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1월 23일 병오 2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임금이 친히 지은 대행 왕비의 행록과 이여가 지어 바친 후기

처음에 임금이 친히 대행 왕비(大行王妃)의 행록(行錄)을 지어 내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대행 왕비의 성은 민씨이니, 계통(系統)이 여흥(驪興)에서 나왔다. 민칭도(閔稱道)가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상의원 봉어(尙衣院奉御)가 되고부터 비로소 족성(族姓)의 글에 보이는데, 그 후 대대로 문인(聞人)569) 이 있었다. 고조(高祖) 민여건(閔汝健)은 벼슬이 장흥고 영(長興庫令)을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증조(曾祖) 민기(閔機)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는데, 청백(淸白)과 소박한 행실로 진신(搢紳)의 모범이 되었다. 조부(祖父) 민광훈(閔光勳)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근후(謹厚)한 장덕(長德)으로 집안의 명성을 대대로 이어왔다. 고(考) 민유중(閔維重)은 벼슬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이고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인데, 이른 나이에 이미 영명(英名)이 널리 알려지고, 화직(華職)을 차례로 거쳐서 맑은 이름과 높은 인망(人望)으로 세 조정의 지우(知遇)를 받았다. 배위(配位)는 은성 부 부인(恩城府夫人) 송씨(宋氏)이니,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증(贈) 영의정(領議政)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따님이다. 문정공은 도덕과 학문으로 당세의 유종(儒宗)이 되어 효종·현종 양조(兩朝)에서 빈사(賓師)의 예(禮)로 대우하였다. 숭정(崇禎) 기원 후 40년 정미년570) 4월 23일 정묘일 오시(午時)에 경사(京師)서부(西部) 반송동(盤松洞) 사제(私第)에서 후(后)가 탄강(誕降)하였는데, 이보았다 앞서 그 어머니의 꿈에 해와 달이 두 어깨에서 돋아났다. 어릴 때부터 노는 것이 범상한 아이와 아주 달라서 남과 다투지 않았고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으며, 혹시 남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자가 있으면 언제나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성품(性品)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6세에 부부인(府夫人)을 여의었는데 슬퍼함이 성인(成人)과 같았으며, 이때부터 혹은 중고(仲姑)571) 홍씨(洪氏)의 집에서 양육되기도 하고, 혹은 문정공(文貞公)을 따라 전야(田野)와 영해(嶺海) 사이로 쫓겨 다니며 외로움과 고생을 갖추 겪었으나, 항상 곁에서 기쁜 빛으로 모시면서 일찍이 근심하는 빛이 없었다. 매양 계절(季節)에 나오는 새로운 식물(食物)을 보면, 문정공이 미처 맛을 보지 않았거나 혹은 가묘(家廟)에 천신(薦新)하기 전에는 먼저 맛보지 않았으며, 다른 아이가 먹는 것을 보면 또한 반드시 이를 경계하여 꾸짖으니, 문정공이 매우 기이(奇異)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아이의 현명함은 여러 자녀가 미칠 자가 없다. 내가 일찍이 한 번도 그릇된 행동을 보지 못하였으며, 또한 일찍이 한 번도 말을 빨리 하거나 당황하는 빛을 짓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덕성(德性)이 날로 진취(進就)하여 공손[齊遬]하고 장중(莊重)하였는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서 덕선(德選)572) 되니, 이때 나이 15세였다. 주선하는 것이 법도에 맞고, 응대(應對)하는 것이 예법에 맞으니, 궁중(宮中)에서 모두 이르기를, ‘천제(天帝)의 누이에 비유할 만하였다.’573) 고 하였다. 이미 간선(揀選)되어서는 별궁(別宮)에 있으면서 부원군(府院君)에게 공경히 《소학(小學)》을 배웠으며, 신유년574) 5월 2일에 왕비(王妃)에 책봉(冊封)되고, 그 달 13일에 머물고 있던 궁(宮)에서 면복(冕服)을 갖추어 친영(親迎)하였다. 왕후(王后)가 궁위(宮闈)에 들어오자, 위로 대비(大妃)를 받들어 독실하게 성효(誠孝)를 다하였고, 과궁(寡躬)을 받들어 섬기며 반드시 공경하고 근신하였다. 변이(變異)와 재흉(災凶)에는 나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으며, 계명(雞鳴)·주이(周珥)의 잠언(箴言)으로 경계(警戒)한 것이 많았다. 여러 궁인(宮人)들을 대우함에 있어서 은례(恩禮)를 폐한 적이 없었고, 사친(私親)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은애(恩愛)를 곡진하게 다하였으나, 사여(賜與)와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상례(常例)에 따랐으므로, 사친 또한 감히 분수를 넘은 은택(恩澤)을 구한 적이 없었다. 무릇 내가 병이 있으면 거의 침식(寢食)을 폐한 채, 어선(御膳)이 정결한지 그 여부를 항상 반드시 친히 보살폈으며, 계해년575)명성 왕후(明聖王后)576) 께서 편찮으시자,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병석(病席)에서 모시어 반걸음도 떠나지 않았고, 대비(大妃)께서 물러가도록 명하시면 잠시 문 밖으로 나왔으나 사실(私室)로 가지 않았다. 때는 추운 겨울이어서 몸이 떨려서 견디기 어려운데도 끝내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승하(昇遐)하시자 슬퍼하여 호읍(號泣)함이 예(禮)를 넘었다. 후(后)는 늘 종사(螽斯)577) 의 경사(慶事)가 없음을 근심하여 일찍이 나에게 저사(儲嗣)578) 를 널리 구하기를 권하였으니, 숙의(淑儀)의 간선은 실로 후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무진년579) 에 또 큰 슬픔을 당하여 애훼(哀毁)하며 예제(禮制)를 다하였다.

