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최석정이 이관명의 상소에 따라 대변하고 직명을 해면해 주기를 청하다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이관명(李觀命)의 상소에 따라 대변(對辨)하기를,
"도당(都堂)의 선발(選拔)은 이미 본관(本館)의 공론에 의거하여 유주(遺珠)031) 를 채택(採擇)한 것입니다. 이제(李濟)는 문학(文學)이 진실로 인정된 가치가 있었고, 재술(才術)도 또한 일찍부터 명성이 드러났었으며, 또 차분하게 자신을 지키고 있고 세상에 드나들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니, 그들이 못된 욕설을 한 것은 또한 변수(卞隨)032) 와 백이(伯夷)033) 를 흐리다고 한 것과 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익명(趙翼命)이 한림(翰林)에 추천된 것은 선진(先進)들도 모두 가하게 여겼으니 공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건 일의 잘잘못은 논쟁하는 바가 대단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만, 《예기유편(禮記類編)》 한 가지 건에 있어서는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요합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회재(晦齋)034) 의 《개정대학(改定大學)》을 논하여 말하기를, ‘청송장(聽訟章) 1장을 따로 본말(本末)을 해석한 장(章)으로 해 놓은 것을 심상한 사람은 온당하게 된 것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이가 어찌 주자(朱子)를 존신(尊信)하기에 독실하지 못한 데가 있어 그런 것이겠습니까? 대개 3강령(綱領)과 8조목(條目)은 이미 큰 제목(題目)이 되는 것이고, 기욱(淇澳)의 시(詩)는 명덕(明德) 밝히기를 지선(至善)에 이르도록 한 것이고, 열문(烈文)의 시는 신민(新民)하기를 지선에 이르도록 한 것으로서, 명덕을 밝힘이 근본이 되고 신민이 결말이 되는 것이고 보면 본말에 관한 뜻이 이미 그 속에 포함되어 있어, 비록 ‘석본말(釋本末)’이란 조목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또한 스스로 방해롭지 않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개편(改編)한 것이 이미 경문(經文)을 옮기거나 바꾸어 놓은 것도 없고, 또한 서론(緖論)은 의거한 데가 있은 것으로서, 만일 선정(先正)의 논을 존신(尊信)하여 인용한 것으로 죄를 삼는다면 신(臣)이 또한 달갑게 받겠습니다.
《중용》 제28장에 있는 두 군데의 ‘자왈(子曰)’이란 글자는 주자가 장구(章句)를 나누어 놓은 의례(義例)에는 어긋남이 있기에, 부주(附註)에 이르기를, ‘말단(末段)의 대문은 마땅히 아랫 장의 머리가 되어야 하거나 혹은 첫 대문이 마땅히 앞장의 끝으로 들어가야 할 듯 싶다.’고 한 것입니다. 대저 주자의 의례에 의해 논한다면 이 대문은 마땅히 이정(釐正)되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감히 바로 옮겨다 붙이지 않고서 단지 그렇게 해야 할 까닭만 주로 논해 놓았습니다. 만일 주자의 의례에 의해 하려고 한 것도 죄가 된다면 신(臣)이 또한 할 말이 없겠습니다. 비은장(費隱章)035) 에 대한 부주(附註)의 윗 조항은 삼가 정자(程子)의 말을 서술한 것이고, 아랫 조항은 또한 주자의 《어류(語類)》에 논한 것을 가져다가 참고에 대비해 놓았을 뿐입니다. 《중용》과 《대학》을 도로 본래의 자리에 편입(編入)해 놓은 것은 삼가 주자가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에 《대학》과 《예기》를 도로 넣은 예에 따랐고, 또한 동유(東儒) 권근(權近)이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에다 도로 기록해 넣은 뜻에 따른 것으로서, 바로 표장(表章)하기 위한 것인데, 어찌 매매(昧昧)한 짓을 한 것이겠습니까?
《효경(孝經)》은 문체(文體)가 《대기(戴記)》036) 의 모든 편(篇)들과 이미 유사하므로 《예기》와 《효경》은 마땅히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논이 주자의 아언(雅言)에도 여러 차례 나와 있는 것인데, 지금 억지로 붙였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대체 또한 무슨 뜻이겠습니까? 신이 경전(經傳)의 제서(諸書)에 있어서 일찍부터 그윽이 오랜 동안 심오한 이치를 탐색하여 왔기에 더러는 한 가닥의 소견이 없지 않았고, 예서(禮書)에 있어서는 여러 해에 공력을 쌓아 조금 연핵(硏覈)한 것이 있기에 이미 부주(附註)를 붙였고, 또한 서문(序文)과 혹문(或問)도 써 놓았으니, 마음이 공정하고 안목이 밝은 사람이라면 자연히 알아차리게 될 것인데, 지금 갑자기 들추어 내어 장찬(粧撰)하여 입에 씹히는 대로 비웃고 욕하고 있으니, 어찌 남을 제지하기에만 급급하여 고열(考閱)하는 데 착안(着眼)하는 겨를이 없이 하는 것입니까?"
