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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실록 10권, 경종 2년 12월 16일 정묘 2번째기사 1722년 청 강희(康熙) 61년

청 강희의 유조(遺詔)

전부 칙사(傳訃勅使) 액진나(額眞那)·오이태(吳爾泰)가 서울에 도달하니, 임금과 왕세제(王世弟)가 백포(白袍)에 익선관(翼善冠)·오서대(烏犀帶)를 갖추고 칙사를 모화관(慕華館)에서 맞이하여 먼저 돈의문(敦義門)을 경유하여 환궁(還宮)하고, 칙사(勅使)는 숭례문(崇禮門)을 경유하여 이어서 이르렀다. 또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공손히 맞이하니, 칙사가 전(殿)에 올라 칙서(勅書)를 안상(案上)에 놓았다. 임금이 4배(四拜)하고 분향(焚香)하여 서계(西階)로부터 전(殿)에 올라 북향하여 서니, 칙사가 ‘제서(制書)가 있다.’고 일컬었다. 꿇어앉아서 받고 제자리로 내려갔다. 선칙(宣勅)한 칙서(勅書)는 곧 강희 황제(康熙皇帝)의 유조(遺詔)였는데, 이르기를,

"이제까지 제왕(帝王)이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데는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을 본받는 것으로써 첫째의 임무로 삼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을 본받는 실제는 원방의 백성을 순종시키고, 가까운 인국을 잘 다스려서 창생(蒼生)을 편안하게 양육하는 데 있다. 사해(四海)가 함께 하는 이로움으로 이로움을 삼고, 천하(天下)를 하나로 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 위태하지 않은 데에서 나라를 보위하고, 어지럽지 않은 데에서 정치를 도모하되,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부지런하여 자나깨나 쉴 겨를이 없으면, 구원(久遠)한 국가의 계책을 이루는 데 거의 가까울 것이다. 짐(朕)은 나이가 70에 이르고, 제위(帝位)에 있은 지 61년이 되지만, 실로 천지(天地)와 종사(宗社)의 말 없는 도움에 힘입었으며, 짐(朕)의 양덕(涼德)662) 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사책(史冊)을 두루 보건대 황제(黃帝) 갑자년에서부터 지금까지 4천 3백 50여 년에 3백 1인의 제왕(帝王)이 함께 하였지만, 짐(朕)과 같이 오랫동안 재위(在位)한 자는 매우 적었다. 짐(朕)은 임어(臨御)한 지 20년에 이르도록 시세(時勢)를 미리 헤아리지 못하였고, 30년에 이르도록 30년의 시세를 미리 헤아리지 못하고 40년에 이르렀으며, 이제 61년에 이르렀다. 《상서(尙書)》 홍범(洪範)에 기재된 1은 수(壽)라 하고, 2는 부(富)라 하고, 3은 강녕(康寧)이라 하고, 4는 유호덕(攸好德)이라 하고, 5는 고종명(考終命)이라 하였으니, 5복(五福) 중에 고종명(考終命)을 다섯째로 열거한 것은 진실로 얻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제 짐(朕)의 나이가 벌써 구로(耉老)에 올랐고, 부(富)는 천하에 두었고, 자손(子孫)은 1백 50여 인이고, 천하(天下)가 안락(安樂)하니, 짐의 복(福) 또한 후하다고 할 것이니, 곧 더러 미리 헤아리지 못한 것은 있었으나, 마음 또한 태연(泰然)하다. 생각하건대 짐이 등극한 이래로 비록 감히 스스로 이풍 역속(移風易俗)663) 하고 가급 인족(家給人足)664) 하였다고 할 수는 없으나, 위로는 삼대(三代)의 명성(明聖)한 임금을 본받아 천하[海宇]를 승평(昇平)하게 하고, 인민을 낙업(樂業)하게 하려고 부지런히 힘써 쉬지 않고 일하였다. 삼가 조심하여 공경하고 근신하며,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쉴 겨를이 없이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며 수십 년이 지나도록 하루처럼 마음과 힘을 다하였으니, 이 어찌 겨우 ‘노고(勞苦)’ 두 글자만으로 포괄할 수 있겠는가?

