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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2권, 영조 3년 7월 18일 임신 1번째기사 1727년 청 옹정(雍正) 5년

기질을 변하고, 곤내를 화협하고, 동궁을 교양하는 등 열두 조목의 조현명의 상소

지평(持平) 조현명(趙顯命)이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그 조목은 열 둘이 있으니, 기질(氣質)을 변하고, 곤내(梱內)를 화협(和協)하고, 동궁(東宮)을 교양(敎養)하고, 궁금(宮禁)을 숙청(肅淸)하고, 근습(近習)395) 을 엄하게 다루고, 완호(玩好)를 멀리하고,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직언(直言)을 받아들이고, 법전(法典)을 삼가 지키고, 관작(官爵)을 아끼고, 붕당(朋黨)을 타파하고, 신하를 예우하여 부리는 것입니다. 이 열두 조목은 다 오늘날의 요긴한 일인데, 기질을 변화하는 데에 또한 그 큰 근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조목들 앞에 두었으나 가장 뒤에 그 말을 베풀었습니다.

곤내(梱內)를 화협한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대개 부부라는 것은 함께 몸을 같이하고 덕을 짝하는 것이므로, 필부(匹夫)가 제집을 바로잡으려 하여도 반드시 이것을 삼가서 좋아하여 합하기를 힘쓰고 어그러져 헤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데, 더구나 제왕(帝王)의 정치는 장차 국가를 다스려 천하에 통달하려는 것이니 부부 사이에서 시작하여 처음을 삼가는 방도가 더욱이 어떠하여야 하겠습니까? 또 후궁·궁녀를 두는 것은 임금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나 상하·귀천 사이는 명분이 엄연하여 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총애에 가리워 미혹하여 빠지기 쉬우므로, 안으로 밤에 모시는 경계를 범하고 아래로 물러나 앉는 규례가 없다면 집안이 쓸쓸해지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까닭이 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동궁을 교양한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신이 듣건대,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라 합니다. 조종(祖宗)께서 창업하여 이어 주는 중대함과 자손이 영구히 전하는 것이 모두 여기에 걸려 있고, 치란(治亂)과 흥망의 기틀도 또 가르치고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착하고 착하지 않은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선부(選部)396) 를 신칙(申飭)하여 반드시 위망(威望)이 무거워 두려워 할 만하고 충신(忠信)하고 박식(博識)한 자를 가려서 빈객(賓客)과 궁관(宮官)에 차임(差任)하고 또 구임(久任)397) 의 법(法)을 정하여 타관(他官)으로서 겸직한 자는 비록 본직(本職)은 파면되더라도 특별히 따로 서용(敍用)하여 그대로 벼슬을 띠게 하여 맡겨서 성취하도록 요구하소서. 궁금을 숙청한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안의 말은 밖에 나가지 않게 하고 밖의 말은 안에 들어가지 않게 한다.’ 하였으니, 대개 궁금 사이에서는 모름지기 막는 한계를 준엄하게 해야 할 것인데, 불행히도 근래 일종의 불령(不逞)한 무리가 이따금 유음(幽陰)한 길에 비밀히 붙어 뇌물이 유행하고 말이 전달되므로, 비록 임금이 위에서 잠자코 헤아려 홀로 결단하더라도 시끄럽게 떠도는 말은 이미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숙종(肅宗) 때에 경계를 아뢴 것입니다. 아! 통탄합니다. 예전부터 궁인(宮人)들이 혹 족속이라 핑계하여 여염(閭閻)의 어린아이를 금중(禁中)에 재우고 혹 대식(對食)398) 을 핑계하여 요사한 여중이나 천한 과부와 안팎에서 교통합니다. 이것은 다 요사한 자에게서 인연하고 간사한 자에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출입의 방지를 준엄하게 하여 그 왕래하는 길을 끊으소서. 그러고서야 부정한 길을 막을 수 있고 뒷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근습(近習)을 엄하게 다룬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접때 심부(沁府)399) 에 봉명(奉命)한 승전(承傳)의 일로 말하면, 전하께서 특별히 승전을 파면하신 것은 곧 수신(守臣)을 파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수신은 막 본병(本兵)400) 의 장관(長官)으로 발탁되었는데, 일국의 대사마(大司馬)401) 가 환시(宦侍)와 서로 다투었다 하여 전하께서 마음대로 하시기를 이와 같이 하시니, 이 뒤로 이들이 날로 더욱 방자해졌습니다. 내시(內侍)는 봉명하였을 때 외에는 가벽(呵辟)402) 하지 못하는 것이 수교(受敎)에 실려 있는데, 조상의 무덤을 돌보러 휴가를 받아서 갈 때에 승상(繩牀)403) 으로 앞에서 인도하고 외쳐 뽐내며 성안의 큰 길에 이르러서는 가벽이 낭자하였고, 또 두어 사람이 가마를 메고 창의문(彰義門) 밖에서 돌아다니며 구경한 일이 있고, 또 액례(掖隷)들이 용산강(龍山江) 위에서 풍악을 벌이고 잔치를 베풀되 승전(承傳)을 받들었다고 핑계하여 방자하게 벽제(辟除)404) 를 행하였습니다. 이것은 다 전에 없던 변괴입니다. 또 각궁(各宮)에서 절수(折受)405) 하고 측량하는 일은 매우 어지럽습니다. 지난해 증산통(甑山筒)의 일로 말하면 내사(內司)406) 가 맡은 일인데, 스스로 성교(聖敎)를 친히 받았다 하면서 혹 ‘주상(主上)께서 밤낮으로 희망을 거신다.’고도 하고 혹은 ‘주상의 뜻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고도 하여 못하는 짓이 없이 공동(恐動)하고 위협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들을 조사해 다스려 뒷 폐단을 징계하소서.