기사년580) 뒤로 사제(私第)에 있을 때는 항상 죄인으로 자처하여 몸에 아름다운 옷을 입지 않았고, 찬 방에서의 잠자기를 피하지 않았으며, 여름날에도 점심을 들지 아니한 채 항상 말하기를, ‘내가 오늘날까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성은(聖恩)이 아닌 것이 없는데, 오히려 어떻게 감히 스스로 평인(平人)과 똑같이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갑술년581) 여름에 내가 장서(長書)를 지어 뉘우치는 뜻을 갖추 보이고, 인하여 복어(服御)582) 를 보냈으나, 후가 겸양하며 받지 않았는데, 그 서사(書辭)가 처완(悽惋)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였다. 내가 또 글로써 간곡하게 고한 것이 세 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받았다. 후가 다시 곤위(壼位)로 돌아오자, 더욱 스스로 억제하고 두려워하면서 원량(元良) 이하를 자기 소생처럼 어루만져 사랑하고 빈어(嬪御)를 거느림이 화평하고 은혜로우니,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기꺼이 복종하였다. 대저 투기(妬忌)와 온노(慍怒) 같은 것은 오직 마음에 싹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나타내지 아니하였는데, 비록 이를 권하여도 하지 않았으니, 대개 그 천성(天性)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병자년583) 겨울에 후와 빈궁이 태묘(太廟)584) 를 알현하였는데, 우리 나라 후비(后妃)의 묘현(廟見)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경진년585) 봄에 병에 걸려 이듬해에 이르도록 낫지 않으므로, 내가 일찍이 참판(參判) 민진후(閔鎭厚) 형제에게 명하여 드나들며 시약(侍藥)하게 하였는데, 인견할 때마다 문득 명망과 지위가 점점 높아지는 것을 근심하였다. 내의원(內醫院)에서 의약청(議藥廳)의 설치를 청하여 무릇 세 번 설치하고 세 번 혁파하였는데, 신사년586) 8월에 병이 갑자기 위중하여 또 의약청을 설치하였다. 침과 뜸이 효력이 없으니, 스스로 이미 어찌 할 수 없음을 알았으나, 오히려 또 기운을 내어 수답(酬答)하였으며, 대점(大漸)587) 에 이르러서도 정신이 조금도 흐리지 않았는데, 마침내 이 달 14일 기사에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훙(薨)하니, 수(壽)는 35세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고 사는 것을 마음에 꺼려하겠는가? 다만 질통(疾痛)이 괴로울 뿐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계해년 국휼(國恤)에 유교(遺敎)로 인하여 상제(喪制)를 절검(節儉)하는 데 따르지 않은 것이 없어서 백성이 크게 힘입은 바가 있었다. 오늘의 민력(民力)이 지난날에 비할 바가 아닌데, 나의 병이 거의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만약 이 전례(前例)에 따른다면 죽는 사람의 마음이 또한 편안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무릇 사람의 죽은 뒤에 행록(行錄)과 제문(祭文)에 지나치게 찬미(讚美)하는 말이 많이 있는데, 이것이 죽은 자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아! 의금(衣衾)을 내상(內廂)에서 갖추고, 제전(祭奠)에 상식(常式)을 줄인 것은 후(后)의 절검을 따라서 폐단을 줄이는 지극한 뜻을 빛내려지는 것이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유사가 시법(諡法)을 의논하기를, ‘인을 베풀고 의를 행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행실이 중외(中外)에 나타남을 현이라 한다’고 하여, 인현(仁顯)이라 증시(贈諡)하고, 능호(陵號)를 명릉(明陵), 전호(殿號)를 경녕(敬寧)이라 하였다. 택조(宅兆)를 익릉(翼陵) 남쪽 갑좌(甲坐) 언덕에 가려 정하고, 돈장(敦匠)588) 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허우(虛右)의 제도를 장릉(長陵)을 본뜨게 하고, 장차 이 해 12월 초9일에 장사지내려고 한다. 아! 이제 내가 지은 것을 사신(詞臣)이 지문(誌文)을 찬술(撰述)하는 자료(資料)로 삼고, 유택(幽宅)에 넣어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니, 감히 한 글자라도 실제에 지나친 것이 있어서 후(后)가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을 어기겠는가? 아! 장수하고 단명(短命)함이 비록 명수(命數)가 있다지만, 후(后)의 덕으로써 자식이 없고 수(壽)가 없으니, 어찌 그 이치(理致)가 이와 같이 상도(常道)에 어긋나는 것인가? 이것이 내가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 슬프도다."