전대(前代)의 제왕(帝王)으로 혹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면, 사론(史論)은 대개 주색(酒色) 때문에 초래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모두 서생(書生)이 기평(譏評)하기를 좋아한 것이다. 비록 순전(純全)하고 진미(盡美)한 임금이라도 또한 반드시 하자(瑕疵)를 찾아낼 수 있으니, 짐(朕)이 이제 전대(前代)의 제앙(帝王)을 위하여 분명히 가려서 말하면, 대개 천하(天下)의 일이 많은 것으로 연유하여 고달프고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초래한 것이다. 제갈양(諸葛亮)이 이르기를,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에 이바지하되 죽은 뒤에 그친다.’고 하였으니, 인신(人臣)이 된 자는 오직 제갈양과 같이 할 수 있어야 하나, 만약 제왕(帝王)의 자견(仔肩)665) 이 매우 중대하다면 방관하여 맡길 수 없으니 어찌 신하(臣下)에게 견줄 수 있겠는가? 신하는 벼슬살이할 수 있으면 벼슬살이하고, 그만둘 수 있으면 그만두고, 연로(年老)하면 치사(致仕)666) 하여 돌아가 아들을 안고 손자를 얼르면서 오히려 유유 자적(悠悠自適)하겠지만, 임금이 된 자는 평생 동안 부지런히 일해도 끝내 휴식(休息)할 날이 없다. 순(舜)임금과 같은 이는 비록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스렸다고 일컬으나 몸은 창오(蒼梧)에서 죽었고, 우(禹)임금은 4년이나 배를 타느라고 손에 못이 박히고 발이 갈라져서 회계(會稽)에서 끝을 마치었다. 이와 같이 모두 정사(政事)에 근로(勤勞)하여 순행(巡行)하며 두루 돌아다니느라 편히 쉴 겨를이 없으니, 어찌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을 숭상하여 청정(淸靜)함을 스스로 지키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주역(周易)》 둔괘(遯卦) 육효(六爻)에 일찍이 인주(人主)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임금은 편안히 쉴 곳이 없음을 볼 수 있으며, 퇴장(退藏)667) 하여도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은 진실로 이것을 위함이다.

예로부터 천하(天下)의 올바름을 얻은 이로서 우리 조정의 태조(太祖)·태종(太宗)과 같은 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천하를 취할 마음이 없었으나, 일찍이 군병이 경성(京城)에 미치자, 모든 대신(大臣)들이 다 이르기를, ‘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태종 황제(太宗皇帝)께서는 이르기를, ‘명(明)나라와 우리 나라는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이제 취하려고 마음먹으면 매우 쉽겠지만, 생각이 중국(中國)의 임금에 관계되니 차마 취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뒤에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이 경성(京城)을 공파(攻破)하여 숭정(崇禎)668) 이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신민(臣民)이 서로 이끌고 와서 맞이하여 바로 틈구(闖寇)를 전멸(翦滅)하고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전례(典禮)를 상고하고 조사하여 숭정(崇禎)을 안장(安葬)하였다. 옛날 한 고조(漢高祖)는 사상 정장(泗上亭長)이었고, 명(明) 태조(太祖)는 황각사(皇覺寺)의 중[僧]이었다. 항우(項羽)가 군사를 일으켜 진(秦)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천하(天下)는 졸지에 한(漢)나라로 돌아갔으며, 원말(元末)에 진우량(陳友諒) 등이 봉기(蜂起)하였으나 천하는 갑자기 명(明)에 돌아갔다. 우리 조정은 전열(前烈)을 계승하여 하늘에 순응하고 인심에 순종하였으며, 이어서 구획(區劃)을 두었으니, 이 때문에 난신 적자(亂臣賊子)를 보면 진주(眞主)를 위하여 구제(驅除)하여야 한다. 무릇 제왕(帝王)은 스스로 천명(天命)이 있으니, 마땅히 수구(壽耉)를 누릴 자에게 수구를 누리지 못하도록 할 수 없으며, 태평(太平)을 누릴 자에게 태평을 누리지 못하도록 할 수 없다.