완호(玩好)를 멀리한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완호가 사람의 심술을 해치고 사치가 국가를 망치는 것이 많습니다. 신이 듣건대, 전하께서는 궐내(闕內)에서 여러번 토목(土木)의 일을 일으키시어 잗단 일들이 거의 끊일 때가 없고 그림을 매우 좋아하시어 때로는 친히 필묵을 잡으시기도 한다 합니다. 대저 그림은 조금 점잖은 기예에 가까우나 또한 지기(志氣)를 잃게 할 만한데, 더구나 이 보다 큰 것이겠습니까? 대저 마음은 두 가지로 쓸 수 없으로 이것을 중하게 여기면 저것을 가볍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종사(宗社)의 큰 책임을 맡고 요순(堯舜)의 전해 온 도통(道統)을 맡고서 마음을 조금이라도 나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소열 황제(昭烈皇帝)제갈양(諸葛亮)의 짧은 경계의 말을 듣고 평생 동안 기르던 결모(結髦)를 자른 까닭입니다. 재용을 절약한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지금 탁지(度支)407) 의 저축이 남김없이 없어졌는데 전하의 용도는 절제가 없어서 유사(有司)로서 조금 난처하게 여기는 자가 있으면 꾸중이 문득 가해지므로, 무릇 명이 내리면 혹은 빌어서 응하기도 합니다. 아! 자전(慈殿)께 진연(進宴)을 청하였을 때에 다만 나라의 저축이 없다 하여 굳이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으시어 마침내 전하의 그지없는 생각을 조금도 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 무릇 은사(恩賜)하고 예급(例給)하실 때에는 번번이 ‘진연도 거행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여기에 미칠 겨를이 있겠느냐?’고 생각하고 절약을 힘써서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재물을 아끼고 경비를 아까워하시는 생각에 우러러 따르신다면, 어찌 성효(聖孝)에 크게 빛이 있지 않겠습니까? 직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진언(進言)한 자가 여러번 포상(褒賞)을 받았으니, 아뢰고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은 성대하다 하겠으나, 다 잗달아서 매우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치우치게 사랑하고 몸에 가까운 곳에 대해서는 간혹 말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따르려 하지 않으시고, 따르지 않을 뿐더러 혹 문구(文句) 사이의 단점을 집어 내어 꾸짖기도 하고 혹은 경전(經傳) 중의 의리를 끌어 내어 꾸미기도 하셨습니다. 비록 수어청(守禦廳)의 둔전(屯田)에 대한 계청(啓請)으로 말하더라도 이것은 일국의 공론인데 한 달이 넘도록 쟁론(爭論)하여도 마침내 윤허하시지 않았습니다. 맨 먼저 의논을 낸 대신(臺臣)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낙점(落點)을 아끼고 최후에 영얼(嶺臬)408) 을 제수한 것도 배척하여 멀리한 혐의가 있는 듯하니, 앞으로 어떻게 뭇 신하의 의혹을 풀겠습니까?

