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원에서 임징하의 처형·이의천의 절도 안치 등을 청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정언(正言) 조명교(曺命敎)이다.】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일에 아뢴 계사(啓辭) 가운데 임징하(任徵夏)에 대한 일은 그 조어(措語)를 고치기를,
"선왕(先王)을 무함하고 비방한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임금을 후매(詬罵)한 것과 분의(分義)를 범한 것이 임징하와 같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의 소장(疏章)에 이른바 일치 일란(呢治一亂)이니 발란 반정(撥亂反正)이니 한 등의 말은 더없이 흉악하고 참혹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가 피혐(避嫌)한 계사(啓辭)에는 심지어 ‘비망기(備忘記)가 박상검(朴尙儉)의 손에서 나온 것은 중외(中外)에서 다같이 아는 일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박상검이 죽은 뒤에 어찌 또 박상검 같은 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아!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 차마 이런 등의 절패(絶悖)스런 말로 감히 말하지 못할 자리에다 척언(斥言)하였으니, 이는 실로 고금에 없었던 변괴입니다. 그 죄악을 논한다면 비록 오형(五刑)724) 을 갖추고 그 시체를 베어 만 조각을 내어도 오히려 분을 풀기에 부족합니다. 청컨대, 안치(安置)시킨 죄인 임징하를 속히 방형(邦刑)에 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전일에 아뢴 계사(啓辭) 가운데 이의천(李倚天)의 일에 대해 그 조어(措語)를 고치기를,
"임창(任敞)과 임징하(任徵夏)의 죄를 합쳐서 다 함께 가지고 있는 자가 바로 이의천입니다. 대저 임창과 임징하의 소장(疏章) 내용이 얼마나 흉패(凶悖)스러웠습니까? 그런데도 이의천은 감히 침이 마르도록 칭도(稱道)하면서 임창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당시에 만일 그의 말을 써주었다면 세도(世道)가 반드시 이와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했고, 임징하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청조(淸朝)725) 의 간쟁(諫爭)하는 기풍(氣風)을 깊이 체득하였으므로 신은 바야흐로 용약(踴躍)하면서 기뻐하고 있다.’ 하였으니, 아! 통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의 죄범을 논하자면 임창·임징하와 다를 것이 없으니, 삭출(削黜)만 시키고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이의천을 감사(減死)하고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감사(減死)’라는 두 글자의 율명(律名)을 비로소 가하라는 것인가? 무릇 죄를 논할 때에는 혹은 국청(鞫廳)을 설치하기도 하고 혹은 정형(正刑)726) 에 처하기도 하는데, 끝에 가서 감단(勘斷)할 적에 감사(減死)하는 것이 의당한 일이다. 그러나 이의천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알고 있다. 오로지 당론(黨論)만을 일삼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담당(擔當)했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의천을 극변(極邊)에 원찬(遠竄)시키라."
하였다. 【대계(臺啓)에서 전지(傳旨)를 받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일에 아뢴 계사(啓辭) 가운데 정형익(鄭亨益)을 절도(絶島)에 안치시키라는 일에 대해 임금이 말하기를,
"삭출(削黜)시키는 것이 조금 경하기는 하지만 안치(安置)시키는 것은 지나치다. 극변(極邊)에 원찬(遠竄)시키라."
하였다. 【대계(臺啓)에서 전지(傳旨)를 받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아뢰기를,
