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 윤지술이 지문에 신사년·병신년의 일을 기록할 것을 청하다
태학(太學)의 재생(齋生)들이 권당(捲堂)139) 하였다. 대사성(大司成) 황귀하(黃龜河)가 여러 유생들을 불러 그 연유를 물으니, 장의(掌議)140) 윤지술(尹志沭)이 소회(所懷)를 써서 올렸는데, 이르기를,
"신(臣)은 지문(誌文) 가운데 신사년141) ·병신년142) 두 해의 미진한 일에 대하여 개정하기를 청할 뜻으로 발론(發論)하였는데, 한 사람도 호응(呼應)하는 사우(士友)가 없었고 하재생(下齋生)143) 들도 거의 모두가 모피(謀避)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재임(齋任)144) 으로서 이 일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낭패를 당했으니 어떻게 태연하게 입당(入堂)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진달하고자 하는 바를 이로 인하여 모두 밝히겠습니다.
아! 우리 선대왕(先大王)의 정교(政敎)와 훈계는 언제나 법칙에 꼭 맞았으며, 전후의 사업은 뭇 임금보다 뛰어났으니, 신사년과 병신년에 있었던 일과 같은 경우 그 처변(處變)의 중도(中道)를 얻은 것과 정성을 다하여 정도(正道)를 호위한 것은 실로 천고(千古)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지어 올린 유궁(幽宮)145) 의 지문(誌文)을 보면, 신사년의 일은 숨기고 쓰지 않았으며, 병신년의 일은 그 말을 은밀하게 표현하여 옳고 그른 것을 뒤섞이게 만들었으니, 신은 통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무릇 신사년의 변고(變故)는 은밀하여 헤아리기 어려웠는데, 선대왕께서 밝게 기미(幾微)를 통촉하여 환난을 미연에 방지하였고, 과단성을 발휘하여 헌장(憲章)을 밝게 시행함으로써 궁중(宮中)을 엄숙하게 하고 여러 사람의 울분을 풀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처분의 엄정함과 염려의 심원(深遠)함은 옛 간책(簡策)을 상고하더라도 또한 보기 드문 바입니다. 병신년의 일은 선대왕의 고명(高明)한 성학(聖學)으로 옳고 그름을 밝게 분변하여 이미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한 죄를 바로잡았고, 또 우리 전하께 경계하시어 흔들림이 없게 하였으니, 무릇 우리 선왕의 신자(臣子)가 된 자라면 누군들 후세(後世)에 본보기가 됨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이명은 흰 머리의 늙은 나이에 이해(利害)만을 살피고 갖은 계교(計巧)를 다 써서 선왕의 융숭한 은혜를 잊어버린 채 후일 참적(讒賊)의 구실거리를 만들었으니, 이 어찌 인신(人臣)으로서 차마 할 일이겠습니까? 공의(公議)가 떠들썩하자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어버이를 위하여 숨김이 옳다는 말로 의리를 삼고, 전하께 참으로 어버이를 위하여 숨길 일이 있으며, 신자(臣子)된 자도 당연히 숨길 의(義)가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아! 이 무슨 말입니까? 오직 우리 선대왕께서 조종(祖宗)의 소중한 부탁을 받아 전하에게 전하였고, 전하께서는 새로 보위(寶位)에 올라 사직(社稷)과 백성의 주(主)가 되었으니, 전하께서 다시 사친(私親)을 돌볼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명백한 의리입니다. 하물며 신사년의 처분은 선왕께서 국가 만세(萬世)를 염려한 데에서 나온 것이며, 전후 장주(章奏)의 비답에 해와 별같이 밝은 성의(聖意)를 보이셨으니, 전하께서 다시 마음에 다른 뜻을 품을 수 없는 것이며, 또 그것이 도리에도 당연한 일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빨리 다른 대신에게 명하여 유궁(幽宮)의 지문(誌文)을 고쳐 지어 통쾌하게 사실을 밝히고, 선왕의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이 끝내 인멸(湮滅)됨이 없게 한다면 실로 국가의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황귀하가 소회(所懷)를 받아 계사(啓辭) 가운데에 실어 알리고 이내 들어가도록 권면하기를 청하니, 빨리 권면하여 들어가게 하라고 비답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36면
- 【분류】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종사(宗社) / 정론-간쟁(諫諍) / 사상-유학(儒學)
- [註 139]권당(捲堂) :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들이 불평이 있을 때 일제히 관(館)을 비우고 물러나가던 일. 공관(空館).
- [註 140]
장의(掌議) : 성균관 및 지방 향교(鄕校)의 재생(齋生) 중 으뜸가는 사람.- [註 141]
신사년 : 1701 숙종 27년.- [註 142]
병신년 : 1716 숙종 42.- [註 143]
하재생(下齋生) : 성균관의 동서 양재(兩齋)의 각 맨 아래쪽 2간(間)을 하재(下齋)라고 하는데, 여기에 거처하는 사학(四學)의 승보생(陞補生)들.- [註 144]
재임(齋任) : 성균관(成均館)·사학(四學) 등에 기숙하며 수업(受業)하는 유생(儒生) 중의 임원.- [註 145]
유궁(幽宮) : 산릉(山陵)을 말함.○辛未/太學齋生捲堂。 大司成黃龜河招諸生, 問其由, 掌議尹志述書納所懷曰:
臣以誌文, 辛巳、丙申兩年事未盡者, 請改之意發論, 而士友無一應者, 下齋生, 幾盡謀避。 臣旣以齋任, 主張是事, 而致此狼狽, 何敢晏然入堂? 然臣之所欲陳者, 庶幾因此陳暴矣。 嗚呼! 我先大王政敎、謨訓, 動合規則, 前後事業, 庶越百王, 若辛巳、丙申事, 其處變之當道、衛道之盡誠, 實千古所未有者也。 卽伏見判府事李頤命所撰進幽宮之誌, 則於辛巳事, 沒而不書, 於丙申事, 微婉其辭, 使是非相混, 臣不勝痛惋。 夫辛巳之變, 暗密難測, 而先大王明於燭幾, 謹於防患, 夬恢乾斷, 明施典章, 使宮闈肅而輿憤洩。 其處分之嚴正、志慮之深遠, 求之簡策, 亦所罕見。 若丙申事, 則先大王聖學高明, 洞辨是非, 旣明正尹拯背師之罪, 又勉戒我殿下, 毋得或撓, 凡爲我先王臣子者, 孰不思盡表章於來世, 而頤命乃於白首之年, 顧瞻利害, 費盡機巧, 忘先王隆厚之恩, 藉他日讒賊之口, 此豈人臣所可忍爲, 而及其公議譁然, 懼不可以逃罪, 則又敢以諱親之說, 作爲義理, 有若殿下眞有可諱之親, 而臣子自有當諱之義者然, 噫嘻! 此何言也? 惟我先大王, 受祖宗付托之重, 傳序於殿下, 嗣登寶位, 爲社稷、生民之主, 則殿下之不敢復有私親, 義理至明。 況辛巳處分, 寔出於先王爲國家萬世之慮, 而前後章奏之批, 明示聖意, 炳如日星, 則殿下之不敢復以他意, 存於淵衷, 又道理當然。 伏願亟命他大臣, 改撰幽誌, 痛快說去, 毋令先王盛德大業, 終至剝蝕, 實國家之大幸。
龜河受而謄聞於啓中, 仍請勸入, 批以斯速勸入。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36면
- 【분류】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종사(宗社) / 정론-간쟁(諫諍) / 사상-유학(儒學)
- [註 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