법전을 삼가 지킨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전하께서 조종(祖宗)의 법에 대하여 가볍게 하고 무겁게 하며 좌지우지하여 뜻대로 하신 것이 많습니다. 작은 인애(仁愛)에 얽매이면 혹 죽어야 할 것도 부당하게 용서하고, 매우 미워하는 것에 지나치면 혹 가벼운 죄가 있어도 엄중히 추구하며, 봉명(奉命)한 승선(承宣)을 능욕한 자는 조금도 징치(懲治)하지 않고 위조한 비망기(備忘記)를 전파한 자는 가볍게 귀양보내며, 제배(除拜)는 혹 자격(資格)에 맞추지 않고 사여(賜與)는 혹 상법(常法)에 넘치는 것이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구제(舊制)를 지키기를 힘쓰고 한때의 사사로운 소견으로 전에 없던 법을 경솔히 새로 만들지 마소서. 관작(官爵)을 아낀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전하께서 갑진년409) 이후로 특별히 제수하거나 갑자기 뛰어오른 자가 모두 몇 사람입니까? 낭계(郞階)410) 가 겨우 끝나자 경(卿)411) 의 반열에 이른 자가 있고, 출신(出身)412) 한 지 한 해가 못되어 방백(方伯)을 맡은 자가 있는가 하면, 은대(銀臺)413) 는 추요(樞要)의 지위인데 미천한 집의 아들이 채워 있고, 대각(臺閣)은 언론의 지위인데 구차하게 출세를 꾀하는 무리가 나아가니, 금옥(金玉)이 흙처럼 천하게 되고 명기(名器)가 더러워서 버릴 물건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전의 과실을 깊이 징계삼고 삼가기를 힘써서 중비(中批)414) 로 특별히 제수하는 일을 일체 행하지 마시고 묘당(廟堂)의 천거를 반드시 살피고 삼가게 하소서.

붕당을 타파한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오늘날 붕당의 폐단은 대개 신축년415) ·임인년416) 이래로 수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저 토죄(討罪)를 지나치게 하여 외람된 것이 많은 것을 면하지 못하고 분노하고 미워하는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낀 것은 신축년·임인년 사람의 죄입니다. 보복(報復)하기에 바빠서 오로지 남을 죄에 빠뜨리기만을 생각하여 관계가 매우 중대한 자와 함께 같은 예로 지워 없앤 것은 을사년417) 사람의 죄입니다. 전하께서 양편의 잘잘못에 대하여 이미 타파하실 수 있었으면 출척(黜陟)하고 용사(用捨)하는 데에 있어서도 공평한 마음으로 공평한 정사를 행하셔야 할 것인데, 또 순전히 이들을 등용하고 저들을 물리치는 상투(常套)를 쓰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축년·임인년 사람들이 목소리를 같이하여 명대로 따르고 을사년 삼사(三司)의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것은 실로 당인(黨人)들이 일망타진하여 석권(席捲)한 수법이었는데, 오늘날 전후의 정청(庭請)과 청대(請對)를 죄안(罪案)으로 삼는 것은 또한 어떻게 저들과 다르겠습니까? 이와 같은 거조(擧措)는 붕당을 타파시킬 수 없을 뿐더러 도리어 붕당을 격동하여 만들 수 있습니다.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접때 사람들 가운데에서 선왕을 핍박하여 욕하고 나라 사람의 반을 무함한 자는 죽이고 귀양보내어도 본디 안될 것이 없겠으나, 그 밖의 무고한 자는 똑같이 사랑하여 구별을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귀양가 있는 사람들은 당초에 본디 억울하게 당한 자가 많고, 그 가운데에서 앞장서서 숭봉(崇奉)을 의논하여 청의(淸議)의 비난을 받고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사주를 받아 선류(善類)를 배척한 자는 3년의 귀양살이로도 그 죄를 징계할 만하니, 이러한 청명(淸明)한 초기를 당하여 또한 대략 청탁(淸濁)의 구별을 보여서 공론을 신장해야 할 것입니다. 또 기사년418) 사람들도 분별하여 등용하여 널리 죄를 씻어 주는 덕을 보이셔야 하겠습니다.

