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인을 논하다. 김세연·이형수·남윤관·박건을 처벌하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조가(朝家)에서 영남(嶺南) 사람을 대우하는 것을 다른 도와 다르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만약 구별을 둔다면 어찌 형적(形迹)의 다름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어찌 합천(陜川)에 정희량(鄭希亮)이 있었다고 하여 합천 사람을 모두 버릴 것인가? 지금 한낱 김성탁(金聖鐸) 때문에 영남 사람을 모두 배척한다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영남의 풍속이 벌써 한층 변하였습니다. 옛날의 경우는 모두 남인(南人)이었는데, 지금은 그 중에 더러 갈리어 나가 다른 자가 있으니, 비록 이름은 남인이라고 하나 기사년179) 의 일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세우는 자도 있었고, 비록 본래는 명류(名流)라고 일컬었으나 무신년180) 난역에 동참한 자도 있었으며, 또 더러는 함께 기사년의 일을 미워하여 무신년 난역에 들어가지 않은 자도 있었으니, 지금 한낱 김성탁 때문에 영남 사람 전부를 그르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옛부터 영남에 이름난 사람이 배출(輩出)되고 인재(人材)가 부쩍 일어났는데, 지금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몰라서 그럴 것이다. 재주는 다른 세대에서 빌려 오지 못하는 것이니, 지금인들 어찌 전혀 인재가 없겠는가? 침체(沈滯)된 정치를 소통시켜서 상하가 서로 힘쓰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좌도(左道)는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살았기 때문에 삼가고 신칙(申飭)하는 기풍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우도(右道)는 조식(曹植)이 살았기 때문에 기절(氣節)을 숭상하는 풍습이 도리어 유폐(流弊)가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유신(儒臣)들이 늘 유학(儒學)의 설(說)을 진달하지만, 나는 항상 그 말류(末流)의 폐단을 염려한다. 조식은 기절이 높지 않음이 아니며 자품(姿品)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나, 말류의 폐단이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지금의 유학이겠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과연 그런 폐단이 있었으니, 정인홍(鄭仁弘) 역시 조식의 제자입니다."
하였다. 장령(掌令) 권현(權賢)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요즈음 관방(官方)181) 이 외잡(猥雜)하니,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 김세연(金世衍)의 미치광스럽고 혼미함과,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 이형수(李衡秀)의 용렬하고 비루함 같은 것으로 사로(仕路)에 결점이 되거나 더럽힐 수 없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그리고 해유(解由)182) 로 월등(越等)183) 하는 것은 곧 금석(金石)의 법전인데, 울진 현령(蔚珍縣令) 남윤관(南胤寬)이 본자리를 선망(羨望)하고 은밀히 촉탁하여 〈외임(外任)으로〉 나갈 것을 도모하였으니, 청컨대, 잡아다 문초하도록 하고, 호조 낭관(戶曹郞官) 역시 파직(罷職)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평해 군수(平海郡守) 박건(朴鍵)은 일찍이 영장(營將)으로 재임 중 부모의 나이를 끌어올려서 체임(遞任)을 도모하였고, 본군에 제수됨에 미쳐서는 그의 아비가 그의 형 박횡(朴鐄)의 삼화(三和) 임소(任所)에 있어서 멀기가 천리일 뿐만이 아닌데, 염연(厭然)히 가리고 숨겼으니, 청컨대 파직하도록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5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변란-정변(政變) / 사법-탄핵(彈劾) / 정론-간쟁(諫諍) / 사상-유학(儒學) / 인사-관리(管理)
- [註 179]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180]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181]
관방(官方) : 관리가 지켜야 할 규율.- [註 182]
해유(解由) : 관원들이 전직(轉職)할 때 재직(在職) 중의 회계 물품 출납에 대한 책임을 해제받던 일. 인수 인계가 끝나고 호조나 병조에 보고하여 이상이 없으면 이조에 통지하여 해유 문자(解由文字)를 발급하였음.- [註 183]
월등(越等) : 공무상 과오를 범한 경우의 감봉(減俸) 처분. 봉급의 10분의 1을 감봉할 때에는 월1등(越一等), 2를 감봉할 때에는 월2등이라 하며, 8등을 초과하지 못함.○引見大臣備堂。 左議政金在魯曰: "朝家之待嶺人, 不宜與他道異同, 而若有區別, 豈無形迹之異耶?" 上曰: "卿言是矣。 豈可以陜川之有希亮, 盡棄陜川之人乎? 今以一聖鐸, 盡冒嶺人, 則豈可乎?" 兵曹判書閔應洙曰: "嶺俗已變一層矣。 古則皆南人, 而今則其中或有岐異者, 雖名爲南人, 而有立異於己巳者; 雖素稱名流, 而有同參於戊申者。 且或有同惡己巳之事, 而不入於戊申之逆者。 今不可以一聖鐸, 全非嶺人矣。" 在魯曰: "自古嶺南名人輩出, 人材蔚興, 今則無聞矣。" 上曰: "朝廷不知也。 才不借於異代, 今豈全無人耶? 疏通沈滯之政, 上下可相勉矣。" 在魯曰: "左道則先正臣李滉所居, 故謹飭之風, 至今存焉。 右道則曺植所居, 故尙氣節之習, 反爲流弊矣。" 上曰: "近來儒臣, 每陳儒學之說, 而予則每慮其末流之弊矣。 曺植氣節非不高矣, 姿品非不美矣, 而末弊尙如此, 況今之儒學乎?" 在魯曰: "果有其弊, 鄭仁弘亦曺植之弟子也。" 掌令權賢申前啓, 不允。 又啓: "近來官方猥雜, 如尙衣僉正金世衍之狂謎, 典設別提李衡秀之庸鄙, 不可玷汚仕路, 請汰去。 解由越等, 卽金石之典, 蔚珍縣令南胤寬朶頤本窠, 密囑圖出, 請拿問, 戶郞亦宜罷職。 平海郡守朴鍵曾任營將, 引親年圖遞, 及除本郡, 其父在其兄鐄 三和任所, 不啻千里, 而厭然掩諱, 請罷職。" 竝從之。
- 【태백산사고본】 33책 44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5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변란-정변(政變) / 사법-탄핵(彈劾) / 정론-간쟁(諫諍) / 사상-유학(儒學) / 인사-관리(管理)
- [註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