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묘에 나아가 전알하고 난 후 기로소의 영수각에 들르다
임금이 사친(私親)인 숙빈묘(淑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대가(大駕)가 돌아오다가 길 왼쪽의 고각(高閣)을 바라보고 하문하니 바로 기로소(耆老所)의 영수각(靈壽閣)이었으므로, 마침내 둘러보도록 명하였다.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가 동구(洞口)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임금이 기로소 대청(大廳)에 나아가니, 시임·원임 대신 및 여러 승지와 옥당(玉堂)의 간원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영수각에 배례(拜禮)하는 것이 적합한가를 물었는데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귀일되지 않자, 임금이 말하기를,
"종부시(宗簿寺)의 선원각(璿源閣)에는 숙배(肅拜)하는 예절이 있는데, 이 각(閣)에는 어첩(御帖)을 봉안(奉安)하였으니 배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협문(夾門)을 거쳐 들어가 영수각 뜰에서 네 번 절하였으며, 여러 신하들도 네 번 절하였다. 임금이 각(閣) 안의 앞 마루에 앉아 어첩궤(御帖櫃)를 받들고 나오도록 명하니, 민진원·이태좌가 기로소 신하로서 각 안에 서 있었다. 임금이 어첩을 꺼내어 공경히 구경하고는 부복(俯伏)하여 감격한 눈물을 흘리며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선조(先祖)께서 기해년104) 에 ‘태조(太祖)의 성대한 자취가 장차 없어지게 되었다.’는 말에 감동함이 있어 즉시 여러 사람의 청을 윤허하였고, 나도 일찍이 옛날의 제왕(帝王)이 오래 살기를 탐하여 장수(長壽)하려는 것을 비웃은 바 있는데, 만약 양조(兩朝)의 고사(故事)를 능히 이어서 원량(元良)이 경종[景廟]을 계승하여 어첩에 쓴다면 영광스럽고 다행함이 극도에 이르겠다."
하니,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의 오래도록 국명(國命)을 누리는 도리로 권면(勸勉)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도로 기로소 대청에 나아가 기해년의 기로소 경회첩[耆社慶會帖]을 가져다 열람하다가 어첩의 첫머리에 숙종[肅廟]의 어제 칠률(御製七律)이 있는 것을 보고 슬픈 감정에 오래도록 잠겨 있다가 사관(史官) 이성중(李成中)에게 명하여 이를 베껴서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 《기로소선생안[耆社先生案]》을 열람하고 인해서 전교하기를,
"기로소 신하들에게 내일 편전(便殿)에서 선온(宣醞)할 것이니, 기로 대신 가운데서 아들이 시종(侍從)을 거친 자가 있으면 각기 아들 한 사람을 데리고 입시(入侍)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1책 41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97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비빈(妃嬪) / 왕실-비빈(妃嬪) / 왕실-사급(賜給)
- [註 104]기해년 : 1719 숙종 45년.
○壬子/上詣私親淑嬪廟展謁。 駕回, 望路左高閣問之, 乃耆老所靈壽閣也, 遂命歷瞻。 奉朝賀閔鎭遠、判府事李台佐祇迎洞口。 上御耆社大廳, 時, 原任大臣及諸承旨玉堂入侍。 上問靈壽閣當拜耶, 諸臣議不一, 上曰: "宗簿寺璿源閣有肅拜之禮, 是閣奉御帖, 不可不拜。" 由夾門入, 行四拜於閣庭, 諸臣亦四拜。 上坐閣內前軒, 命奉出御帖櫃, 鎭遠、台佐以耆社臣, 立於閣內。 上出帖敬玩, 俯伏感涕, 語諸臣曰: "先朝於己亥, 有感於太祖盛迹將泯之語, 而卽允群請, 予嘗笑古帝王之貪生引年, 而若能追踵兩朝故事, 元良繼景廟而寫帖, 則榮幸極矣。" 右議政宋寅明以《無逸》永年之道勉之, 上嘉納。 還御大廳, 取閱己亥耆社慶會帖, 見帖首有肅廟御製七律, 愴然久之, 命史官李成中寫進, 又閱耆社先生案, 仍敎曰: "耆社臣明日當宣醞於便殿, 耆老大臣中, 有子經侍從者, 各率一子入侍。"
- 【태백산사고본】 31책 41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97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비빈(妃嬪) / 왕실-비빈(妃嬪) / 왕실-사급(賜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