、韓億增諸人亦或出陸或量移, 皆以言獲罪者也。 禁堂歷陳文案, 至李顯弼, 上詢于諸臣, 都提調金興慶曰: "渠豈敢侵逼聖躬? 其意專欲爲決科之計也。" 判府事金在魯曰: "遣辭絶悖, 而處分太重矣。" 兵曹判書朴文秀曰: "其人則無狀, 而國家處分太過。 差過五十年後, 人皆曰顯弼爲國家, 直言而獲罪, 則豈不有累於聖德乎?" 在魯曰: "後世不知其事之如何, 恐有議之者矣。" 上曰: "予動於泮儒之捲堂, 有扶抑之意, 故欲一處分, 心有所量矣。" 特命放之。 至金聖鐸事, 在魯曰: "關係甚重, 豈可輕議? 第聞渠有老母, 不無矜惻之心矣。" 右議政宋寅明曰: "李玄逸事, 渠必不知。 聞其老母每向日祝天云, 情理可矜。" 判義禁趙尙絅曰: "若使母子相見, 則豈非仁政耶?" 文秀曰: "羅學川爲玄逸請復官, 而學川爲承旨、參議。 一玄逸也, 而學川言之則爵之, 聖鐸言之則刑之竄之。 若如金在魯之言, 則必追奪學川而後國法可行矣。" 在魯曰: "朴文秀之言, 不成說矣。 聖鐸旣不死, 豈可罪學川乎?" 上曰: "予見玄逸文案, 則癸酉年黯、義徵嗾囑玄逸, 明嫡庶之分, 其時儲位已定, 則有何嫡庶之可明耶? 此言甚痛惋, 非比觀厚之文, 而聖鐸豈知此乎? 渠言有母願活, 且稱玄逸無據, 故只刑一次耳。 王者以孝爲治。" 特命撤籬出陸。 至金致垕, 上曰: "觀厚入臺敢言, 聖鐸爲師訟冤, 猶有容恕之道, 而如致垕者, 專爲時象, 不可貸矣。" 尙絅曰: "致垕亦有老母, 在孝理, 宜令相見。" 寅明曰: "臣以爲明履則有罪, 而三人無罪矣。 致垕之罪, 不過黨習, 獨不用參酌之典, 則於臣心不平, 諸臣亦豈不然乎?" 文秀曰: "不聽右相之言, 則時象當層激, 今若不放, 非疏決之體也。" 同義禁朴師洙曰: "李聖海事, 人皆以爲過矣。" 上命金致垕、李聖海出陸, 趙明履、韓億增量移。 尙絅奏曰: "洪致祥之孫益宗上言, 頃有登對陳稟之敎矣。" 寅明曰: "致祥於甲戌年復官, 而壬午年, 因故相臣趙泰耉上疏追奪矣。 李師命旣復官, 而洪致祥獨不復官, 豈不倒置乎?" 上詢于大臣, 諸臣皆謂罪名不明, 宜賜處分。 文秀曰: "臣詳知此家事。 洪致祥子泰猷, 實稀世之善人也。 自遭家禍以來, 自處以天地間罪人, 家財甚鉅, 視若糞土, 草廬苫席, 以終其生, 悲哀痛苦, 傍觀爲之傷憐, 事繼母極孝。 故相臣趙文命及李德壽皆慕而結交, 其人可知矣。 致祥之罪, 在於卜相、姓字兩事, 而卜相言根, 已歸他人, 至於姓字一事, 皆是僻姓, 洪字亦入其中, 寧有以自己姓, 幷書其中之理乎? 致祥以貴主之一子, 爲孝廟之外孫, 難保其無驕蹇之習矣。 一言而蔽之曰驕蹇妄率而已, 不過見瞞於人, 而一入鞫獄, 不幸値妬嫉人當國, 安得不死乎? 甲戌初肅廟特復其官, 此議親修睦之聖德也。 因趙泰耉疏, 終至追奪, 言根之人旣已復官, 則致祥之不許復官, 豈不冤乎?" 上曰: "今聞靈城言, 致祥不過生長驕逸之致。 孝廟外裔血屬, 只有此家, 諸臣無異議, 特許復官。" 寅明曰: "洪致祥旣令復官, 則其子泰猷之孝行, 擧世所知, 不可無旌褒之典。" 寅明仍言庚戌獄, 睦天顯父子坐謫之冤, 命量移。 寅明又陳睦趾敬之冤, 蓋其子方爲父訟冤故也。 上曰: "戊申獄, 予緩之而庚戌太峻矣。" 文秀曰: "庚戌獄人, 多稱冤矣。 睦趾敬、沈游義、權世長同坐一事, 而游義復官, 世長蒙放, 獨趾敬尙在丹書矣。 且老味誣招所稱院谷聚會之日, 卽趾敬赴嚴慶遇宴席之日也。 慶遇之弟慶遐以承宣方入侍, 可謂明證。" 慶遐曰: "臣兄壽席, 與趾敬同會賦詩, 達宵團欒。 其日果是誣招所稱聚會之日也。" 上曰: "然則此爲明證也。 權世長則生存, 故全釋而死者不可復生, 況枉死於桁楊之下者乎? 睦趾敬與沈游義不可異同, 一體復官。"
- 【태백산사고본】 35책 47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95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인사(人事) / 인물(人物) / 정론(政論) / 가족(家族)
- [註 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