하고, 이어 직명(職名)을 해면해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 유시(諭示)하기를,
"이관명(李觀命)이 상소한 말은 오로지 당동 벌이(黨同伐異)하는 데서 나온 것이기에 이미 개탄(慨歎)을 금할 수 없었다. 《예기유편》의 일에 있어서는 그가 들추어 내고 장찬하여 반드시 모함하려고 한 계획을 내가 이미 통촉하고 있는데, 경이 상소에 진달한 말도 또한 이처럼 명백하게 되어 있다. 성인을 모함하고 현인을 업신여긴다는 말들은 어찌 너무도 근거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세상의 도의(道義)가 험악해진 것이 진실로 한심하기만 하다. 경에게 무슨 불안해 할 까닭이 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4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1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상-유학(儒學) / 출판-서책(書冊)
- [註 031]유주(遺珠) :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인재.
- [註 032]
변수(卞隨) : 탕왕(湯王)이 천하를 양여(讓與)하려고 하자, 변수가 그런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분개하여 주수(稠水)에 몸을 던져 죽었음.- [註 033]
백이(伯夷) :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치자 이를 간(諫)하였고, 무왕이 천하를 손 안에 넣자 백이는 주(周)나라의 곡식 먹기를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으로 도망가서 채미(採微)하고 살다가 마침내 굶어 죽었음.- [註 034]
都堂之選, 旣據本館之公論, 而採擇遺珠。 李濟文學, 固有定價, 才術亦嘗著聲, 且恬靜自守, 不喜出入, 其所醜詆, 無亦近於謂隨、夷溷耶? 趙翼命之翰薦, 先進皆可, 公議可知。 然數件得失, 所爭不至大段, 而至於《類編》一款, 關係至重。 先正臣李珥論晦齋 《改定大學》曰: "聽訟一章, 別爲釋本末章, 尋常未知其穩當。" 珥豈有不篤於尊信朱子而然哉? 蓋三綱、八條, 旣爲大題目, 而《淇澳》詩, 爲明德之至善, 《烈文》詩, 爲新民之至善, 而明德爲本, 新民爲末, 則本末之意, 已包於其中, 雖不立釋本末之目, 亦自不害故也。 今所編改, 旣無經文之移換, 又有緖論之可據, 而若以信用先正之論爲罪, 則臣亦甘受矣。 《中庸》二十八章, 兩子曰字有違朱子分章之例, 故附註曰: "末段恐當爲下章之首, 或首段當入於前章之末。" 夫以朱子義例論之, 此段宜在釐正, 而猶不敢直爲移屬, 只得疏論。 其所以若以欲倣朱子之例爲罪, 則臣亦無辭矣, 費隱章附註上條, 謹述程子之說, 下條亦取《語類》所論, 以備參考而已。 《庸》、《學》還編, 謹遵朱子 《通解》, 還入《學》、《禮》之例, 亦得東儒權近還錄於《禮記淺見錄》之意, 正所以表章, 惡在其昧昧也? 《孝經》文體, 與《戴記》諸篇, 旣其倫類, 而《禮記》、孝經, 當爲附合之論, 屢見於朱子雅言, 則今以强附爲說, 抑又何哉? 臣於經傳諸書, 竊嘗積久探讀, 或不無一斑之見, 而至於禮書, 則積工多年, 粗有硏覈, 旣有附註, 又有序文及或問, 心公眼明, 自可曉然, 而今忽抉摘粧撰, 肆口嘲罵, 豈急於持人而未暇着眼考閱耶?
仍乞鐫解職名, 上遣史官諭之曰: "李觀命疏語, 專出黨伐, 已不勝其慨嘆, 而至於《類編》事, 其抉摘粧撰, 必欲構陷之計, 予已洞燭, 而卿之疏陳, 又如是明白。 誣聖侮賢等語, 豈非無據之甚者耶? 世道險巇, 良可寒心。 於卿有何不安之端也?"
- 【태백산사고본】 54책 4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1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상-유학(儒學) / 출판-서책(書冊)
- [註 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