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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48권, 숙종 36년 1월 10일 병자 1번째기사 1710년 청 강희(康熙) 49년

약원의 세 제조를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케 하다

약방(藥房)에서 문안(問安)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어제 수라(水剌)를 든 것이 그저께 든 것만 못하였는데, 근래에 약원(藥院)의 신하들은 수라(水剌) 드는 것을 싫어함을 걱정하지도 않는다. 반드시 마음을 조용히 하고 여러 날 조식(調息)하여 조금 나은 후에야 평소와 같이 평복(平復)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경(卿)들은 범범(泛泛)히 생각하는데, 나만 혼자 걱정하고 있으니, 또한 어찌 직숙(直宿)할 필요가 있겠는가? 입진(入診)하지도 말라."

하고, 곧 여러 의원(醫員)들을 불러 하교(下敎)하기를,

"도정(都政)의 천취(遷就)를 내가 어찌 좋아서 하겠는가? 빈청(賓廳)의 차대(次對)도 또한 까닭없이 폐하여 물리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최석정(崔錫鼎)은 문후(問候)하는 즈음에 그저 소홀하게 여겨 병판(兵判)을 패초(牌招)하여 도정을 속히 거행할 것을 청하였고, 또 서종태(徐宗泰)가 오랫동안 등대(登對)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전부터 논의(論議)로써 서로 공격하고 대정(大政)013) 이 천취되어 2, 3월이나 8, 9월 후에 많이 거행하였는데, 지금은 수령(守令)을 전최(殿最)014) 하여 먼저 차출(差出)하였으니, 무슨 시급한 일이 있다고 급급하게 거행할 것을 청하였는가? 전후의 약원 제조(提調)인 남구만(南九萬)·민진후(閔鎭厚)·조태채(趙泰采) 외에는 마음을 다하여 보호하는 자가 있는지 보지 못하였다. 너희는 나가서 이로써 제조의 무리에게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고, 또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전과 같이 화증(火症)이 복받쳐서 두통[頭疼]이 더하고, 구미(口味)가 떨어졌으니, 대소 공사(公事)를 우선 모두 정원에 머물러 두도록 하라."

하였다. 잠시 후에 약방의 세 제조와 부제조(副提調) 박필명(朴弼明)의 본직(本職)과 도승지(都承旨)를 아울러 체임(遞任)하도록 명하였다. 정원에서 복역(覆逆)015) 하여 명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니, 답하기를,

"크게 병든 나머지에 또 한열(寒熱)의 증세까지 겹쳐 수라(水剌)를 드는 것도 싫어져서 소복(蘇復)016) 이 쉽지 않은데, 입시(入侍) 때마다 범연(泛然)히 여겼고 직숙(直宿)과 입진(入診)도 형식에 지나지 않았으니, 고금 천하에 이러한 도리가 있겠는가? 《춘추(春秋)》에 약을 맛보지 않았다는017) 것으로써 필법(筆法)이 매우 엄절하였는데, 더욱이 몸이 약원에 있으면서 일을 범연히 넘길 수 있겠는가? 이러한 데에는 엄절하게 처리할 것이니, 가볍게 조처함은 옳지 못한 일이다. 관계되는 바가 매우 커서 논의(論議)하는 사이에 처분하는 것으로 견줄 것이 아니다. 그대들이 이를 두둔하는 것은 군부(君父)를 크게 얕본다고 할 만하니, 훗날 약원의 일이 비록 이보다 더 큰 과오가 있더라도 내가 어찌 감히 입을 열 수 있겠는가? 그대들 마음대로 하라."

하고, 곧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약원의 신하들은 죄가 무거운데 벌(罰)은 가벼우니, 체차(遞差)하는 것으로 그칠 수 없다. 세 제조를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018) 하도록 하라."

하고, 또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 《춘추》에 약을 맛보지 않았다 하여 임금을 시해(弑害)한 것으로 썼는데, 더구나 스스로 보호하는 직임(職任)을 띠고 바야흐로 약방에 직숙하면서 군부(君父)의 질환을 가볍게 보고 오직 대충 하기만을 일삼으니, 어찌 이와 같은 분의(分義)와 도리가 있겠는가? 체차하는 벌이 너무 가볍다고 말함이 옳겠거늘, 신하된 자로서 어찌 감히 두둔하는 마음이 싹트겠는가? 만약 엄중히 구문(究問)하지 않는다면 훗날의 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승지(承旨)들도 모두 곧 나국(拿鞫)하여 엄격히 추문하여 정죄(定罪)케 하라."

