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 부사 이익명이 그의 종손 이봉상의 피란한 실정을 고하고 자현하게 하다
청풍 부사(淸風府使) 이익명(李益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의 형 이이명(李頤命)은 불쌍하고 측은했던 일을 깨끗이 씻어 은혜가 천고(千古)에 융성하였으니, 뼈가 가루가 되도록 결초 보은(結草報恩)하더라도 그 은혜의 만분의 일도 갚기에 부족할 것인데, 신에게는 만 번 죽어 마땅한 죄가 있습니다. 신이 임인년725) 6월에 광주(光州)에 유배되어 있었을 때 신의 종손(從孫) 이봉상(李鳳祥)은 그의 아비 이기지(李器之)의 노적(孥籍)726) 을 역당들이 아뢰어 윤허받았으므로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들었는데, 단지 3세(世)가 함께 죽게 된 것만 마음 아팠을 뿐 다른 근심은 없었습니다. 뒤에 북예(北裔)로 이배(移配)되어서는 오직 빨리 죽어 세상일에는 아는 바가 없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가 석방(釋放)의 전지(傳旨)를 받들고 넘어지고 엎어지며 길을 떠나 어제 저녁에야 비로소 서울에 도착하여 홀로 된 형수의 편지를 볼 수 있었는데, 이봉상이 실은 죽지 않고 도망하여 숨어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의 곡절은 형수가 있는 곳이 멀어서 미처 자세히 듣지 못하였으나, 그 말이 허언(虛言)이 아닌 것을 분명합니다. 이봉상은 마땅히 즉시 자현(自現)해야 하겠지만, 아직도 있는 곳을 몰라서 지금 가동(家僮)을 시켜 두루 숨은 곳을 찾아내어 조만간에 직접 자현(自現)하여 대죄(待罪)하게 할 것입니다. 그도 또한 오늘 일을 볼 수 있으면 비록 내일 죽음에 나가더라도 반드시 달갑게 여길 것입니다. 집안이 화란을 당하던 날에 신은 이미 멀리 유배되어 있었고 이봉상은 미약하니, 그의 조모와 어미가 가혹함이 억울하여 하늘에 울부짖을 즈음에 단지 일점 혈육을 보존하려고 옛날 조무(趙武)와 이섭(李燮) 및 본조(本朝)의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손자 김천석(金天錫)의 일과 같이 하는 것만 알았지 중법(重法)을 범하는 데에 돌아감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실정과 그 죄상은 오직 성감(聖鑑)이 굽어 통촉하시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 형의 나라를 위하는 단충(丹忠)은 내가 이미 환히 알고 있다. 지난날 군간(群奸)의 무함으로 인하여 마음속을 밝히지 못하고 갑자기 저승의 신하가 되었으니, 오늘날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슬퍼진다. 그리하여 후사(後嗣)를 이을 사람이 없어서 대가 끊어진 것을 더욱 탄식하였는데, 지금 그대의 상소를 보고는 못내 기쁘고도 위로됨을 금하지 못하겠다. 이는 그대 형의 해를 꿰뚫을 듯한 충심(忠心)이 감동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이 일로 본다면 진(晉)나라 때의 사람들이 천도(天道)를 함부로 헤아렸다는 말을 알 수 있겠다. 해조로 하여금 특히 녹용(錄用)하게 할 것이니, 그대는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당초에 이기지(李器之)를 수노(收孥)하라는 명이 내렸을 때 이봉상은 당시 나이가 16세였고, 집은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 가에 있었다. 