짐(朕)이 어려서부터 독서(讀書)하여 고금(古今)의 도리(道理)에 대략 통효(通曉)할 수 있었고, 또 나이와 기력이 왕성할 때에는 50석(石) 무게의 활을 당기고, 13파(把)의 화살을 쏠 수 있었으며, 군사를 써서 임용(臨戎)669) 하는 일도 모두 뛰어났었다. 그러나 평생 동안 일찍이 망령되게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삼번(三藩)을 평정(平定)하고 막북(漠北)670) 을 깨끗이 소탕할 때에는 모두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내었으며, 호부(戶部)의 탕금(帑金)을 운주(運籌)할 때에는 군사를 부리든가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는 일이 아니면 감히 망령되게 소비하지 않았으니, 모두 백성의 기름[脂膏]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순수(巡狩)하는 데 있던 행궁(行宮)에는 수놓은 비단[綵繢]을 베풀지 않았고, 처소(處所)마다 드는 비용은 1, 2만금(萬金)에 지나지 않았으니, 하공(河工)의 세비(歲費) 3백여 만에 비교하면 1백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옛날에 양 무제(梁武帝) 또한 창업한 영웅(英雄)이나 나중에 모년(耄年)671) 에 와서는 후경(侯景)에게 핍박받는 대성(臺城)의 화(禍)672) 가 있었고, 수 문제(隋文帝) 또한 개창(開創)한 임금이나, 미리 그의 아들 양제(煬帝)의 악독함을 알수 없어 마침내 영종(令終)673) 하지 못하였으니, 모두가 일찍 변정(卞正)하지 못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짐(朕)은 자손(子孫)이 1백여 인이고 나이가 70인데, 제왕(諸王)·대신(大臣)·관원(官員)·군민(軍民)과 몽고인(蒙古人) 등에 미치기까지 애석(愛惜)해 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짐(朕)은 나이가 늙은 사람이니, 이제 비록 수명을 다하여 죽는다 하더라도 짐 또한 유쾌하고 기쁘다. 태조 황제(太祖皇帝)의 아들에 이르러서는 예친왕(禮親王)·요여왕(饒餘王)의 자손이 현재 모두 각각 안전(安全)하니, 짐이 죽은 뒤에 너희들이 각각 능히 협심(協心)하여 보전(保全)한다면, 짐 또한 흔연(欣然)히 편안하게 죽을 것이다. 옹친왕(雍親王)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은 인품이 귀중(貴重)하여 짐의 몸을 매우 닮았으니, 반드시 대통(大統)을 승계하여 짐의 등극한 터전을 착실하게 이을 수 있을 것이다. 황제위(皇帝位)에 나아가면 전례(典禮)를 준수하여 지복(持服)674) 하되, 27일에 상복을 벗고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하여 다 알도록 하라."

하였다. 읽기를 끝마치어 임금이 곡(哭)하고 4배(四拜)하니, 세제(世弟)와 백관(百官)도 모두 4배하였다. 임금이 서계(西階)로부터 전(殿)에 올라 동향하여 서고, 칙사가 동계(東階)로부터 올라가 서향하여 섰는데, 칙사가 제배(除拜)하고 읍(揖)만 행하기를 청하므로, 읍(揖)만 하고 파하여 자리에 나아가 앉아서 상사(喪事)를 위문하고 행차를 위로하였다. 칙사가 감사하다는 뜻으로 치사(致謝)가 많았다. 설다(設茶)하기를 청하니, 칙사가 상사(喪事)로 사양하였다. 다시 권고하고는 중지하여 다시 강요하지 않았다. 칙사(勅使)가 동계(東階)로부터 내려와 관소(館所)로 가니, 임금이 서계(西階)로부터 내려와 섬돌 끝에서 지송(砥送)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71면
  • 【분류】
    외교-야(野) / 왕실-의식(儀式)

  • [註 662]
    양덕(涼德) : 박덕(薄德).
  • [註 663]
    이풍 역속(移風易俗) : 나쁜 풍속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함.
  • [註 664]
    가급 인족(家給人足) :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함.
  • [註 665]
    자견(仔肩) : 책임.
  • [註 666]
    치사(致仕) : 나이가 많으므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 《주례(周禮)》에는 칠십 치사(七十致仕)라 하였음.
  • [註 667]
    퇴장(退藏) : 퇴은(退隱).
  • [註 668]
    숭정(崇禎) : 명(明)나라 의종(毅宗)의 연호(年號).
  • [註 669]
    임용(臨戎) : 싸움에 임함.
  • [註 670]
    막북(漠北) : 고비 사막의 북방 지방.
  • [註 671]
    모년(耄年) : 7, 80세의 나이.
  • [註 672]
    후경(侯景)에게 핍박받는 대성(臺城)의 화(禍) : 양 무제(梁武帝)가 처음에는 유학(儒學)을 중히 여겼으나, 뒤에는 불교(佛敎)를 숭상하여 대성(臺城)에 다 동태사(同泰寺)를 짓고 이곳에서 세 번이나 사신(捨身)을 하였으며, 모든 제사에 희생(犧牲)을 없애고 면(麪)으로 대신하게 하였음. 후에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켜 대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그곳에서 굶어 죽었음.
  • [註 673]
    영종(令終) : 선사(善死).
  • [註 674]
    지복(持服) : 복상(服喪).

○傳訃勅使額眞那吳爾泰至京, 上及王世弟具白袍、翼善冠、烏犀帶, 迎勑於慕華館, 先由敦義門還宮, 勑使由崇禮門繼至。 又祗迎於仁政殿庭, 勑使升殿, 置勑書於案上。 上四拜焚香, 由西階升殿, 北向立, 勑使稱有制, 跪而受之, 降復位。 宣勑勑書, 卽康熙皇帝遺詔也。 有曰:

從來帝王之治天下, 未嘗不以敬天法祖爲首務。 敬天法祖之實, 在柔遠能邇, 休養蒼生, 共四海之利, 爲利一天下之心爲心, 保邦於未危, 圖治於未亂, 夙夜孜孜, 寤寐不遑, 爲久遠之國計, 庶乎近之。 朕年屆七十, 在位六十一年, 實賴天地宗社之默祐, 非朕涼德之所至也。 歷觀史冊, 自黃帝甲子, 迄今四千三百五十餘年, 共三百一帝, 如朕在位之久者甚少。 朕臨御至二十年時, 不能逆料至三十年, 三十年時, 不能逆料至四十年, 今至六十一年矣。 《尙書》 《洪範》所載, 一曰壽, 二曰富, 三曰康寧, 四曰攸好德, 五曰考終命。 五福以考終命, 列於第五者, 誠以難得故也。 今朕年已登耉, 富有四海, 子孫百五十餘人, 天下安樂, 朕之福亦云厚矣, 卽或有不虞, 心亦泰然。 念自御極以來, 雖不敢自謂移風易俗, 家給人足, 上擬三代明聖之主, 而欲其海宇昇平, 人民樂業, 孜孜汲汲, 小心敬愼, 夙夜不遑, 未嘗少懈, 數十年來, 殫心竭力, 如一日, 此豈僅勞苦二字所能該括耶? 前代帝王, 或享年不永, 史論槪以爲酒色所致, 此皆書生好爲譏評。 雖純全盡美之君, 亦必抉摘瑕疵。 朕今爲前代帝王, 剖白言之, 蓋由天下事繁, 不勝勞憊之所致也。 諸葛亮云: "鞫躬盡瘁, 死而後已。" 爲人臣者, 惟諸葛亮, 能如此耳。 若帝王仔肩甚重, 無可旁諉, 豈臣下所可比擬? 臣下可仕則仕, 可止則止, 年老致政而歸, 抱子弄孫, 猶得優遊自適, 爲君者, 勤劬一生, 了無休息之日。 如雖稱無爲而治, 然身沒於蒼梧, 乘四載, 腁手胝足, 終於會稽。 似此皆勤勞政事, 巡行周歷, 不遑寧處, 豈可謂之崇尙無爲, 淸靜自持乎? 《易》 《遯卦》六爻, 未嘗言及人主之事, 可見人主無宴息之地, 可以退藏, 鞠躬盡瘁, 誠爲此也。 自古得天下之正, 莫如我朝太祖、太宗。 初無取天下之心, 嘗兵及京城, 諸大臣咸云: "當取。" 太宗皇帝曰: "與我國, 素非和好, 今欲取之甚易, 但念係中國之主, 不忍取也。" 後流賊李自成攻破京城, 崇禎自縊, 臣民相率來迎, 乃翦滅闖寇, 入承大統, 稽査典禮, 安葬崇禎。 昔 高祖, 泗上亭長, 太祖, 皇覺寺僧。 項羽起兵攻, 而天下猝歸於, 陳友諒等蜂起, 而天下猝歸於。 我朝承席前烈, 應天順人, 繼有區宇, 以此見亂臣賊子, 爲眞主驅除也。 凡帝王, 自有天命, 應享壽耉者, 不能使之不享壽耉, 應享太平者, 不能使之不享太平。 朕自幼讀書, 於古今道理, 粗能通曉, 又年力盛時, 能彎五十石弓, 發十三把箭, 用兵臨戎之事, 皆所優爲。 然平生未嘗妄殺一人。 平定三藩, 掃淸漠北, 皆出一心運籌。 戶部帑金, 非用師賑饑, 未敢妄費, 謂皆小民脂膏故也。 所有巡狩行宮, 不施綵繢, 每處所費, 不過一二萬金, 較之河工歲費三百餘萬, 不及百分之一。 昔 武帝亦創業英雄, 後及耄年, 爲侯景所逼, 有臺城之禍, 文帝亦開創之主, 不能預知其子煬帝之惡, 卒致不克令終, 皆由卞之不早也。 朕之子孫百有餘人, 朕年七十, 諸王、大臣、官員、軍民, 以及蒙古人等, 莫不愛惜。 朕年邁之人, 今雖以壽終, 朕亦愉悅。 至若太祖皇帝之子, 禮親王饒餘王之子孫, 現今俱各安全, 朕身後, 爾等各能協心保全, 朕亦欣然安逝。 雍親王皇四子胤禛, 人品貴重, 深肖朕躬, 必能克承大統, 着繼朕登基。 卽皇帝位, 則遵典禮持服, 二十七日釋服, 布告中外, 咸使聞知。

讀訖, 上哭四拜, 世弟及百官皆拜。 上由西階上殿, 東向立, 勑由東階升, 西向立, 勑請除拜行揖, 揖罷, 就位坐, 慰喪勞行, 勑使多致感謝之意。 請設茶, 勑使以喪辭。 再勸而止, 不復强之。 勑使降自東階, 往館所, 上降自西階, 沒階而送之。


  •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71면
  • 【분류】
    외교-야(野)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