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감진 어사 이종백 등이 연해 고을의 재해가 심하다고 대동미와 군포를 감하기를 청하다
영남의 감진 어사(監賑御史) 이종백(李宗白)이 도신(道臣)과 연명(聯名)으로 아뢰기를,
"바다 연안 지역 아홉 고을이 재해(災害)를 더욱 많이 입었으니, 청컨대 조정의 명령으로 대동미(大同米)를 매결(每結)마다 두 말씩, 그리고 기병(騎兵)·보병(步兵)의 군포(軍布)를 3분의 1을 감하게 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영남 지방은 예로부터 유현(儒賢)의 대가(大家)가 많았는데 갑술년019) 이후로 금고(禁錮)된 자가 많으며, 더구나 무신년020) 을 겪고 나서는 사대부들의 인심이 크게 변하였으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영남 지방의 풍속은 다른 곳과 다릅니다. 한 마을 가운데 반드시 장자(長者)가 있어 거기에 나아가 모든 일의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면 모두가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리고 영남 사람은 본래부터 고집이 많아서 자기의 소견을 한번 정하면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만약에 그들을 감복(感服)하게 할 수만 있다면 뒷날 반드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지금까지 버려둔 지 어느덧 40년이 되었습니다. 비록 명현(名賢)의 후손일지라도 농부가 되는 데 만족하여 모두가 말하기를, ‘치우친 의논을 하면 역적으로 여기고 과거를 보면 조정에서 버림받으니, 차라리 내가 농사를 짓고 내가 우물을 파서 먹고 사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김성탁(金聖鐸)·성이홍(成爾鴻)·이만부(李萬敷) 세 사람을 조정에 추천한 적이 있는데, 김성탁은 얼마 전에 상경(上京)하였으나 성상께서 불러 보시지도 아니하셨으니, 아마도 장려하여 분발하게 하는 방법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유신(儒臣)을 대우하는 것은 시작만 있고 끝맺음은 없습니다. 윤동원(尹東源)·박필주(朴弼周)는 아직까지도 명령을 받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또 다시 나오도록 권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유신에게는 대개 한가롭게 있도록 사정을 보아주려 하므로, 다시 부르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33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26면
- 【분류】구휼(救恤) / 재정-공물(貢物) / 재정-국용(國用) / 인사(人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역(軍役) / 풍속-풍속(風俗)
○嶺南監賑御史李宗白與道臣聯名啓言: "沿海九邑被災尤甚, 請依朝令, 減大同米每結二斗, 騎步兵布三分一。" 上許之。 左議政徐命均曰: "嶺南自古多儒賢大家, 而甲戌以後, 多錮廢者, 況經戊申, 士大夫人心大變, 極可慮矣。" 豐原君 趙顯命曰: "嶺俗與他異, 一村之中, 必有長者, 就決事之是非, 皆靡然從之。 且嶺人素多固執, 一定所見, 至死不渝。 國家若能感服, 則他日必得力, 而于今棄置, 殆四十年矣。 雖名賢之後, 甘作農夫, 皆曰: ‘爲偏論則爲逆賊, 爲科擧則朝廷棄之, 無寧耕鑿而食。’ 云。 臣曾以金聖鐸、成爾鴻、李萬敷三人, 薦進於朝矣。 金聖鐸向者上京, 自上不賜召見, 恐非聳動之道也。" 命均曰: "殿下之待儒臣, 亦有始無終。 尹東源、朴弼周則尙不承命, 宜加勉出矣。" 上曰: "予於儒臣, 蓋欲優遊假借, 故更未招徠矣。"
- 【태백산사고본】 25책 33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26면
- 【분류】구휼(救恤) / 재정-공물(貢物) / 재정-국용(國用) / 인사(人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역(軍役) / 풍속-풍속(風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