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연을 비호하고 대신을 무욕하는 상소를 올린 유생 박지혁을 부령에 유배하다
유생(儒生) 박지혁(朴趾赫)을 부령(富寧)에 유배하였다. 박지혁은 경기(京畿) 사람인데, 기호(畿湖)의 유생을 이끌고 상소하기를,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실로 우리 동방의 주자(朱子)입니다. 요(堯)·순(舜) 시대의 군신(君臣)의 뜻을 품고 세도(世道)를 부식(扶植)하였고, 천지(天地)가 뒤집히는 날 대의(大義)를 드러내 밝히었으니, 우리 나라가 금수(禽獸)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 그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빈사(賓師)의 지위에 두시었는데, 우모(訏謨)는 밀물(密勿)했고 계합(契合)은 소융(昭融)하였습니다. 현묘(顯廟)·숙묘(肅廟) 두 성세(聖世)에 이르러 더욱 존대하는 예(禮)를 더하였고,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언찰(諺札)에 이르러 극도에 도달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문도(門徒) 중에서 창을 거꾸로 쥔자가 하늘까지 넘실거리는 화(禍)를 빚어내어 기사년281) 의 변(變)이 있게 하였습니다. 갑술년282) 에 개기(改紀)한 뒤에는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합향(合享)할 것을 특별히 명(命)했으니, 대개 이 서원은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를 철식(腏食)한 곳입니다. 숙묘(肅廟)께서 사림(士林)이 청한 바를 특별히 허락한 것이 어찌 실천한 도(道)가 독실하고, 몸소 참화(慘禍)를 당한 것이 전후로 한결같았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병신년283) 즈음에는 친히 ‘화양 서원(華陽書院)’이란 네 글자를 쓰시고 특별히 근시(近侍)를 보내 송시열을 철향(腏享)하는 곳에 걸고 제사하게 하셨으며, 이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시기를, ‘인주(人主)가 어진이를 받드는 것은 지성(至誠)에서 나오는 것이니, 또한 선비의 추향(趨向)을 정(定)하고 사설(邪說)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하시고, 이 하교를 새겨서 함께 걸게 하셨습니다.
또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대리(代理)하시던 초기에 하교하시기를, ‘근래의 일은 처분이 정해졌고 시비(是非)가 분명해졌으니, 백세(百世)에 의혹되지 않으리라. 일이 사문(斯文)에 관계되니, 돌아보건대 중대하지 않은가? 내 뜻을 너는 따라서 흔들리지 말라.’고 하셨으니, 무릇 조금이라도 이륜(彛倫)을 지키는 성품이 있고 약간이나마 부자 군신(父子君臣)의 윤리를 아는 자라면, 그 누가 감히 훼척(毁斥)·배패(背悖)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직 저 황욱(黃昱)·김범갑(金范甲)의 무리가 이에 감히 선어(仙馭)가 빈천(賓天)하신 뒤 흉얼(凶孼)들에게 구사(驅使)되는 것을 달게 여긴 나머지 무리를 지어 일어나 날뛰며 말도 안되고 사리에 가깝지도 않은 말을 부회(傅會)하여 억지로 삼조(三朝)에서 존례(尊禮)하던 선정(先正)에게 더하고, 숙묘의 유훈(遺訓)을 드러내어 배척해 감히 훼손할 계획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광좌의 무리가 입시(入侍)하여 근거없는 말로 심지어, ‘병신년284) 의 대처분(大處分)은 성고(聖考)의 본의(本意)가 아니었다.’ 하고, 졸지에 도봉 서원의 조두(俎豆)를 철거하고 말았습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또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는 송시열의 적전(嫡傳)이고 울연히 한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는데, 매번 숙묘의 총애를 입어 심지어 온궁(溫宮)에서 사대(賜對)하시어 친히 손을 쥐며 천어(天語)가 간절하기까지 했으니, 이는 실로 천고(千古)에 듣지 못한 은례(恩禮)였습니다.
