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돌아온 진주사 세 사신을 인견하다
임금이 〈중국에서〉 돌아온 진주사(陳奏使) 세 사신을 인견(引見)하였다. 정사(正使)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저들이 말하기를, ‘본국(本國)으로 하여금 율(律)을 의논하게 한 것은 곧 그대 나라를 대우하려는 도리이다. 일찍이 별사(別使)를 파견하지 말도록 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왔는가?’라고 하였으니, 율을 의논한 뒤에 다만 재자관(䝴咨官)만 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부사(副使) 박문수(朴文秀)는 말하기를,
"청나라 황제의 사람됨은 성현(聖賢)으로 자처(自處)하면서도 가혹한 정치를 많이 행하여 강희 황제(康熙皇帝)004) 때의 옛 신하들 가운데 죽은 자가 수백 인입니다. 오성 어사(五星御史)를 두어 비밀히 조정의 신하들을 사찰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으며, 돈을 모으는 데에 골몰하여 원성(怨聲)이 길거리에 가득 찼습니다. 나이가 60세에 가까운데도 태자(太子)를 세우지 아니하였으니, 그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장차 우리 나라의 근심이 될 것인데, 지금 서로(西路)는 하나의 풍류(風流)를 즐기는 난장판을 이루어 방어의 도리가 허술하여 믿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즐겁게 놀아 보지 않았는가?"
하자,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은 권적(權𥛚)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감히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만리(萬里)의 사신 행역(行役)에 옛 습관을 버리지 않았으니, 진실로 가상하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고(故) 병사(兵使) 정봉수(鄭鳳壽)와 의병장(義兵將) 이입(李立)이 정묘년005) 의 호란(胡亂)을 당하여 용골산성(龍骨山城)에 들어가서 장사준(張士俊)을 목베고, 수천 명의 잔약한 병사로써 수만 명의 오랑캐를 공격하여 죽였으므로, 황해도와 평안도의 양서(兩西) 지방이 그에게 힘입어서 편안하였습니다. 명(明)나라에서도 또한 그 공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명하여 관직을 제수하였는데, 그 은패(銀牌)와 표문(票文)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성상의 예람(睿覽)에 대비하고자 하여 삼가 이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고, 이어서 그것을 바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은패와 인문(印文)을 보니, 명나라 도독부(都督府)에서 찍은 인장(印章)이다. 생각지도 않게 오늘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다시 보게 되었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고, 남이흥(南以興)의 충민사(忠愍祠)에도 또한 일체로 사제(賜祭)하도록 하라."
하고, 그 후손들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40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64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외교-야(野) / 인사(人事) / 풍속-예속(禮俗)
○甲戌/上引見回還陳奏三使臣。 正使徐命均曰: "彼言: ‘使本國議律, 乃待汝國之道也。 曾令勿遣別使, 今何來耶?’ 議律後, 只送齎咨官爲宜矣。" 副使朴文秀言: "淸皇爲人, 自聖多苛刻之政, 康熙舊臣, 死者數百人。 置五星御史, 譏察朝臣, 故人皆惴惴, 殖貨無厭, 怨聲載路。 年近六十, 不立太子, 其勢不久。 然則將爲我憂, 而卽今西路, 作一風流場, 防守之道, 蕩然無可恃, 此誠慨然。" 上曰: "卿則能不盤遊乎?" 文秀曰: "臣畏權𥛚, 故未敢耳。" 上笑曰: "萬里行役, 舊習不除, 良可喜也。" 文秀曰: "故兵使鄭鳳壽、義兵將李立,丁卯亂, 入龍骨山城, 斬張士俊, 以數千殘兵, 擊殺數萬胡, 兩西賴以奠安。 皇明亦嘉其功, 特命除職, 其銀牌票文猶存, 故爲備睿覽, 謹此齎來。" 仍進之, 上曰: "今觀銀牌、印文, 乃皇朝督府之所印也。 不圖今日復見漢官威儀。 令本道致祭南以興 忠愍祠亦一體賜祭。" 命錄用其後。
- 【태백산사고본】 30책 40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64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외교-야(野) / 인사(人事) / 풍속-예속(禮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