이이명(李頤命)의 누이는 군수(郡守) 김도제(金道濟)의 처(妻)인데, 명이 내려진 것을 듣고 밤에 가동으로 하여금 달려가서 이봉상에게 알려주게 하였다. 그때는 한밤중이었는데, 이봉상의 조모(祖母) 김씨(金氏)가 급히 이봉상의 유모(乳母)를 불러 귀에 대고 말을 하였다. 유모에게 아들이 있어 나이와 모습이 이봉상과 비슷하였다. 드디어 그가 이봉상의 최복(衰服)을 입고 즉시 그 밤으로 강가에 나아가 짚신을 모래밭에 벗어 놓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는데, 이웃 마을에는 ‘이봉상이 강에 빠져 죽었다.’는 말이 자자하게 퍼졌다. 하늘이 밝은 무렵에 사자(使者)가 이르러 시체를 강에서 건져 살펴보고는 돌아가 이봉상이 이미 죽었다고 상주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이봉상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봉상은 늙은 종과 도망하여 낮에는 산골짜기에 숨어 있고 밤에는 걸어가 무주(茂朱)의 적상 산성(赤裳山城)에 도착하였다. 재물도 있고 의리를 좋아하는 이만득(李晩得)이라는 사람이 이봉상을 보고 마음으로 의심하였으나 받아들여 살게 하였다. 한동안 살고 나서 이봉상이 사실대로 고하자 이만득은 더욱 불쌍히 여겨 더욱 후하게 대우해 주었다. 이 때에 이르러 이봉상이 비로소 죽지 않았다고 자수하니, 임금이 대단히 기이하게 여기고는 임조(臨朝)하여 여러 차례 차탄(嗟歎)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5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07면
- 【분류】인사(人事) / 사법(司法)
○壬辰/淸風府使李益命上疏。 略曰:
臣兄頣命, 昭雪愍惻, 恩隆千古, 糜骨結草, 不足以圖酬萬一, 而抑臣有萬死之罪。 臣於壬寅六月, 在光州謫中, 聞臣從孫鳳祥, 以其父器之孥, 啓之允, 不免於死, 只痛三世俱滅而已, 不虞其他。 後移北裔, 惟求溘然速化, 而與世無聞矣, 及承霈旨, 顚仆作行, 昨夕始抵京輦, 得見寡嫂之書, 鳳祥實不死逋竄, 而當時委折, 以嫂之在, 遠未及詳聞, 然其非虛語則明矣。 鳳祥宜卽自現, 而尙不知所存處, 方令家僮, 遍爲跟追, 俾早晩自現待罪, 而渠亦得見今日, 雖明日就戮, 必當甘心。 蓋覆巢之日, 臣旣遠配, 鳳祥迷弱, 其祖母及母冤酷呼天之際, 只知保一塊肉, 如古之趙武、李燮及本朝延興府院君 金悌男之孫天錫之事, 而不知其爲犯重法之歸。 其情其罪, 惟在聖鑑之俯燭。
批曰: "爾兄爲國丹忠, 予已洞知。 向因群奸之誣陷, 中心莫白, 遽作九原之臣。 追惟今日, 不覺愴然, 而竊歎繼絶之無人, 今覽爾疏, 不勝忻慰。 此非爾兄貫日忠心所感哉? 於此觀之, 可知晋時人妄揣天道之語也。 其令該曹, 特爲錄用。 爾勿待罪焉。" 初, 器之收孥命下, 鳳祥時年十六, 家扶餘 白馬江上。 頣命娣, 郡守金道濟妻也。 聞命下, 星夜走家僮, 報鳳祥。 時夜將半, 鳳祥祖母金, 急招鳳祥乳母, 附耳語。 乳母有子, 齒貌與鳳祥等。 遂着鳳祥衰服, 卽夜赴江頭, 脫菅屨沙汀, 投水死。 隣里藉藉, 言鳳祥投江死。 天欲曙, 使者至, 拯屍江中以驗之, 歸奏鳳祥已死, 朝廷不問。 鳳祥與老奴, 竄匿山谷間, 晝伏夜行, 抵茂朱 赤裳山城。 有李晩得者, 有財而好義, 見鳳祥心疑之, 然受而舍之。 居久之, 鳳祥告以實, 晩得愈益憐之, 愈益厚遇之。 及是鳳祥, 始自首不死, 上大異之, 臨朝屢嗟歎焉。
- 【태백산사고본】 4책 5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07면
- 【분류】인사(人事) / 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