그런데 역적 신면(申冕)의 손자로 신치운(申致雲)이라 이름하는 자가 흉당(凶黨)에 빌붙어 대대로 그 악(惡)을 이루어 허구 날조하며 무욕(誣辱)하되 다시는 여지(餘地)를 남기지 않더니,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무리들이 두 선정(先正)에게 감심(甘心)하고자 한 것은 대개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숙묘에게 원독(怨毒)한 마음을 부리려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을 위해 보복하려는 것입니다. 대개 윤선거는 강도(江都)의 노란(虜亂) 때 김익겸(金益兼) 등 여러 사람과 더불어 죽기를 약속하고, 심지어 ‘고인(古人)은 난(亂)에 임하여 먼저 처자(妻子)를 죽였다.’ 하고 손으로 아이 밴 아내까지 목졸라 죽였는데, 무릇 여러 사람들이 자살한 뒤에 이르러 윤선거만 유독 투생(偸生)285) 하여 선복(宣卜)이라 이름을 고치고 진원군(珍原君)의 길마잡이가 되어 달아났던 것입니다.
돌아와서는 주자(朱子)를 함께 공박하고 효묘(孝廟)를 무욕한 역적 윤휴(尹鑴)와 심복(心腹)의 관계를 맺어 몰래 서척(書尺)286) 를 통하여 효묘를 기무(譏誣)하되, 심지어 ‘강왕(康王)287) 이 실제 군전(軍前)에 있었다’, ‘구천(句踐)288) 은 속이고, 연광(延廣)289) 은 미쳤다.’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윤증은 또 그 아비가 죽지 않은 것이 충분한 도리(道理)라고 여기고 사국(史局)에 글을 보내어 무친(誣親)하기를 꺼리지 않다가 끝내는 아비로 섬기는 곳에다 창을 거꾸로 쥐고 공격하였으니, 이것이 숙묘께서 엄한 말씀으로 준엄하게 배척하신 까닭이며, 심지어 윤선거·윤증에게 추탈(追奪)·철원(撤院)하는 법을 베푸신 까닭이었습니다. 오늘날 흉도(凶徒)가 우리 숙묘의 유훈(遺訓)을 훼기(毁棄)한 것도 역시 윤선거·윤증의 무부 무군(無父無君)의 가법(家法)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군흉(群凶)들의 부도(不道)한 죄를 바루시고 이어 유사(攸司)에 명하시어 빨리 복향(復享)하고 직첩(職牒)을 돌려주는 법을 거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이의연(李義淵)은 참으로 시대를 근심하는 강개(慷慨)한 선비인데, 간흉(奸凶)들이 일제히 일어나 번갈아가며 죄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조태억(趙泰億)은 돌입(突入)하여 근거없는 말로 협박하였고, 권익관(權益寬)·이명언(李明彦)에 이르러서는 전하의 몸에 미루어 올려 공공연하게 무욕(誣辱)하되, 전하를 윤상(倫常)을 알지 못하는 지경으로 밀어버렸습니다. 또 감히 정책의 공(功)을 덕(德)으로 여기는 데로 돌려 용서하는 과목(科目)이 있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더욱 통탄할 만한 것은 박필몽(朴弼夢)·이거원(李巨源)·서종하(徐宗厦)·윤용(尹容) 등이 다만 당(黨)을 비호하는 마음을 품은 채 성궁(聖躬)이 무욕당하는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여 이에 이치에 가깝지 않은 말로 군부(君父)를 협지(脅持)한 것입니다. ‘종무(鍾巫)’·‘접혈(蹀血)’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이것은 실로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는 죄인데, 저 유시모(柳時模)는 자신이 대지(臺地)에 있으면서 감히 신구(伸救)할 계책을 내어 ‘출처(出處)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등의 말로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비호하며 그 죄를 가리고자 하였으니, 역적 유시모의 죄는 김일경과 그리 다름이 없습니다. 먼 외읍(外邑)으로 출보(黜補)한 것도 실로 관대한 은전(恩典)인데, 저 조태억은 ‘모자(母子)가 서로 헤어진다.’는 말로 영구(營救)해 마지않아 끝내 고을을 바꾸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아! 통탄스럽습니다. 지난날 민진원(閔鎭遠)이 방석(放釋)될 때 ‘선후(先后)의 혼령이 반드시 측연(惻然)하게 여기실 것이다.’라고 하교하시자, 역적 윤회(尹會)는 성교(聖敎)의 말뜻과는 반대로 이에 ‘선후(先后)께서는 반드시 통렬히 미워하실 것이다.’라는 등의 말을 글에 썼습니다.