하였다. 이때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여(李畬)가 지문(誌文)을 찬술(撰述)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아직 미처 속고(屬藁)589) 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곧 상소하기를,

"어제(御製)의 행록은 문장이 아름답고 사실이 갖추 실려 있어서 참으로 귀신과 사람을 감동시키고 길이 빛날 만하니, 곧장 어제(御製)를 옥돌에 새겨 현궁(玄宮)에 넣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면 유택에 고하고 영구히 전하는 도리에 있어 두 가지에 모두 유감(遺憾)이 없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총상(摠相)에게 물으시어 재처(裁處)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 여러 신하들의 진달로 인하여 그대로 어제의 행록을 쓰고,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후기(後記)를 지어 바치게 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이여가 그 글을 지어 올렸으니, 그 글에 이르기를,

"성상께서 처음에 신(臣) 이여에게 명하시어 대행 왕비의 능지(陵誌)를 짓게 하시고, 이미 또 어제(御製) 행록을 내리시어 서술(敍述)의 자료를 삼게 하셨습니다. 신 이여가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받아 읽었는데, 그윽이 감탄(感歎)을 금하지 못해 체읍(涕泣)하며 말하기를, ‘아! 지극하십니다. 이것을 현궁(玄宮) 수도(隧道)에 들이면 무게를 더하고, 백대(百代)에 드리워도 더욱 빛날 만하니, 신이 어찌 감히 한 말인들 만들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소를 올려 성록(聖錄)을 능지로 삼기를 청하고, 대신(大臣)과 제신이 또한 이를 청하니, 성상께서 이미 허락하시고도 오히려 신 이여에게 명하시어 어지(御誌)에 모두 싣지 못한 것을 후면(後面)에 부기(附記)하게 하시니, 신 이여는 또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하기를, ‘어지가 간결하면서도 두루 갖추어져 있어 마치 해와 별이 밝게 하늘에 걸린 것 같으니, 다시 더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그윽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후비(后妃)의 덕을 노래와 시로 펴낸 것이 많으나, 우리 성비(聖妃)께서는 험하고도 위태로운 경지를 몸소 겪으시고 거듭 곤위(壼位)를 바로잡으셨는데, 옥도(玉度)590) 에 허물이 없고 휘음(徽音)591) 이 더욱 드러나서, 우리 성상의 집안을 바로잡는 덕화(德化)를 이루신 것은 진실로 간책(簡冊)에서도 듣지 못했던 바입니다. 그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은 신하와 백성이 진실로 전하여 외며, 스스로 찬탄(贊歎)하여 마지 않을 수 없는 바가 있으므로, 삼가 어지(御誌)의 남은 뜻을 부연(敷衍)하여, 그 한두 가지를 간략하게 서술합니다.