"경상좌도 병사(慶尙左道兵使) 김석보(金錫保)는 종래에 무변(武弁)들이 당론(黨論)을 숭장(崇奬)하던 때를 당하여 감히 스스로 힘을 다하려는 계책을 세우고 이에 공좌(公座)에서 대신(大臣)들을 두루 열거하면서 성(姓)과 호(號)를 쓰지 않고 이름을 불렀는데, 이 일로 인하여 상(賞)을 받았고 외람되이 정주 목사(定州牧使)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때 신이 마침 어사(御史)로서 그 경내(境內)를 지나다가 그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그가 부임한 지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버려두고 논핵하지 않았었는데, 그뒤 한정이 없는 탐욕을 부렸습니다. 그후 다른 곳의 곤수(閫帥)727) 로 옮겨갈 때에 이르러서는 창고에 저축된 것을 모두 긁어내어 그의 아들 김상벽(金尙璧)이 있는 장연(長淵)의 임소(任所)에서 선척(船隻)을 가져다가 가득 싣고 돌아갔습니다. 김석보를 사판(仕版)728) 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무간(文武間)에 중재(重宰)729) 를 사판에서 삭제한 일이 있는가? 사판에서 삭제시키는 것은 해당 율법(律法)이 아니다. 나문(拿問)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통제사(統制使) 이복연(李復淵)은 염리(廉吏)의 아들로서 아비의 도리를 모두 위반(違反)하여 이욕(利慾)을 탐하고 행실이 볼 모양이 없습니다. 한번 동현(東縣)에 제수되자 백성을 침탈하여 자신을 살찌우다가 대간(臺諫)의 참혹한 탄핵을 받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이의연(李義淵)의 종형(從兄)이고 장붕익(張鵬翼)의 표숙(表叔)730) 이기 때문에 차례를 건너뛰어 승진해서 외람되이 은대(銀臺)731) 에 임명되었습니다. 본직(本職)에 임명되자 탐욕을 부린 것이 더욱 극심하여 사람들이 모두들 타매(唾罵)하면서 거두(巨蠹)732) 라고 지목하고 있으니, 관작(官爵)을 삭탈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석보(金錫保)의 일을 가지고 말하건대, 무변(武弁)이 대신(大臣)에게 욕을 했다는 말은 직접 듣지 않고서는 모두 믿기가 어렵다. 정주(定州)에 있을 때는 간신(諫臣)이 그때 수의(繡衣)였는데도 서계(書啓)하지 않았었으니, 이제 와서 추론(追論)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복연(李復淵)의 일에 대해서는 청백리(淸白吏)의 아들로서 그렇게 했다면 단지 지금의 탐람(貪婪)으로써 논핵할 것이지 기필코 동현(東縣)에 있을 때의 일을 거슬러 취해다가 통영(統營)의 불법(不法)을 논죄(論罪)할 것이 뭐 있겠는가? 이렇게 사람을 논핵하는 것은 결단코 성실한 도리가 아니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7면
-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변란(變亂)
- [註 724]오형(五刑) : 주(周)나라 때의 다섯 가지 형벌. 즉, 묵형(墨刑)·의형(劓刑)·월형(刖刑)·궁형(宮刑)·대벽(大辟)인데, 대벽은 사형(死刑)임.
- [註 725]
청조(淸朝) : 청명(淸明)한 조정.- [註 726]
정형(正刑) : 사형(死刑).- [註 727]
곤수(閫帥) : 병사(兵使).- [註 728]
사판(仕版) : 벼슬아치아 명단.- [註 729]
중재(重宰) : 중임(重任)의 재신(宰臣).- [註 730]
○諫院 【正言曺命敎。】 申前啓, 不允。 前啓中, 徵夏事, 改其措語曰: "誣毁先王, 非止一二, 而其詬天罵日及犯分蔑義, 未有如徵夏者。 其疏所謂一治一亂, 撥亂反正等說, 已極凶慘, 而至其避辭有曰: ‘備忘出於尙儉之手, 中外之所共知’, 又曰: ‘尙儉死後, 豈無尙儉?’ 噫嘻! 爲人臣子, 忍以此等絶悖之說, 斥言不敢言之地, 此實古今所未有之變怪。 論其罪惡, 雖具五刑而斬萬段, 猶爲不足。 請安置罪人徵夏, 亟正邦刑。" 答曰: "不允。" 前啓中, 李倚天事, 改其措語曰: "合任敞、徵夏之罪, 而幷有之者, 李倚天是也。 夫敞與徵夏之疏, 何等凶悖, 而倚天乃敢極口稱道? 於敞則曰: ‘當時若用其言, 則世道未必如是。’ 於徵夏, 則曰: ‘深得淸朝諫諍之風, 臣方踴躍而喜。’ 噫嘻痛矣! 論其負犯, 與敞、夏無異, 不可削黜而止。 請李倚天減死絶島安置。" 答曰: "減死二字, 律名始加耶? 凡論罪之時, 或設鞫或正刑, 末梢勘斷, 減死宜也, 而倚天事, 予已知之。 專事黨論, 攘臂擔當, 不可不懲。 李倚天, 極邊遠竄。 【以臺啓, 不捧傳旨。】 前啓中, 鄭亨益絶島安置事, 上曰: "削黜差輕, 而安置則過矣。 極邊遠竄。 【以臺啓, 不捧傳旨。】 又啓曰: "慶尙左兵使金錫保, 當向來崇奬武弁黨論之日, 敢爲自效之計, 乃於公座, 歷擧諸大臣, 去姓斥號, 因此見賞, 濫授定州牧使。 伊時臣適以御史過境, 聞其不治之聲, 而以其到任未久, 置而不論, 其後貪饕無厭。 及其後移除他閫, 盡括庫儲, 取船於其子金尙璧 長淵任所, 滿載而歸。 請金錫保削去仕版。" 上曰: "文武間重宰, 削版有之乎? 削版, 非當律, 拿問。" 又啓曰: "統制使李復淵, 以廉吏之子, 一反父道, 嗜利無行, 一授東縣, 剝民肥己, 慘遭臺劾, 爲世棄物。 特以義淵從兄, 張鵬翼表叔, 不次超遷, 濫授銀臺。 及授本職, 貪饕益甚, 人皆唾罵, 目爲巨蠧。 請削奪官爵。" 上曰: "雖以金錫保事言之, 以武弁辱大臣之說, 若非親聞, 則有難盡信。 在定州時則諫臣其時爲繡衣, 不爲書啓, 到今不當追論。 至於李復淵, 則以淸白吏之子, 若如此, 只以卽今貪婪論之, 何必泝取東縣時事, 論罪於統營之不法乎? 如是論人, 決非誠實之道。 不允。"
-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7면
-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변란(變亂)
- [註 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