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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61권, 숙종 44년 5월 12일 경신 2번째기사 1718년 청 강희(康熙) 57년

정택하의 부당함을 논한 황해·경기·충청 3도의 유생 권준 등의 상소문

황해도·경기·충청도 3도의 유생 권준(權踆)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을 종향(從享)하자는 청이 호남 지방에서 일어났는데, 이승운(李升運) 등이 그 요사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였으나 저하(邸下)께서 사정(邪正)의 분별을 통촉하시어 먼 곳에 내쫓는 형전을 시행하였습니다. 지난번 삼도(三道)의 유생[章甫]들이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도 아울러 종향(從享)할 것을 거론하여 같은 목소리로 진청(陳請)하였는데, 또 정택하(鄭宅河)란 자가 있어 헐뜯고 욕하는 요사스런 말을 함부로 내뱉은 것이 이승운 등과 같은 심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그에는 따뜻한 비답을 내리시고 ‘의견이 없지 않다.’고 허락하셨으니, 사방에서 이것을 듣고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 등이 삼가 정택하의 글을 가져다가 반복하여 살펴본 다음에야 비로소 저하께서 범연하게 하람(下覽)하셨던 탓으로 미처 그가 마음 쓴 곳을 간파하지 못한 줄을 알았습니다. 그 글의 상단에서는 송시열송준길의 도덕과 학문을 추존하면서 배향하는 데에 합당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이승운의 무리들이 오로지 당론(黨論)을 일삼았던 것과는 다릅니다. 하단에는 박세채는 배향하는 데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억누르기도 하고 드높이기도 하면서 극력 공격하지 않았으니, 이는 이승운의 무리들이 괴팍한 성품으로 추욕을 가한 것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저하의 밝으신 안목으로도 한 번 읽어보시고서는 즉시 깨달아 살피지 못한 것이 당연합니다. 대저 정택하의 질투하는 마음에 어찌 박세채를 돌아보는 것이 있어 그러하였겠습니까? 저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선 이와 같이 반흉 반길(半凶半吉)의 말을 하여 그것으로 한 번 시험해보려는 계책을 삼은 것인데, 과연 저하께서 그들의 술수에 빠졌습니다. 신 등이 그 정상을 변별하여 저하께서 성찰하시는 데에 대비하기를 청합니다. 그 글에서 송시열송준길의 자품(資品)과 도학(道學)을 논하면서 추양(推揚)한 것이 지극하였으나, 박세채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도덕의 높고 낮음과 학문의 얕고 깊음을 후생으로서 감히 엿보아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미 높고 낮음과 얕고 깊음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가 배양하는 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박세채의 도덕과 학문은 후생(後生)으로 알 수 없는 바가 없다고 한다면 송시열송준길의 도덕과 학문은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유독 박세채에 대해서는 후생·말학(末學)이 되는데, 송시열송준길에 대해서는 후생·말학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종사(從祀)하는 전례(典禮)가 얼마나 중한 것인데 이에 말속(末俗)의 사의(私意)로 그 사이에 참여하여 마치 문호(門戶)를 나누어 각기 종주(宗主)가 있는 것처럼 하니, 이것은 박세채만을 무함(誣陷)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송시열송준길도 무함하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이른바 ‘갑자기 대론(大論)이 정당(停當)된 뒤에 추후하여 발의하였다.’라고 한 것은 더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신 등은 정당(停當)된 것이란 것이 무엇이 정당된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만, 성무(聖廡)에 종사(從祀)하는 것은 지극히 엄하고도 중대한 일입니다. 따라서 일개 정택하의 가문에서 주장할 것이 아닌데, 그의 형 정민하(鄭敏河)가 처음 앞에서 아울러 거론하지 않았고 아우 정택하는 지금 또 뒤에서 저지하여 동요시키면서 스스로 정당되었다고 일컬으면서 뻔뻔스럽게도 무엄한 짓을 하니, 사람으로서 참람스럽고 요망스러운 행동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중종[中廟] 정축년175) 에 홍문관(弘文館)에서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을 종향할 것을 발론(發論)하여 진계(陳啓)하자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잇따라 일어나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를 추후 거론하고 아울러 종향하기를 청하였는데, 정몽주만이 즉시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 뒤 또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을 추후 거론하였고 그 뒤 또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추후 거론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오현 종사(五賢從祀)입니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를 종사(從祀)하자는 청은 인조(仁祖)께서 등극하신 초기에 처음으로 발의되었는데, 그 뒤 해서(海西) 지방의 유생들이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추후 거론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양현 종사(兩賢從祀)입니다. 