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을 원찬하라는 청을 따르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진유(李眞儒)가 장법(贓法)을 엄중히 하고 염리(廉吏)를 장려하기를 청하였다. 이어서 증(贈) 참판(參判) 이명준(李明俊)·고(故) 감사(監司) 송정규(宋廷奎)·고(故) 목사(牧使) 김두남(金斗南)·고(故) 도정(都正) 강석범(姜錫範)의 빙벽(氷檗) 같은 조행을 천거하면서도 그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여 조정에서 진휼(軫恤)하는 뜻을 보이기를 청하고, 승지(承旨) 박필몽(朴弼夢)이 고(故) 판서(判書) 윤지인(尹趾仁)의 청렴 결백한 절조를 이어서 진달하고, 그 처(妻)에게 늠료(廩料)를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여 양건(兩件)을 독주(讀奏)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승지(承旨)와 옥당(玉堂)에서 반복하여 번갈아 아뢰고 힘껏 쟁집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의 전계(前啓)도 따르지 않았다. 김유경(金有慶)을 원찬(遠竄)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처음에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대답하였는데, 김일경(金一鏡)이 이르기를,
"김유경은 출입(出入)하고 시종(侍從)하는 사람으로서 의주 부윤이 되어서도 역적 이정식(李正植)을 막비(幕裨)에 두었고, 황해도 감사가 되어서도 감영(監營)의 곡식을 획급(劃給)하여 적당(賊黨)의 요구에 곡진하게 부응하였으니, 어찌 죄(罪)가 없다고 하여 오래도록 유윤(兪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이 이르기를,
"이 계청은 신이 제일 먼저 꺼낸 것입니다. 김유경의 죄는 조금도 용서할 만한 단서가 없으니, 유윤(兪允)을 내리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司諫) 정해(鄭楷)·헌납(獻納) 이명의(李明誼)가, 동료(同僚)가 이덕수(李德壽)를 삭판(削版)하라는 계청을 성급하게 정지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정언(正言) 유언통(兪彦通)이 대각에 이제 막 들어와 소솔(疏率)하여 정계(停啓)하였다 하여 인피하고, 대사간(大司諫) 김동필(金東弼)이 혐의를 무릅쓰고 처치를 담당한 것은 불가(不可)하였다고 인피하고는 모두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임금이 즉위한 이래로 3년 동안 친히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본 적이 대개 많지 않았으므로, 군신(群臣)이 늘 조회의 성의(盛儀)를 보지 못하였다 하여 겸결(歉缺)하게 여기었는데, 이제 양복(陽復)의 달에 갑자기 상참(常參)을 행하여 보고 들음이 미치는 곳마다 용동(聳動)하지 않음이 없으니, 분발하는 성심(聖心)을 다 축하함이 오늘부터 비롯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54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왕실-사급(賜給) / 사법-탄핵(彈劾)
○吏曹參議李眞儒, 請嚴贓法奬廉吏。 仍擧贈參判李明俊、故監司宋廷奎、故牧使金斗南、故都正姜錫範氷蘗之操, 請錄用其子孫, 以示朝家軫恤之意, 承旨朴弼夢, 繼陳故判書尹趾仁廉白之節, 請廩給其妻。 上竝許之。 兩司讀奏合啓兩件, 上曰: "勿煩。" 承旨、玉堂, 反復迭奏, 力爭不已, 上終不許。 府前啓, 不從。 至金有慶遠竄事, 始答以勿煩。 一鏡曰: "有慶以出入侍從之人, 爲灣尹, 則以逆植置之幕裨, 爲海伯則劃給營穀, 曲副賊黨之求, 烏得無罪, 而久靳允兪乎?" 持平金始燁曰: "此啓, 臣所首發, 而有慶之罪, 少無可恕之端, 宜賜允兪。" 上從之。 司諫鄭楷、獻納李明誼, 以同僚徑停李德壽削版之啓, 引避, 正言兪彦通, 以新入臺地, 踈率停啓, 引避, 大司諫金東弼, 以不可冒當處置, 引避, 竝退待。 自上卽阼以來, 三年之間, 臨朝視事, 蓋不多日, 群下每以未覩朝會之盛儀, 爲歉缺矣。 今於陽復之月, 忽行常參, 瞻聆所及, 莫不聳動, 咸祝奮發之聖心, 自今日始矣。
-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54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왕실-사급(賜給)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