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성정에 대해 검토관 조상명이 건의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상명(趙尙命)이 말하기를,
"어제는 하나의 작은 일로 인하여 갑자기 너무나도 비상한 하교를 내리셨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모두 허둥지둥 물러났으니, 참으로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무릇 대신(大臣)이란 체국(體國)하는 신하입니다. 재신(宰臣)이 아뢴 바는 국체(國體)를 존중하자는 듯에 불과하였으니, 어지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가벼이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엄교(嚴敎)가 준절(峻截)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의 마음에 싹틀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윽이 보건대 전하께서는 조금만 격뇌(激惱)하면 더러 말을 가리지 않고 하시니, 신(臣)이 항상 개연(慨然)해 하였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예(禮)를 행하는 데 화평함이 귀중하다.’ 했으니, 삼가 원하건대, 이제부터 사기(辭氣)의 사이에 화평(和平)에 더욱 힘쓰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본사(本事)에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른바 종신(宗臣)을 제재하고 억누른다는 것은 권세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세묘조(世廟朝) 이래로 종신들은 권세가 없이, 다만 종친부(宗親府)에 의지하는데, 종신들의 영체(零替)가 근래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비록 세력을 부리고자 하나 그 누가 받아 주겠는가? 오늘의 일이 만약 대신을 가볍게 업신여긴 데서 나왔다면 논할 것도 없다. 하지만 먼 종친이 왕자(王子)의 관아에 대신 거처하고 있는데 여러 신하들이 만약 ‘지금 왕자가 없다.’고 이른다면, 그 아래 종반(宗班)들은 정부(政府)의 하리(下吏)를 가두어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정부에 대신은 없고 다만 참찬(參贊)만 있을 경우 타사(他司)에서 또한 그 서리를 추치(推治)하는데도 장차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내가 대신들을 그르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뜻을 둔 바가 있어서이다. 박문수(朴文秀)는 비당(備堂)으로서 입시(入侍)하였으니, 이미 자기 직사(職事)가 아니었고 월조(越俎)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이 이미 상해 있었으므로 저절로 촉발되었던 것이다.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느냐?"
하였다.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칠정(七情) 가운데 오직 노여움을 제어하기 어렵다.’고 한 것은 보통 사람을 지적해 말한 것인데, 성상(聖上)의 학문으로 사령(辭令)의 화평함을 잃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개연(慨然)하지 않겠습니까? 설사 노할 만한 일이 있다하더라도 오직 조용하게 효유(曉諭)하여 성의(聖意)를 열어 보여야만 바야흐로 사물(事物)이 와서 순응하는 도리에 합치될 것입니다. 무릇 대신이란 전하(殿下)의 고굉(股肱)입니다. 비록 인주(人主)의 존귀함으로서도 추고(推考)의 벌(罰)을 베풀 수 없는 것은 국체(國體)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왕자(王子)·대군(大君)이라도 부리(府吏)를 잡아 가둘 수 없는데, 더욱이 해춘군(海春君)은 2품의 종재(宗宰)로서 대신에게 화를 내고 부리(府吏)를 가두었으니, 이는 참으로 전에 없었던 괴이한 행동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아뢴 바에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엄교(嚴敎)에 심지어 신하로서 감히 듣지 못할 말이 있었으니, 이는 참으로 함양의 공부가 아직 미진해 그런 것입니다. 원하건대 더욱 뜻을 두소서. 종재에 이르러서는 끝내 망령된 실착을 면하지 못했으니 책벌(責罰)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번저(藩邸)에서 입승(入承)하여 궁중(宮中)에서 생장(生長)하였으므로 일찍이 예(禮)를 읽지 못하였고, 다만 조종조(祖宗朝)의 예법(禮法)을 따랐을 뿐이다. 