심적(心跡)을 따져보건대, 만번 죽여도 오히려 가벼울 것이나, 조정에 가득한 신료(臣僚)들 중 한 마디의 공의(公議)도 없었습니다. 역적 유시모가 출보(出補)될 때에 이르러서 그 모자(母子)가 서로 이별하는 가련함을 들었으니, 저 조태억이 만약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동기간(同己間)의 정(情)을 생각해 보고 부부인(府夫人)의 정경(情景)을 추서(推恕)하였다면, 유시모의 어미에 비해 경중(輕重)이 과연 어떠하였겠습니까? 아아! 이광좌의 무리는 숙묘의 병신년 처분을 선왕(先王)의 본뜻이 아닌 것으로 돌렸으니, 어찌하여 이광좌에게 이의연의 율(律)을 먼저 더하지 아니하시고, 단지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한 일개 이의연만 이런 음형(陰刑)과 극률(極律)에 걸려들게 하십니까? 신(臣)은 아마도 재앙을 그치게 하는 일이 도리어 재앙을 초래하는 단서가 될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건단(乾斷)을 널리 휘두르셔서 조태억·권익관·이언명 등 여러 사람의 죄를 바로잡으시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켜서 하늘의 견책(譴責)에 답하소서."
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박지혁의 상소는 말뜻이 흉패(凶悖)하기가 채응복(蔡膺福)보다 백배나 더합니다. 청컨대, 한 번 예람(睿覽)을 거치신 뒤 명백하게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박지혁 등이 감히 이의연을 비호하고 대신(大臣)을 무욕하였으니,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32면
-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思想)
- [註 281]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282]
갑술년 : 1694 숙종 20년.- [註 283]
병신년 : 1716 숙종 42년.- [註 284]
병신년 : 1716 숙종 42년.- [註 285]
투생(偸生) : 죽어 마땅할 때 죽지 않고 욕되게 살기를 탐냄.- [註 286]
서척(書尺) : 편지.- [註 287]
강왕(康王) : 송 고종(宋高宗). 여기서는 효종을 비유한 것임.- [註 288]
구천(句踐) : 춘추 시대(春秋時代) 월(越)나라 임금. 처음에는 구천이 오왕(吳王) 합려(闔閭)와 싸워 패배시켰으나,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에게 다시 패배당함. 그 뒤 20년 동안 곰의 쓸개를 달아놓고 이를 핥으면서 갖가지 계책을 써서 부차를 속이고 마침내 각고한 끝에 오(吳)나를 멸망시켰음.- [註 289]
연광(延廣) : 오대(五代) 때 진(晉)나라 사람 경연광(景延廣)을 가리킴. 출제(出帝)가 즉위한 뒤 대신(大臣)들이 의논하여 거란[契丹]에 표(表)를 올려 신하로 자처하자고 하였는데, 경연광만이 이에 반대하고 호언 장담하다가 뒤에 거란이 쳐들어와서 잡히게 되자 자살하였음.○己巳/流儒生朴趾赫於富寧。 趾赫, 京畿人, 率畿湖儒生上疏曰:
竊惟先正臣文正公 宋時烈, 實我東方之朱子也。 抱堯、舜君民之志, 而扶植世道, 當天地翻覆之日, 而闡明大義, 東國之得免爲禽獸者, 是誰之力? 惟我孝宗大王, 置之賓師之位, 密勿訏謨, 契合昭融。 逮至顯廟、肅廟兩聖之世, 益加尊待之禮, 至明聖王后諺札而極矣。 不幸門徒之倒戈者, 釀成淫天之禍, 致有己巳之變。 至於甲戌改紀之後, 特命合享於道峰書院, 蓋玆書院, 卽先正臣趙光祖腏食之所也。 肅廟之特許士林之所請者, 豈不以踐道篤實, 而身蹈慘禍者, 前後一轍而然歟? 丙申年間, 親書華陽書院四字, 特遣近侍, 揭之於時烈腏享之所而致祭, 仍下備忘曰: "人主尊賢, 出於至誠, 則亦庶幾定士趨而息邪說。" 竝令此敎, 鏤而同揭。 又於大行大王代理之初, 下敎曰: "近日事, 處分定而是非明, 可以不惑於百世也。 事關斯文, 顧不重歟? 予意汝遵, 莫之或撓。" 凡有一分秉彝之性, 稍知父子、君臣之倫者, 則其孰敢毁斥背悖, 而惟彼昱、范甲輩, 乃敢於仙馭賓天之後, 甘爲凶徒之驅使, 群起跳踉, 傅會不成說不近理之言, 勒加於三朝尊禮之先正, 顯斥肅廟之遺訓, 敢懷壞毁之計。 光佐輩入侍游辭, 至以丙申大處分, 謂非聖考之本意, 遽撤道峰之俎豆, 噫嘻痛矣! 且先正臣權尙夏, 卽時烈之嫡傳也。 蔚爲一世之儒宗, 每蒙肅廟之褒寵, 至於溫宮賜對, 親自握手, 天語懇眷, 此實千古所未聞之恩禮。 逆冕之孫致雲爲名者, 附麗凶黨, 世濟其惡, 搆捏誣辱, 無復餘地, 以至於追奪官爵。 此輩之必欲甘心於兩先正者, 蓋有其由。 一則敢逞怨毒之心於肅廟也, 一則爲宣擧、拯而報復也。 蓋宣擧, 於江都虜亂時, 與金益兼等諸人, 約死, 至曰: "古人臨亂, 先殺妻子", 手縊其懷孕之妻, 及夫諸人殺身之後, 宣擧獨自偸生, 改名宣卜, 爲珍原君執鞚而逃還, 與攻朱子、誣孝廟之賊鐫, 結爲心腹, 潛通書尺, 譏誣孝廟, 至謂之 "康王實在軍前。" 又謂: "句踐詐乎, 延廣狂矣。" 其子拯則又以其父之不死, 爲十分道理, 至有抵書史局, 不憚其誣親, 末乃於父事之地, 反戈倒攻, 肅廟所以嚴辭峻斥, 至施追奪、撤院之典於宣擧、拯者也。 今日凶徒之毁棄我肅廟之遺訓者, 亦從宣、拯之無父無君家法中出來也。 伏乞亟正群凶不道之罪, 仍命攸司, 亟擧復享、給牒之典。
又曰:
李義淵, 眞憂時慷慨之士, 而奸凶齊起, 迭相請罪。 泰億突入, 游辭脅迫, 而至於益寬、明彦, 則推而上之於殿下之躬, 公肆誣辱, 推殿下於不識倫常之地, 又敢歸之於德其定策之功, 有所容貸之科。 尤可痛者, 弼夢、巨源、宗厦、容等, 徒懷護黨之心, 不念聖躬之被誣, 乃以不近理之說, 脅持君父。 至於鍾坐、蹀血等語, 此實覆載所不容之罪, 彼時模身居臺地, 敢生伸救之計, 以不思出處等語, 營護賊鏡, 欲掩其罪, 賊模之罪, 與一鏡無甚異同。 外補遠邑, 實是寬典, 而彼泰億, 以母子相離之言, 營救不已, 終至改邑。 噫嘻痛矣! 頃日閔鎭遠之放釋也, 以先后之靈, 必將惻然爲敎, 而賊會必欲反聖敎辭意, 乃以先后, 想必痛惡等語, 筆之於書。 究其心跡, 萬戮猶輕, 滿廷臣僚, 無一公議。 及至賊模之出補也, 擧其母子相離之可矜, 彼泰億, 若有顧藉仁顯王后同己之情, 而推恕府夫人之情境, 則比時模之母, 輕重果何如也? 噫! 光佐輩, 以肅廟丙申處分, 歸之於非先王本意, 則何不先加光佐以義淵之律, 只使忘身爲國之一箇義淵, 徒罹此陰刑極律哉? 臣恐消災之擧, 反爲招災之端也。 伏乞聖明, 廓揮乾斷, 快正泰億、寬、彦等諸人之罪, 以振頹綱, 以答天譴。
政院啓曰: "朴趾赫之疏, 語意凶悖, 百倍於膺福。 請一經睿覽, 明賜處分。" 敎曰: "鄕儒朴趾赫等, 敢護義淵, 誣詆大臣, 極邊定配。"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32면
-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思想)
- [註 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