후(后)께서는 우리 주상의 계비(繼妃)이시니, 처음에 인경 왕후(仁敬王后)께서 훙(薨)하시고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명성 대비(明聖大妃)께서 서둘러 대신과 의논하시고, 명문(名門)의 집에서 묘택(妙擇)하여 후(后)로 세우셨습니다. 대비를 성실하게 공경하여 섬기며 종일 곁을 떠나지 아니하셨는데, 밤에도 반드시 이고(二鼓)가 되어야 비로소 물러나시니, 대비의 권애(眷愛)가 특히 깊으셔서 가까운 친척에게 하교하시기를, ‘내전(內殿)이 지성으로 나를 섬겨 한 가지 일도 뜻에 맞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어진 며느리를 얻고부터 거의 미망인(未亡人)의 한(恨)을 잊었다.’고 하셨으며, 또 하교하시기를, ‘내전(內殿)이 본가(本家)의 글을 받을 때마다 반드시 내 앞에서 펴 보았는데, 글 속에 본래 숨길 만한 말이 없었으니, 아마도 그 뜻이 나에게 숨김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대비께서 승하하시자 후(后)께서 추모(追慕)하심이 평생 동안 변함이 없으셨으니, 매양 말이 대비께 미치면 문득 눈물을 흘리곤 하셨습니다. 병자년에 묘현(廟見)할 때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시고 돌아와 시자(侍者)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비(聖妃)의 신좌(神座)를 우러러 뵈니, 황연(怳然)히 다시 인자하신 얼굴을 뵙는 듯하였다.’고 하셨으며, 병환이 크게 위중함에 미쳐서는 말씀하시기를, ‘이제 나는 돌아가 대비를 모시게 되었으니, 다시 무엇을 한(恨)하겠는가?’ 하셨으니, 그 성효(誠孝)의 순수(純粹)하고도 독실하심이 이와 같으셨습니다. 기사년 초를 당해 여러 간흉들이 화란(禍亂)을 빚는 것을 즐겨 마지 아니하여 조정이 공허(空虛)하였고, 5월 2일 정유에 후께서 사제(私第)로 나가 거처하시게 되자, 진신(搢紳)·장보(章甫)들이 궁궐을 지키며 죽음을 각오하고 다투는 자가 여러 백천 명에 이르렀으나, 이미 뜻대로 되지 않게 되니, 온 나라 사람들이 통원(痛寃)해 하기를 6년 동안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갑술년에 성상께서 크게 깨달으시어 간당(奸黨)을 물리치신 다음 서둘러 중사(中使)를 보내어 후께 뜻을 유시하셨습니다. 처음에 후께서 사제로 나가시자 곧 외문(外門)을 잠그도록 명하셨으므로,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감히 드나들 수가 없었는데, 이때 이르러 중사(中使)가 상명(上命)이라 하여 열쇠를 얻어 문열기를 청하였으나, 후께서는 오히려 허락하지 않으셨으며, 어찰(御札)을 받게 되어서야 비로소 내어주셨으니, 이 날이 4월 10일 정축입니다. 그리고 12일 기묘에 명하시어 경복당(景福堂)에 들어와 거처케 하시니, 마침내 위호(位號)를 회복하시게 되었습니다. 21일 무자에 종묘(宗廟)·사직(社稷)에 고유(告由)하였는데, 명하시어 ‘충성된 말을 살피지 아니하여 어진 보좌(輔佐)를 그릇 의심하였다’는 말로서 글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6월 1일 정유에 의물(儀物)을 갖추어 거듭 책례(冊禮)를 행하고, 대사(大赦)를 하교하시어 깊이 지난일을 뉘우침을 진술하셨는데, 이를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명백하게 말을 만들게 하여 신민(臣民)에게 포유(布諭)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사년의 간신(諫臣)을 정표(旌表)하며 군간(群奸)을 토죄(討罪)하여 모해(謀害)하고 교무(矯誣)한 것으로써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보내니, 이에 중외의 신민(臣民)과 아래로 궁벽한 마을과 시골의 부녀자·어린이·노예(奴隷)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뻐하여 뛰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분주하여 서로 고하기를, ‘주상께서 밝고 거룩하셔서 우리 성비께서 복위(復位)되셨다.’고 하였습니다. 아! 성대합니다. 이는 진실로 후의 덕이 하늘과 땅에 사무쳐서 이 아름다움을 가져온 것이나, 우리 성상께서 후(后)를 복위시키신 것은 비록 만세(萬世) 후에도 우러를 만합니다. 후께서 이미 복위(復位)하시니, 궁인(宮人)으로서 혹은 스스로 편안하지 못한 자도 있었으나, 후께서는 이를 전과 같이 대우하셨으며, 전의 일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꾸짖어 물리치시고, 시종 한 사람도 상주거나 죄주지 않았습니다. 크게 꾸짖어 마땅히 죽여야 하는 자라도 또한 구해(救解)하시니, 사람마다 기뻐하며 감격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세자(世子) 휘(諱) 윤(昀)이 주부(主簿) 심호(沈浩)의 따님을 맞아 빈(嬪)으로 삼았는데, 후께서 은혜로 돌보시어 친소생보았다 더함이 있었으며, 또 반드시 일에 따라 가르치시고 친절하게 타일러 마지 않으시니, 세자 또한 지성껏 뜻을 받들어 자애(慈愛)와 성효(誠孝) 두 가지가 극진하여 나라 사람으로 듣지 못한 이가 없었으니, 종사(宗社)의 끝없는 경사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아! 아름답도다. 아! 슬프도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1책 35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60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인물(人物) / 어문학-문학(文學)