어찌 앞서 거론한 것이 정당(停當)되었다고 하여 추후 거론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기기를 정택하의 말과 같이한 적이 있습니까? 정여창 등 세 사람의 현인을 추후 거론하여 아울러 청할 적에 혹자가 이황에게 물었더니, 이황이 대답하기를, ‘막중한 일을 경솔하게 취사(取捨)를 정하고 우열(優劣)을 판단하는 것이 또한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황 같은 고견(高見)으로서도 오히려 또 주저하면서 감당하지 못했는데, 저 정택하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에 감히 소매를 걷어붙이고 혀를 놀려 멋대로 우열을 정하는 것을 마치 어리석은 어린아이들이 그 조·부(祖父)의 연갑(年甲)을 비교하는 것과 같이 한단 말입니까? 참으로 망령된 것입니다. 신 등이 듣건대, 정택하는 시골의 유치하고 우매한 사람으로 전혀 글자도 모르는 자라고 합니다. 지금 이 상서(上書)는 특별히 이름을 빌렸을 뿐인 것으로 반드시 화(禍)를 좋아하고 일 만들기를 즐기는 무리가 형체를 감추고 숨어서 그를 사주하여 하게 한 것일 것이니, 우려스러운 것이 어찌 한때 한 사람으로 그칠 뿐이겠습니까? 이어 삼가 생각하건대, 박세채는 약관(弱冠)의 나이로 도학(道學)을 궁구하여 밤낮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염낙관민(濂洛關閩)의 학문176) 을 준칙(準則)으로 삼아 수사(洙泗)177) 를 귀착점으로 삼았으므로, 덕이 성대하고 예절이 공순하여 고명(高明)한 경지에 들어가기에 이르렀는데도 산번(山樊)에서 뜻을 지키면서 스스로 만족해 하고 즐거워 하였으므로 나이 30세가 되기 전에 훌륭한 명망이 이미 드러났었습니다. 효종[孝廟] 말년에는 특별히 궁료(宮僚)의 관직을 제수하였고, 선대왕(先大王)의 조정에서는 연달아 강원(講院)과 대헌(臺憲)의 자리로 계속 초치하였으나 끝내 왕명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성상께 큰 뜻을 분발하심에 이르러 전후 돈후하게 불렀는데, 이는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감격해서 만년에야 조정에 나왔습니다. 따라서 벼슬길에 나오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지는 쉽게 여기는 절개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은 실로 우리 성명께서 깊이 통촉하신 바이기 때문에 그가 졸(卒)하였을 적에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애도하여 말씀하기를, ‘평생의 언행은 반드시 예법을 따랐고 연석(筵席)과 장주(章奏)에는 부지런하고 간절한 것이 가슴속의 혈성(血誠)에서 유출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서로 뜻이 맞은 흐뭇함과 은례(恩禮)로 높여준 것이 가위 천년 동안에 두 번 없는 일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차이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말로 바로 저하께서 우러러 몸받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지난번 정택하의 글에서 진달한 문순공(文純公)의 일은 내가 범연히 본 것임을 면하지 못했던 탓으로 뜻 둔 곳을 간파하지는 못하였는데, 헌신(憲臣) 【대사헌 이택(李澤)이다.】 의 글을 보게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대답한 글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지금 이 여러 선비들의 상서와 변론이 매우 명백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다만 정택하의 말을 이승운과 비교할 수는 없으니, 똑같이 감처(勘處)하는 것은 처분이 지나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9책 61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9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175]
    정축년 : 1517 중종 12년.
  • [註 176]
    염낙관민(濂洛關閩)의 학문 :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정이(鄭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가 제창한 유교(儒敎). 곧 송학(宋學)을 말함.
  • [註 177]
    수사(洙泗) : 공자가 제자들에게 도(道)를 가르치던 곳에 있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전(轉)하여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가리키는 말로 쓰임.