신하들을 예우하여 부린다는 것은 이러합니다. 전하의 오늘날의 거조는 본디 호오(好惡)를 명백하게 보이시려는 데에서 나왔으나, 거조가 점진하지 않고 처분이 전도되어 한나절 안에 거의 다 물리치고 잠시 사이에 어지러이 제배(除拜)하여 마치 화기(禍機)가 한 번 숨쉬는 사이에 닥친 듯합니다. 저 참으로 불충(不忠)하여 임금을 잊고 붕당을 늘리었다면 죄받아야 마땅하겠으나, 전하께서 예우하여 부리는 도리로서는 결코 이렇게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구나 대신(大臣)은 체모가 존엄한데 즉시 고하여 파직하는 것은 이미 전에 없던 일이고 ‘흔퍅(狠愎)’이라는 두 글자는 더욱이 성인(聖人)의 중화(中和)의 덕을 손상시킴이 있습니다. 대개 그 나이는 매우 늙었고 그 지위는 영상(領相)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이러한 제목을 붙이고서야 시원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깊이 뉘우치고 고치소서.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다 오늘날 급히 힘써야 할 일입니다마는, 그 온갖 폐단의 큰 근본이 되는 것은 전하의 기질(氣質)의 병통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나 표리(表裏)가 혹 서로 어울리지 않고 언행(言行)이 혹 서로 고려되지 않습니다. 연석(筵席)에서 신하와 마주하는 엄숙하고 화목한 자리에서는 위의(威儀)에 어그러지는 것이 없으시나 홀로 한가한 가운데에서는 수시로 듣는 것을 빠뜨리시고, 요순(堯舜)주공(周公)·공자(孔子)의 가르침은 자주 인용하시나 한(漢)·당(唐)의 중흥한 임금의 일은 혹 도리어 언급하지 않으시며, ‘경(經)에 이르기를’, ‘전(傳)에 이르기를’ 하는 분부는 여러 번 사륜(絲綸)419) 의 사이에 부지런히 쓰시나 한갓 겉치레로 돌아가고, ‘유념(留念)한다’, ‘체념(體念)한다’는 비답(批答)은 번번이 경계를 아뢴 글에 대하여 내리시나 진실이 없는 것을 면하지 못하십니다. 이 때문에 위단(威斷)의 맹렬한 것이 천둥처럼 두렵고 바람처럼 빠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아래에서 따르지 않고, 포고(布告)하는 말씀이 정녕하고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 전하께서 성실하지 않으신 병통입니다. 전하께서는 사정(私情)이 공심(公心)보다 많고 천리(天理)가 인욕(人慾)보다 적어서 욕심이 싹트는 것을 결단코 누르지 못하고 인정이 있는 데에는 굽혀서 수행하기를 힘쓰시며, 말이 궁위(宮闈)에 관계되면 반드시 막으려 하고 일이 근습(近習)에 관계되면 문득 주장을 하시며, 좋아하시는 자에게는 선웃음을 치고 사랑하며 구차하게 기쁘게 하려고 힘쓰시고 미워하시는 자에게는 일마다 의심을 일으키고 짐짓 허물을 찾으시니, 사의(私意)는 그래서 넘쳐 흐르고 공도(公道)는 그래서 아주 없어집니다. 이것은 다 전하께서 사정이 많은 병통입니다. 인정과 물욕에 깊어서 용서가 혹 지나치고, 작은 법문(法文)과 잗단 일에 상세하여 대체를 혹 잃으며, 스스로 마음을 열어 정성을 보인다고 생각하시나 왕언(王言)은 혹 신중한 것이 부족하고, 스스로 영예(英銳)하여 과단(果斷)한다고 하시나 거조는 혹 경솔한 데에 가깝습니다. 무릇 이러한 것들은 낱낱이 열거하기 어려우나 대개 다 전하의 기질의 병통입니다. 이른바 잘 다스려 변화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바로 요순의 정일(精一)한 심학(心學)이 있을 뿐이고, 그 본받는 방법은 《중용(中庸)》《대학(大學)》의 글에 실려 있는 것이 지극히 상세하고도 명백합니다. 비록 성인이 다시 나더라도 그 말은 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오직 전하께서 힘써 배우고 참으로 체험하시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으로 칭찬하고, 중관(中官)의 승상(繩牀)으로 앞에서 인도한 일은 엄하게 신칙(申飭)하고, 가마를 메고 다니며 구경하고 용산에서 잔치를 벌인 중관과 액례는 모두 죄주어 다스리게 하고, 청탁의 구별을 대략 보이는 일은 물서(勿敍)로 부표(付標)하고, 정호(鄭澔)의 일은 ‘「흔퍅」이라는 두 글자는 지나치다 하겠거니와 네 말이 공평하다.’ 하고 뒤미처 고치도록 윤허하였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 소 가운데에서 거행할 만한 것을 분부한 뒤에 도로 들여와 궁중에 두라. 경연(經筵)을 멈춘 여가에 보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47면
  • 【분류】
    정론(政論)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재정(財政) / 인사(人事)

