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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3권, 숙종 39년 4월 13일 경신 1번째기사 1713년 청 강희(康熙) 52년

여러 화사들이 어용 화본에 채색하다. 민진원이 청나라에서 죽은 차예랑의 일을 상주하다

도감 제조(都監提調) 이이명(李頤命) 등이 여러 화사(畫師)를 인솔하고 입시(入侍)하여 어용(御容)이 상초(上綃)한 신본(新本)에 채색을 하였다. 이이명이 상주(上奏)하기를,

"화사(畫師)의 말을 들으니, 연잉군(延礽君)250) 이 그림의 이치에 대해 꽤 이해하고 있다 합니다. 마땅히 연잉군에게 내어다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드디어 임금의 승낙을 얻어 들어가 참여하였다. 채색을 칠하는 일이 끝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전본(前本)에 비해서 훨씬 실물(實物)에 가깝습니다."

하고, 김진규(金鎭圭)가 말하기를,

"비록 다른 본(本)을 다시 만든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 본(本)보다 낫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선 외방(外方)의 화공(畫工)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또 진재해(秦再奚)로 하여금 조용히 생각해 보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상주(上奏)하기를,

"병자 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 뒤에 의주(義州) 사람 최효일(崔孝一)천조(天朝)251) 에 내부(內附)할 때에 관서(關西) 사람 차예량(車禮亮)이 뜻을 같이하는 선비 수십인(數十人)과 힘을 합해 자송(資送)252) 하며 그와 더불어 언약하기를, ‘최효일이 저들 나라에 들어가서 천조(天朝)와 더불어 심양(瀋陽)을 합공(合攻)하게 되면 청(淸)나라가 반드시 우리 나라에 원병(援兵)을 요청할 터인데, 우리 나라는 반드시 청나라의 북병(北兵)을 징발(徵發)시킬 것이니, 너희들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 응모(應募)하여 들어가서 이윽고 내응하여 대사(大事)를 도모하자.’ 하였습니다. 그 뒤에 차 예량이 정탐(偵探)이 되어 심양에 몰래 들어갔다가 정명수(鄭命壽)로 인해 일이 발각되어 동지(同志) 10여 인이 함께 화(禍)를 당하였습니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황일호(黃一皓)도 이 일 때문에 죽었고, 최효일차예량은 북경(北京)에서 화를 당하였습니다. 그 뒤에 조정에서는 누설(漏泄)될 것을 염려하여 미처 정포(旌褒)를 하지 못하였었으나, 이미 황일호에게 증직(贈職)과 사시(賜諡)를 하였으니, 차예량에게도 또한 마땅히 정포(旌褒)를 하여야 합니다. 청컨대 본도(本道)로 하여금 그 당시에 화를 당한 사람들의 성명(姓名)과 전후의 사적(事蹟)을 상세히 조사하여 계문(啓聞)토록 한 뒤에 등급을 구분하여 품처(稟處)케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효행(孝行)과 절의(節義)는 중도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버이의 상(喪)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죽은 사람이거나 과부가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따라 죽은 경우는 비록 사람마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나, 끝내 중도에 지나침을 면치 못하니, 바로 정포(旌褒)를 허락하는 것은 아마 과중(過中)한 듯합니다. 이것도 마땅히 정식(定式)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이명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할 것을 청하였다. 뒤에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가 헌의(獻議)하기를,

"이것은 바로 천백 명 가운데 1명만이 있는 경우로서, 비록 권려(勸勵)하더라도 반드시 사람마다 다 본받을 수는 없으나, 정려(旌閭)로써 허락하는 것은 격려(激勵) 권면(勸勉)하는 도리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대신(大臣)들이 이유(李濡)의 의논을 많이 따르니, 임금이 이유의 의논에 따라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왕세자(王世子)에게 지금 강(講)하는 《중용(中庸)》에 한해서만 배강(背講)253) 을 하고 그 나머지 다른 책은 다 임강(臨講)254) 한 것을 명하였다. 대개 제조(提調) 조태구(趙泰耉)가 세자(世子)가 다리의 질환(膣患)이 비록 조금 나아지기는 하였지만 본래 습기가 많아서 강송(講誦)하는 데 불편한 점이 있을까 염려하기 때문에 임강(臨講)할 것을 청하였고, 이이명 또한 《중용》에 한해서 배강(背講)토록 하자는 건의가 있었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93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윤리(倫理) / 외교-야(野)

  • [註 250]
    연잉군(延礽君) : 영조(英祖)의 봉군호(封君號).
  • [註 251]
    천조(天朝) : 명(明)나라 조정.
  • [註 252]
    자송(資送) : 행장을 꾸려서 보냄.
  • [註 253]
    배강(背講) : 책을 스승 앞에 펼쳐 놓고 자기는 보지 않고 돌아앉아서 욈. 배독(背讀)·배송(背誦).
  • [註 254]
    임강(臨講) : 책을 눈앞에 펴놓고 읽는 일.

○庚申/都監提調李頤命等率諸畫師入侍, 施采于御容上綃新本。 頣命奏言: "聞畫師言, 延礽君頗解畫理。 宜令出示延礽君。" 遂得旨入參。 施采畢, 諸臣皆言: "視前本爲逼眞。" 金鎭圭曰: "雖改出他本, 未必勝此。 姑待外方畫工之來到, 又令再奚, 從容思量。" 上可之。 提調閔鎭遠奏曰: "丙子亂後, 義州崔孝一, 內附天朝時, 關西人車禮亮, 與同志士數十人, 合力資送, 與之約曰: ‘孝一入去彼中, 與天朝合攻瀋陽, 則淸國必請兵於我, 而我國必發北兵, 渠等同志者, 應募入往, 仍爲內應, 以圖大事。’ 其後禮亮, 爲偵探, 潛入瀋陽, 因鄭命壽事覺, 同志十餘人, 俱被禍。 義州府尹黃一皓, 亦以此事死焉, 孝一禮亮則被禍於北京。 其後朝家爲慮漏泄, 未遑旌褒矣。 旣於一皓贈職賜諡, 則禮亮亦宜旌褒。 請令本道, 其時被禍人姓名及前後事蹟, 詳査啓聞後, 分等稟處宜矣。" 上允之。 鎭遠又言: "孝行、節義, 貴乎得中。 不勝親喪而歿者, 及孀婦過哀從亡者, 雖非人人所可爲, 而終未免過中, 直許旌褒, 或似過中。 此宜有定式。" 頣命請令該曹稟處。 後領議政李濡獻議以爲: "此卽千百中之一, 雖勸之, 未必人皆效法。 許以旌閭, 不害爲激勸之道。" 諸大臣多從議, 上命依議施行。 上命 王世子限所講《中庸》背講, 而其餘他書, 則皆臨講。 蓋提調趙泰耉, 以世子脚患雖少減, 而素多濕, 恐於講誦有不便, 故請臨講, 而李頣命亦有限《中庸》背講之言, 故從之也。


  •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93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윤리(倫理)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