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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보궐정오 65권, 숙종 46년 4월 22일 무오 1번째기사 1720년 청 강희(康熙) 59년

전 홍문관 부제학 최창대의 졸기

전(前)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최창대(崔昌大)가 졸(卒)하였다. 최창대의 자(字)는 효백(孝伯)이요 호(號)는 곤륜(昆侖)으로, 문정공(文貞公) 최석정(崔錫鼎)의 아들이다. 청명(淸明)하고 고랑(高朗)하여 빛나기가 빙옥(氷玉)과 같았고, 가학(家學)을 계승하여 경전(經傳)과 백가(百家)를 깊이 연구하였다. 신령한 마음과 지혜로운 식견은 거의 소광(昭曠)005) 의 근원을 보았으므로, 비록 횡역(橫逆)과 원감(怨憾)에 처하였으나 의론이 항상 공정하여 털끝만큼도 분노한 기색이 없었다. 경악(經幄)에 출입하면서 규절(規切)006) 한 바가 많았고, 임금의 비위를 거스리는 일을 피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항상 어긋나 방랑하였기 때문에 조정에 나가서 벼슬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만년에 유수(留守)에 발탁되었으나 선무(先誣)007) 를 끌어대고 임하지 않으니, 자질(資秩)을 회수하였다. 이때 선배(先輩)는 조락(凋落)하고 사류(士流)는 물러나 있으니, 최창대가 관위(官位)는 비록 높지 않았으나 세도(世道)의 책임이 의지하여 경중(輕重)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졸(卒)하니 나이 쉰 둘이었다. 조야(朝野)가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겼으며, 비록 취향을 달리하는 자라 할지라도 또한 애도하였다. 최창대는 일찍이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났는데, 체재(體裁)가 균정(均停)하고 사리(辭理)가 구도(俱到)하여 박세당(朴世堂)·김창협(金昌協) 등 몇 사람과 서로 경쟁할 수 있다고 한다.


  • 【태백산사고본】 73책 6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22면
  • 【분류】
    인물(人物)

  • [註 005]
    소광(昭曠) : 소(昭)는 명(明), 광(曠)은 광(廣)과 같은 뜻으로, 명백(明白)·광대(廣大)한 것을 말함.
  • [註 006]
    규절(規切) : 친절히 경계하여 바로잡음.
  • [註 007]
    선무(先誣) : 선대의 무함.

○戊午/前弘文館副提學崔昌大卒。 昌大孝伯, 號昆侖, 文貞公 錫鼎子也。 淸明高朗, 炯如氷玉。 承家學, 深究經傳、百家, 靈心慧識, 殆見昭曠之源。 雖處橫逆、怨憾, 而議論常公, 無一毫忿懥氣。 出入經幄, 多所規切, 不避觸忤。 以此常齟齬留落, 立朝無幾時。 晩擢居留, 引先誣不赴, 收資秩。 時, 先輩凋零, 士流廢屛, 昌大雖官位未尊, 而世道之責, 倚爲輕重焉。 至是遽卒, 年五十二。 朝野痛惜之, 雖異趣者, 亦爲之嗟悼。 昌大早以文章名, 體裁均停, 辭理俱到, 可與朴世堂金昌協數人竝駕云。


  • 【태백산사고본】 73책 6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22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