  • [註 395]
    근습(近習) : 근신(近臣).
  • [註 396]
    선부(選部) : 이조(吏曹).
  • [註 397]
    구임(久任) : 하나의 관직에 오랫동안 근무하던 제도. 대개 일정한 기간이 되면 체임(遞任)하는 것이 원칙이나, 특수한 관직에 한하여 구임시켰음.
  • [註 398]
    대식(對食) : 마주 앉아 먹음.
  • [註 399]
    심부(沁府) : 강화부(江華府).
  • [註 400]
    본병(本兵) : 병조(兵曹).
  • [註 401]
    대사마(大司馬) : 병조 판서(兵曹判書).
  • [註 402]
    가벽(呵辟) : 소리쳐 행인을 물림.
  • [註 403]
    승상(繩牀) : 장방형의 가죽 조각의 두 끝에 네모진 다리를 대어, 접고 펴게 만든 걸상 비슷한 물건. 벼슬아치가 하인들에게 들려 가지고 다니게 하여 깔고 앉기도 하고 말 탈 때에 디디기도 함.
  • [註 404]
    벽제(辟除) : 지위 높은 사람이 지나갈 때 구종 별배(驅從別陪) 등이 잡인(雜人)의 통행을 통제하는 일.
  • [註 405]
    절수(折受) : 임금에게서 봉록으로 토지 또는 어전(魚箭)·염장(鹽場)을 자기 몫으로 떼어 받던 일.
  • [註 406]
    내사(內司) : 내수사(內需司).
  • [註 407]
    탁지(度支) : 호조(戶曹).
  • [註 408]
    영얼(嶺臬) :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 [註 409]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 [註 410]
    낭계(郞階) : 6품(品)이하.
  • [註 411]
    경(卿) : 2품.
  • [註 412]
    출신(出身) :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섬.
  • [註 413]
    은대(銀臺) : 승정원(承政院).
  • [註 414]
    중비(中批) : 전형(銓衡)을 거치지 않고 임금의 특지(特旨)로 관원을 임명하는 일.
  • [註 415]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416]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417]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 [註 418]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419]
    사륜(絲綸) : 교서.

