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중추부사 최석정의 졸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졸(卒)했다. 최석정은 자(字)가 여화(汝和)이고, 호(號)가 명곡(明谷)인데, 문충공(文忠公) 최명길(崔鳴吉)의 손자이다. 성품이 청명(淸明)하고 기상(氣像)이 화락(和樂)하고 단아(端雅)했으며, 총명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어려서 남구만(南九萬)과 박세채(朴世采)를 따라 배웠는데, 이치를 분별하여 깨달아 12세에 이미 《주역(周易)》에 통달하여 손으로 그려서 도면을 만드니, 세상에서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구경(九經)과 백가(百家)를 섭렵하여 마치 자기 말을 외듯이 하였는데, 이미 지위가 고귀해지고 늙었으나 오히려 송독(誦讀)을 그치지 않으니, 경술(經術)·문장(文章)·언론(言論)과 풍유(風猷)가 일대 명류(名流)의 종주가 되었다. 산수(算數)와 자학(字學)에 이르러서는 은미(隱微)한 것까지 모두 수고하지 않고 신묘하게 해득(解得)하여 자못 경륜가(經綸家)로서 스스로 기약하였다. 열 번이나 태사(台司)004) 에 올라 당론(黨論)을 타파하여 인재(人才)를 수습하는 데 마음을 두었으며, 《대전(大典)》을 닦고 밝히는 것을 일삼았다. 신사년005) 에 세 번 차자를 올려 미움받았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이 하기 어려워하는 것이었으니, 조태채(趙泰采)가 매복(枚卜)에서 대신(大臣)의 풍도가 있다고 했다. 소관(小官)에 있을 때부터 임금의 권애(眷愛)가 특별하여 만년까지 쇠하지 않자, 당인(黨人)들이 이를 매우 시기하여 처음에는 경서(經書)를 훼파(毁破)하고 성인을 업신여겼다고 무함하다가 마침내 시병(侍病)하는 데 삼가지 않았다고 구죄(構罪)하니, 하루도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편안히 지내면서 끝내 기미(幾微)를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너그러운 도량에 감복하였다. 만년에는 더욱 경외(京外)를 왕래하다가 황야(荒野)에서 죽으니, 식자(識者)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문식이 지나치고 또 경솔하여 절실함이 깊지 못하였다. 정치를 논함에 있어서도 긴요한 듯하면서 실지로는 범연하여 남구만(南九萬)처럼 독실하고 정확(精確)하지는 못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며, 태묘(太廟)에 배향(配享)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64책 56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64면
- 【분류】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
○癸卯/判中樞事崔錫鼎卒。 錫鼎字汝和, 號明谷, 文忠公 鳴吉之孫。 淸明愷悌, 敏悟絶人。 幼從南九萬、朴世采學, 刃解氷釋, 十二已通《易》, 手畫爲圖, 世稱神童。 九經、百家, 靡不通涉, 如誦己言, 旣貴且老, 猶誦讀不輟, 經術、文章、言論、風猷, 爲一代名流之宗。 以至算數、字學, 隱曲微密, 皆不勞而得妙解, 頗以經綸自期。 十登台司, 以破黨論, 收人才爲心, 以修明《大典》爲事。 辛巳三箚, 受疾於己言人所難拔, 趙泰采於枚卜, 有大臣風。 自在小官, 上眷殊異, 晩而不衰, 黨人甚忌之, 始以毁經侮聖, 誣之, 終以侍疾不謹, 構之, 不得一日安於朝廷, 處之晏如, 終無幾微見於色, 人服其雅度。 晩益棲屑, 卒於荒野, 識者恨之。 然文勝且率爾, 不能切深, 論治似要而實泛, 不若南九萬之篤實精確焉。 諡文貞, 配享太廟庭。
- 【태백산사고본】 64책 56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64면
- 【분류】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