黃海京畿忠淸三道儒生權踆等上書。 略曰:

文正公 宋時烈文正公 宋浚吉從享之請, 起於湖南, 而李升運等肆其邪說, 邸下洞燭邪正之分, 施以屛裔之典。 乃者三道章甫, 以文純公 朴世采, 竝擧從享事, 齊聲陳請, 則又有鄭宅河者, 放肆侵詆之邪說, 殆與升運等, 同一心術, 而乃反賜以溫批, 許以不無意見, 四方聽聞, 莫不驚愕。 臣等謹取宅河書, 反復觀之, 然後始知邸下泛然下覽, 而未及覰破其用意處也。 其書上, 則推尊時烈浚吉道德學問, 而言其可合於從享, 則與升運輩, 專事黨論者異矣, 下言世采之不合於從享, 而其言或抑或揚, 不曾力攻, 則與升運輩索性醜衊者異矣。 雖以邸下之明, 一覽之, 宜其不卽覺察也。 夫以宅河媢嫉之心, 豈於世采, 猶有所顧藉而然哉? 以未知邸下之意, 故姑爲此半凶半吉之言, 以售其嘗試之計, 而果使邸下, 墮其術中。 臣等請辨其狀, 以備邸下之垂省焉。 其書論時烈浚吉資品道學, 極其推揚, 而至於世采曰: "道德之高下、學問之淺深, 非後生所敢窺測。" 夫旣不知其高下淺深, 則何以知其不合於從享, 而世采之道德學問, 渠以後生, 有所不知, 則時烈浚吉之道德學問, 渠何以知之乎? 獨於世采, 爲後生末學, 而於時烈浚吉, 則不爲後生末學耶? 從祀之典, 何等重大, 而乃欲以末俗私意, 參錯於其間, 有若分門割戶, 各有所宗者然, 此非徒誣世采也, 實亦誣時烈浚吉也。 且其所謂猝然追發於大論停當之後云者, 尤極無據。 臣等未知停當者, 孰停當是? 從祀聖廡, 至嚴且重, 非宅河一家所主張, 則其兄敏河, 初不竝擧於前, 其弟宅河, 今又沮撓於後, 自稱停當, 靦然無嚴, 人之僭妄, 胡至於此? 曾在中廟丁丑之歲, 弘文館以文敬公 金宏弼從享事, 發論陳啓, 太學章甫繼起, 而追擧文忠公 鄭夢周而竝請焉, 夢周獨卽蒙允許。 其後又以文獻公 鄭汝昌文正公 趙光祖文元公 李彦迪追擧, 其後又以文純公 李滉追擧焉, 是所謂五賢從祀也。 文成公 李珥從祀之請, 始發於仁廟改玉之初, 其後海西章甫, 追擧文簡公 成渾, 是謂兩賢從祀者也。 何嘗以先擧者爲停當, 而追擧爲嫌, 如宅河之言也? 當汝昌等三賢追擧竝請也, 或問於李滉, 答曰: "莫重之事, 輕易定取舍判優劣, 亦豈易事?" 雖以之高見, 猶且逡巡而不敢當, 彼宅河何人, 乃敢攘臂奮舌, 恣行軒輊, 如癡兒較其父祖之年甲者然? 多見其妄也。 臣等聞宅河, 是鄕曲稚昧, 全不識字云。 今玆上書, 特假名耳。 必有樂禍喜事之徒, 潛形晦伏, 嗾唆而爲之者, 其爲可憂, 豈特一時一人而止哉? 仍竊伏念, 世采弱冠求道, 夙夜孜孜, 一以爲準則, 爲歸趣, 以至德盛禮恭, 優入高明之域, 而守志山樊, 囂囂自樂, 年未三十, 華聞已彰。 孝廟末年, 特授宮僚之職, 先大王朝, 連以講院臺憲, 旌招相續, 而終不應命。 及乎我聖上, 奮發大志, 前後敦召, 出於至誠, 由是感激, 晩乃造朝, 而難進易退之節, 忠君憂國之忱, 實我聖明之所深知, 故於其卒也, 特下備忘而震悼之曰: "平生言行, 必遵禮法, 勤懃懇懇於筵席章奏之間者, 無非一斗腔血中流出。" 其契合之昭融, 恩禮之隆郅, 可謂千載無二, 終始無間矣。 此正邸下所當仰體而不忘也。

世子答曰: "向來鄭宅河書中所陳文純公事, 余未免汎看, 其用意處, 不得覰破矣, 及見憲臣 【大司憲李澤。】 書, 始覺答辭之非。 今玆多士之書辨, 極其明白, 深用嘉尙。 第宅河之言, 不可比之於升運, 一體勘處, 處分過矣。"


  • 【태백산사고본】 69책 61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9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