○壬申/持平趙顯命上萬言疏。

其目有十二, 曰變化氣質也, 曰和協梱內也, 曰敎養東宮也, 曰肅淸宮禁也, 曰操切近習也, 曰屛遠玩好也, 曰撙節財用也, 曰容受直言也, 曰謹守法典也, 曰愛重官爵也, 曰消破朋黨也, 曰禮使臣隣也。 此十二條者, 皆今日之要務, 而變化氣質, 又其大本之所在也, 故置之諸條之上, 而序其說於最下焉。 所謂和協梱內者, 蓋夫婦者, 所與齊體配德, 故匹夫欲正其家, 亦必謹於斯, 以好合爲務, 睽離爲戒。 況帝王之爲治, 將以御于家邦而達之天下, 則所以造端而謹始者, 尤當如何哉? 且媵御嬪嬙之設, 王者之所不能無者, 而上下貴賤之間, 名分截然, 不可踰越者也。 然寵愛所蔽, 易於迷溺, 內犯當夕之戒, 下無却坐之規, 則家之所以索, 國之所以亂也, 可不懼哉? 所謂敎養東宮者, 臣聞世子, 國之本也。 祖宗創垂之重, 子孫永久之傳, 咸係於斯, 而治亂興亡之機, 又在夫敎與不敎, 敎之善與不善而已耳。 伏願申飭選部, 必以威重可畏, 忠信博識者, 擇差賓客及宮官, 又定爲久任之法。 其以他官兼帶者, 雖本職見罷, 特令別敍, 仍帶委任責成焉。 所謂肅淸宮禁者, 傳曰: "內言不出於外, 外言不入於內。" 蓋宮禁之間, 要使防限峻截, 而不幸挽近以來, 一種不逞之徒, 往往密附於幽陰之徑, 貨賂流行, 語言傳通, 故雖人主默運, 獨斷於上, 而浮囂之談, 已不勝其紛紜, 此先正臣朴世采, 所以陳誡於肅廟者也。 噫嘻痛哉! 自古宮人輩, 或稱族屬, 以閭閻小兒, 宿留於禁中, 或稱對食, 與妖尼賤孀, 交通於內外。 此皆妖邪之所因緣, 奸詭之所由售也。 伏願殿下, 峻其出入之防, 絶其往來之路, 然後曲逕可杜, 而後弊可防矣。 所謂操切近習者, 以向來沁府奉命承傳事言之, 殿下之特罷承傳, 乃所以罷守臣也。 其時守臣, 纔擢本兵之長, 以一國大司馬, 與宦侍相爭, 而殿下所以左右之者如此, 自此之後, 此輩日益橫肆。 內侍奉命外不得呵辟, 載在 受敎, 而掃墳受由之行, 繩床前導, 呼唱揚揚, 至於城中大路, 呵辟狼藉。 又有數人肩輿, 遊賞於彰義門外, 又有掖隷輩張樂設宴於龍山江上, 稱以奉承傳, 肆行辟除, 此皆前所未有之變怪。 且各宮折受打量之擧, 極其紛紜。 以前年甑山筒事言之, 內司所任, 自稱親承聖敎, 或云主上日夜懸望, 或云上意不當違拂, 恐動喝脅, 無所不至。 伏願査治此流, 以懲後弊焉。 所謂屛遠玩好者, 玩好之蠱人心術, 奢侈之敗人家國多矣。 臣聞殿下於禁中, 屢興土木, 小小工役, 殆無歇時, 酷嗜畫圖, 時或親御翰墨。 夫圖畫, 稍近雅技, 然亦足以喪志。 況其大於此者乎? 夫心無二用, 重於此, 則輕於彼。 況任宗社丕責之寄, 擔道統之傳, 而可使此心, 有一毫之分乎? 此昭烈所以聞諸葛片言之警, 而割結髦終身之好也。 所謂撙節財用者, 卽今度支之蓄, 蕩然無餘, 而殿下之用度無節。 有司一有難之者, 則誚責輒加, 故凡有命下, 至或稱貸而應之。 嗚呼! 慈殿進宴之請, 特以國儲之板蕩, 堅拒而不許, 終使殿下不匱之思, 不得少伸。 臣願殿下, 凡有恩賜例給, 每念進宴, 且不得行, 何暇及此乎? 務爲節省, 以仰副大王大妃愛財惜費之念, 則豈不大有光於聖孝也? 所謂容受直言者, 殿下自卽阼以來, 進言者累獲褒賞, 敷受之美, 可謂盛矣。 然皆零碎無甚關重者。 至於偏私切身處, 則間有言者, 輒不肯從, 不惟不從, 或摘出句字間病處, 以呵責之, 或攬取經傳中義理, 以文飾之。 雖以守禦屯田之啓言之, 此乃擧國之公議, 而閱月爭論, 終不允許, 至於首發之臺臣, 久靳恩點, 最後嶺臬之除, 又近斥遠之嫌, 將何以解群下之疑惑也? 所謂謹守法典者, 殿下於祖宗典章, 輕重左右, 多任已意。 拘於小仁, 則或有當死而曲貸, 過於痛嫉, 則或有輕罪而重究。 凌辱奉命之承宣者, 略不懲治, 傳播僞造之備忘者, 薄施竄配。 除拜或不準於資格, 賜與或有濫於常典。 伏願務守舊制, 勿以一時私見, 輕創無前之法。 所謂愛重官爵者, 殿下自甲辰以後, 特除驟躐者, 凡幾人也? 郞階纔畢而至卿列者有之, 出身未朞而典方伯者有之。 銀臺樞要之地, 側微之子充焉, 臺閣言議之地, 營苟之類騁焉。 金玉如土壤之賤, 名器爲媟棄之物。 竊願殿下, 深懲前失, 務爲難愼, 中批特除, 一切不行, 廟堂薦擇, 必令審謹焉。 所謂消破朋黨者, 今日朋黨之弊, 蓋自辛壬以來, 莫可收拾。