하였다. 승지 이주징(李周徵)·허윤(許玧)·이만선(李萬選)·이이만(李頤晩)·김일경(金一鏡) 등이 나치(拿致)되어 공초를 바치자, 다만 파직(罷職)하여 방송(放送)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이이명(李頤命)으로 최석정(崔錫鼎)을 대신하여 약방 도제조로 삼고, 민진후(閔鎭厚)를 제조로 삼도록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48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41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註 013]
    대정(大政) : 12월에 행하는 도목 정사(都目政事).
  • [註 014]
    전최(殿最) : 조선조 때 관리들이 근무 성적을 상·하로 평정하던 법. 상이면 최(最), 하이면 전(殿)이라 한 데에서 나온 말로, 경관(京官)은 각 관사의 당상관(堂上官)·제조(提調)가, 외관(外官)은 관찰사(觀察使)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등제(等第)를 매겨 계문(啓聞)하였음.
  • [註 015]
    복역(覆逆) : 임금이 내린 명령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면, 승정원(承政院)에서 임금의 뜻을 거스르면서 다시 아뢰는 것을 말함.
  • [註 016]
    소복(蘇復) : 회복.
  • [註 017]
    《춘추(春秋)》에 약을 맛보지 않았다는 : 허나라 도공(悼公)이 학질(瘧疾)을 앓다가 그의 세자(世子) 지(止)가 주는 약을 먹고 졸(卒)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세자가 그 약을 미리 맛보지 않았으니, 그 책임은 세자에게 있다 하여, 《춘추(春秋)》 소공(昭公)편에서 "허(許)의 세자(世子) 지(止)가 그의 임금 매(買)를 시해(弑害)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을 말함.
  • [註 018]
    문외 출송(門外黜送) : 형벌의 하나. 죄지은 사람의 관작(官爵)을 빼앗고 도성(都城) 밖으로 추방하는 일. 비교적 가벼운 벌임.

○丙子/藥房問安, 上答曰: "昨日所進, 不如再昨。 近來藥院之臣, 水剌厭進, 不以爲慮。 必須靜慮調息, 累日差勝, 然後可期復常。 卿等泛泛, 予獨爲憂, 亦何必直宿乎? 勿爲入診。" 仍招諸醫等下敎曰: "都政遷就, 子豈樂爲? 賓廳次對, 亦非無故廢却, 而崔錫鼎泛忽於問候之際, 乃以兵判牌招, 都政速行爲請, 又以徐宗泰久不登對爲言。 自前以論議相攻擊, 大政遷就, 多行於二三月八九月之後矣。 今則殿最守令, 先已差出, 有何時急之事, 而汲汲請行乎? 前後藥院提調南九萬閔鎭厚趙泰采外, 未見有盡心保護者也。 爾等以此出言于提調輩, 可也。" 又下敎政院曰: "如前火升, 頭疼有加, 口味且厭, 大小公事, 姑皆留院。" 俄而命竝(遞)〔遞〕 藥房三提調及副提調朴弼明本職都承旨。 政院覆逆, 請還收, 答曰: "大病之餘, 又添寒勢之候, 水剌厭進, 蘇復未易, 而每當入侍, 極涉悠泛, 直宿、入診, 不過文具, 古今天下, 安有如許道理乎? 春秋以不嘗藥, 筆法甚嚴。 況身在藥院, 悠泛爲事者乎? 此等處宜嚴, 而不宜輕也。 關係甚大, 非論議間處分之比。 爾等之營救, 可謂視君父太薄也。 日後藥院之事, 雖有大於此者, 予安敢發口乎? 爾等任自爲之。" 旋下備忘曰:

藥院之臣, 罪重罰輕, 不可遞差而止。 三提調竝削奪官爵, 門外黜送。

又下備忘曰:

噫! 《春秋》以不嘗藥, 特書弑君, 則況身帶保護之任, 方直藥房, 而歇視君父之疾, 惟事泛泛者, 安有如許分義道理乎? 遞差之罰, 謂之太輕則可也, 爲人臣者, 安敢(萠)〔萌〕 營救之心乎? 若不重究, 日後之患, 不可勝言。 承旨竝卽拿鞫, 嚴問定罪。

承旨李周徵許玧李萬選李頣晩金一鏡等, 被拿納供, 上命罷職放送。 李頣命錫鼎爲藥房都提調, 閔鎭厚爲提調。


  • 【태백산사고본】 55책 48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41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