일찍이 경자년575) 대상(大喪) 뒤에 전도(前導) 없이 대궐로 가다가 길에서 대신(大臣)을 만났는데, 앞에 있으면서 끝내 길을 비키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뒤따라 가지 않으려고 피하여 다른 길로 갔었다. 내가 왕자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았다. 돌아보건대 지금 나라에 저사(儲嗣)가 없고 종실(宗室)은 고단(孤單)하여 세력을 부릴 만한 기운이 없는데 또 제재하고 억누르고자 하니, 내가 붙들어 주지 않으면 누가 다시 돌아보겠는가? 선묘(宣廟)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이 꽃이 피고난 뒤에는 다시 꽃이 없다’ 하였으니, 매번 이 하교를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자연히 평안치 않았다. 내가 해흥군(海興君)의 잘못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홍 경보(洪景輔)가 말하기를,
"사기(辭氣)가 마땅히 이와 같아서는 아니됩니다. ‘홍의(弘毅)’ 두 글자로 앙면(仰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의(弘毅)에 대한 공부가 나에게 과연 부족하다. 그러나 매번 ‘삼종(三宗)의 부탁(付托)’을 생각하면 비록 힘쓰고자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명겸(趙明謙)이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3백 년 동안 덕(德)을 쌓았는데 어찌 식보(食報)의 이치가 없겠습니까? 전하게서 진실로 마음을 넓히시고 화평(和平)을 잃지 않으신다면 곧 상서로운 길조(吉兆)가 저절로 이르게 될 것인데, 매번 마음이 괴롭다는 하교를 내리시어 군신(君臣)이 서로 마주 대하고 흐느끼니, 이것이 어찌 좋은 기상(氣象)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자못 가납(嘉納)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8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사법(司法) / 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註 575]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上行晝講。 檢討官趙尙命曰: "日昨因一微事, 遽下萬萬非常之敎, 諸臣皆蒼黃逬出, 誠不勝愕然。 夫大臣卽體國之臣, 宰臣所奏, 不過尊國體之意, 何敢有一毫輕侮之心, 而嚴敎峻截, 此豈臣下之所可萠諸心者哉? 竊瞷殿下少有激惱, 言多不擇, 臣常慨然。 《傳》曰: ‘禮之用, 和爲貴。’ 伏願自今辭氣之間, 務盡和平焉。" 上曰: "予於本事, 非有他意也。 所謂裁抑宗臣者, 謂有權勢也。 自世廟朝以來, 宗臣無權勢, 只以宗親府藉重, 而宗臣零替, 未有甚於近日。 雖欲怙勢, 其誰受乎? 今日事, 若出於輕侮大臣, 無可論矣。 遠宗替居王子之府, 諸臣若謂今無王子, 則其下宗班, 不可囚治政府吏。 假令政府無大臣, 而只有參贊, 他司亦可推治其吏, 而抑將安而受之乎? 予非以大臣爲非也. 意有在焉。 朴文秀以備堂入侍, 旣非職事, 近於越俎。 予之方寸已傷, 自然觸發, 豈有他意?" 知事金東弼曰: "七情之中, 惟怒難制, 卽指常人而言, 以聖上之學問, 辭令之失平如此, 豈不慨然乎? 設有可怒之事, 惟當從容曉諭, 開示聖意, 方合於物來順應之道。 夫大臣卽殿下之股肱, 雖以人主之尊, 不得施推考之罰者, 所以尊國體也。 雖王子大君, 不可捉囚府吏, 況海春以二品宗宰, 發怒於大臣, 囚其府吏, 此實無前之怪擧。 諸臣所奏, 豈有他意, 而嚴敎至有臣子不敢聞者, 此實涵養之工未盡而然, 惟願加意。 至於宗宰, 終未免妄着, 不可無責罰。" 上曰: "予自藩邸入承, 而生長宮中, 未嘗讀禮, 只遵祖宗朝禮法而已。 曾於庚子大喪後, 無前導而赴闕, 路遇大臣, 在前終不讓路, 故予不欲隨後而行, 避從他路, 予以王子, 猶爲如此矣。 顧今國無儲嗣, 宗室孤弱, 無怙勢之氣, 而又欲裁抑, 予不扶植, 誰復顧藉耶? 宣廟嘗曰: ‘此花開後更無花。’ 每念此敎, 心懷自然不平矣。 予非不知海興之失也。" 參贊官洪景輔言: "辭氣不當如此。 以弘毅二字仰勉。" 上曰: "弘毅之工, 予果不足, 而每念三宗付托, 雖欲勉之, 不可得也。" 檢討官趙明謙曰: "祖宗朝三百年積德, 豈無食報之理乎? 殿下苟能寬懷, 不失和平, 則禎祥自臻, 而每下疚心之敎, 君臣相對涕泣, 是豈好氣象耶?" 上頗嘉納之。
-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8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사법(司法) / 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