夫過於致討, 未免多濫, 憤嫉之私, 參於其間者, 辛壬人之罪也; 急於報復, 專意傾陷, 竝與關係至重者而一例塗抹者, 乙巳人之罪也。 殿下於兩邊得失, 旣有以打破之, 則其於黜陟用捨, 亦當以公平之心, 行公平之政, 而乃又純用進此退彼之例套, 何也? 辛壬之同聲唯諾, 乙巳之不言三司, 實黨人輩網打席捲之手法, 而今日以前後庭請、請對爲案者, 亦何以異於彼哉? 似此擧措, 不惟不能消破朋黨, 反有以激成朋黨也。 臣謂向時人中, 逼辱先王, 構陷半國者, 誅流竄殛, 固無不可, 其外無故者, 當一視同仁, 無有限界。 今之被放諸人, 則當初固多枉罹者, 而其中倡議崇奉, 見非淸議, 受嗾逆, 擠擯善類者, 雖其三年竄謫, 足懲其罪。 當此淸明之初, 亦不可不略示, 以伸公議。 且己巳人, 亦宜分別而用之, 以示曠蕩之德。 所謂禮使臣隣者, 殿下今日之擧, 固出於明示好惡, 然擧措無漸, 處分顚倒, 半日之內, 斥逐殆盡, 頃刻之間, 除拜紛紜, 有若禍機之迫在呼吸者。 彼誠不忠, 忘君殖黨, 宜其得罪, 而在殿下禮使之道, 決不當如此也。 況大臣體貌尊嚴, 現告罷職, 已是前所未有之事, 而狠愎二字, 尤有損於聖人中和之德。 蓋其年則篤老也, 其位則領揆也, 何必以此等題目, 加之然後爲快也? 伏願深加懲改焉。 凡此數者, 皆爲今日之急務, 而若其大本之爲百弊之源者, 卽殿下氣質之病是已。 殿下非不欲好善惡惡, 而表裏或不相應, 言行或不相顧, 筵對肅穆之地, 威儀無愆, 而幽獨得肆之中, 闕遺時聞。 之訓, 動輒援引, 而中主之事, 或反不及。 經曰、傳曰之敎, 屢勤於絲綸之間, 而徒歸文辯, 留念、體念之批, 每下於陳戒之章, 而未免無實。 是以, 威斷之猛, 非不雷動風行, 而下不服, 播告之辭, 非不丁寧懇惻, 而人不信。 此皆殿下不誠實之病也。 殿下私情勝於公心, 天理屈於人慾, 慾之所萠, 不能斷制, 情之所在, 務爲曲遂。 語涉宮闈, 則必欲周遮; 事係近習, 則輒爲主張。 所好者, 則喣喣爲仁, 務欲苟悅; 所惡者, 則節節生疑, 故爲求過。 私意於是橫流, 公道於是滅絶, 此皆殿下私勝之病也。 深於人情物慾, 而推恕或過; 詳於微文瑣節, 而大體或遺。 自謂開心見誠, 而王言或欠於簡重; 自謂英銳果斷, 而擧措或近於輕遽。 凡若此類, 難以疏擧, 而蓋皆殿下氣質之病也, 所謂克治變化之術, 不可以他求也。 卽精一之心學是已, 其所以爲法, 則載於《中庸》《大學》之書者, 至詳且明。 雖聖人復起, 其言不過如斯, 惟在殿下力學而實體之耳。

上優批嘉奬, 中官之繩床前導, 嚴加申飭, 肩輿遊賞, 設宴龍山之中官及掖隷, 竝令科治, 略示事, 勿敍付標。 鄭澔事, 狠愎二字, 可謂過矣。 爾言公矣, 許令追改。 仍敎曰: "此疏中可以擧行者, 分付後還入留中, 停筵之暇, 當乙覽也。"


  •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47면
  • 【분류】
    정론(政論)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재정(財政)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