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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58권, 숙종 42년 11월 22일 무인 2번째기사 1716년 청 강희(康熙) 55년

효종의 휘호를 추상할 것을 청한 공주의 유학 김덕린의 상소문

공주(公州)의 유학(幼學) 김덕린(金德麟)이 상소(上疏)하였다. 대략에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총명하고 예지(睿智)한 자질로서 비색(否塞)을 경복(傾覆)하고 둔난(屯難)을 구제할 마음을 가지셨으니, 침과(枕戈)593) ·상담(嘗膽)594) 하는 뜻은 하늘에 질증(質證)할 만하고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는 분부는 귀신을 느껴 울게 할 만하였습니다. 덕(德)을 같이하는 신하를 널리 구하여 반드시 보복할 방책을 늘 강구하셨으니, 10년 동안 경영한 것은 신밀(愼密)한 계책이고 토벌하여 보복하는 의리는 해와 별처럼 밝았습니다. 불행히도 문득 승하하시어 오랜 뜻이 풀리지 못하였으나, 인심을 맑게 하고 세교(世敎)를 붙들어 세워서 후세가 짐승이 되는 것을 면하게 한 것으로 말하면 어찌 우리 성조(聖祖)께서 끼친 풍습이고 남긴 공렬(功烈)이 아니겠습니까? 그 성덕(盛德)·지성(至聖)은 본디 영구히 특별하게 일컬어져야 할 것인데, 다만 전장(典章)을 거행할 겨를이 없어 아직 숭봉(崇奉)하는 의례(儀禮)를 지체하고 세실(世室)의 예의를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신민(臣民)이 함께 우울하고 한탄하는 바입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가 혹 성조의 공렬이 저렇게 성대하시니 두어 자의 칭송을 더하더라도 반드시 손익(損益)될 것이 없을 것이라 하나, 또한 매우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 무왕(周武王)이 상(商)나라를 토벌한 뒤에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추존(追尊)하여 특별히 왕작(王爵)을 더하였는데, 이것이 본디 천고(千古)의 달효(達孝)입니다. 한 선제(漢宣帝)가 즉위한 처음에 친히 내린 수조(手詔)에 ‘효무 황제(孝武皇帝)께서는 인의(仁義)를 몸소 실천하고 위무(威武)를 격려하여 공덕이 무성하시니, 묘악(廟樂)에 칭송하여야 한다.’ 하고 이에 높여서 세종묘(世宗廟)라 하였는데, 선제가 조상의 공렬을 크게 나타낸 것을 전사(前史)에서 칭찬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 선왕을 높인 법도 다 두루 셀 수 있는데, 당저(當宁)의 존호(尊號)로 말하면 위로 공경(公卿)부터 아래로 삼사(三司)까지 말을 같이하여 굳이 청하여도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성조의 높은 공렬과 성대한 덕만이 어찌 사라져서 칭송할 것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이제 사설(邪說)이 뒤를 이어 일어나서 우리 성조께서 다하지 못하신 사업을 헐뜯어 꺼리지 않으니, 성심(聖心)에도 반드시 슬퍼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효종의 세실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는 것이 어찌 내 지극한 소원이 아니랴마는, 다만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니, 예관(禮官)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처음에 승문 판교(承文判校) 유백승(柳百乘)효종의 휘호를 추상하기를 청한 소(疏)가 정원(政院)에 이르렀으나, 정원에서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므로 한 미관(微官)이 감히 건청(建請)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여 받지 않았다. 그러자 김덕린이 이어서 정원을 배척하여 ‘찬양할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미룰 마음을 먹는다.’ 하였으므로 정원에서 마지못하여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명하여 정원을 배척한 말을 삭제하고 들이게 하여 비답(批答)을 내렸다. 예조(禮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大臣)과 2품(品) 이상과 삼사를 시켜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효종의 존주(尊周)하는 의리는 본디 이미 우주에 밝게 나타나 해와 별처럼 빛나니, 두어 자의 휘호가 어찌 성덕(聖德)에 빛을 더할 만하랴마는, 유백승·김덕린 등이 미말(微末)의 무리로서 분수를 벗어나 상소한 것은 그 마음이 오로지 공(功)을 바라고 상(賞)을 바라는 데에서 나왔으니 매우 외람된다."


  • 【태백산사고본】 66책 58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619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사학(史學)

  • [註 593]
    침과(枕戈) : 창을 베개삼고 잔다는 뜻으로 군사(軍事)를 생각하여, 안면(安眠)하지 않고 비상(非常)에 대비함을 이름. 《진서(晋書)》의 "해가 기우는 데도 밥먹기를 잊고 창을 베고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日昃忘食枕戈待且]"는 데서 인용한 말임.
  • [註 594]
    상담(嘗膽) :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복수하려고 모든 간고(艱苦)를 참는 것을 이름.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몸을 괴롭게 하고 노심 초사(勞心焦思)하며 늘 쓸개를 맛보았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임.

○公州幼學金德麟上疏。 略曰:

恭惟我孝宗大王, 以聰明睿智之資, 有傾否濟屯之心, 枕戈嘗膽之志, 有足質諸蒼天, 日暮道遠之敎, 可以感泣鬼神。 旁求同德之臣, 常講必報之策, 十載經營, 密勿謨猷, 討復之義, 皎若日星。 不幸弓劍遽遺, 宿志未諧, 至於淑人心扶世敎, 使後世免爲禽獸者, 豈非我聖祖遺風餘烈也哉? 其盛德、至聖, 固宜特稱於沒世, 而只緣典章未遑, 尙稽崇奉之儀, 未擧世室之禮, 此誠臣民之所共壹鬱而齋恨者也。 今之議者, 或謂聖祖之功烈如彼其盛, 則雖加以數字之稱頌, 不必有所損益, 其亦不思之甚矣。 武王, 翦之後, 追尊乃祖乃考, 特加王爵, 此固千古之達孝。 宣帝, 卽位之初, 親降手詔, 有曰: "孝武皇帝, 躬仁義勵威武, 功德茂盛, 宜稱廟樂", 仍尊爲世宗廟, 宣帝之丕顯祖烈, 前史大之。 亦越我國家尊崇先王之典, 皆可歷數, 至若當宁尊號, 上自公卿, 下至三司, 合辭固請, 亦終允許, 則聖祖之嵬烈盛德, 豈獨泯泯, 無稱乎? 況今邪說踵起, 以我聖祖未究之業, 譏詆而莫之顧憚, 其在聖心, 亦必惕然不能自安矣。

上答曰: "孝廟世室已成, 而追上徽號, 豈非予至願? 第玆事至重, 宜令禮官稟處。" 始, 承文判校柳百乘, 請追上孝廟徽號, 疏至政院, 政院以玆事至重, 非一微官所敢建請, 不受。 德麟繼之, 侵斥政院以爲: "不思顯揚之道, 反生延拖之心。" 政院不得已啓稟, 上命刪去侵斥政院之語而入之, 賜批。 禮曹覆奏, 請使時任ㆍ原任大臣、二品以上、三司, 會議賓廳, 上可之。

【史臣曰: "孝廟尊周之義, 固已昭揭於宇宙, 炳若日星。 數字徽稱, 何足增光於聖德, 而百乘德麟輩, 以微末之徒, 出位陳疏, 其心專出於希功望賞, 猥越甚矣。"】


  • 【태백산사고본】 66책 58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619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