  • [註 569]
    문인(聞人) :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
  • [註 570]
    정미년 : 1667 현종 8년.
  • [註 571]
    중고(仲姑) : 둘째고모.
  • [註 572]
    덕선(德選) : 도덕(道德)의 표준으로 삼아 간선(揀選)함.
  • [註 573]
    ‘천제(天帝)의 누이에 비유할 만하였다.’ : 《시경(詩經)》 대명장(大明章)에, "큰 나라에 따님이 계셨으니, 천제의 누이 같았네. 길일을 예로 정하여 위수(渭水)에서 친히 맞으셨네"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문왕(文王)이 태사(太姒)를 후비(后妃)로 맞이한 경위를 노래한 것으로서, 인현 왕후를 태사에 비유한 것임.
  • [註 574]
    신유년 : 1681 숙종 7년.
  • [註 575]
    계해년 : 1683 숙종 9년.
  • [註 576]
    명성 왕후(明聖王后) : 현종(顯宗)의 비(妃).
  • [註 577]
    종사(螽斯) : 《시경(詩經)》 주남편(周南篇)의 종사장(螽斯章)을 가리킨 것으로, 종사는 여치과에 속하는 곤충으로 한꺼번에 99개의 알을 낳는다 함. 곧 왕실 자손의 번영함을 뜻함.
  • [註 578]
    저사(儲嗣) : 세자.
  • [註 579]
    무진년 : 1688 숙종 14년.
  • [註 580]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581]
    갑술년 : 1694 숙종 20년.
  • [註 582]
    복어(服御) : 왕이나 왕비의 의복·거마 등속.
  • [註 583]
    병자년 : 1696 숙종 22년.
  • [註 584]
    태묘(太廟) : 종묘(宗廟).
  • [註 585]
    경진년 : 1700 숙종 26년.
  • [註 586]
    신사년 : 1701 숙종 27년.
  • [註 587]
    대점(大漸) : 임금이나 비(妃)의 병이 위독해짐.
  • [註 588]
    돈장(敦匠) : 공장(工匠)을 감독함.
  • [註 589]
    속고(屬藁) : 초안(草案)을 잡음.
  • [註 590]
    옥도(玉度) : 후비(后妃)의 기거(起居).
  • [註 591]
    휘음(徽音) : 후비(后妃)의 아름다운 언행(言行).

○初, 上親製大行王妃行錄以下。 其文曰:

大行妃, 姓閔氏, 系出驪興。 有曰稱道, 仕高麗, 爲尙衣奉御, 始見於族姓書, 自是厥後, 世有聞人。 高祖汝健, 官長興庫令, 贈吏曹判書, 曾祖, 文科官慶州府尹, 贈領議政, 淸白質行, 楷範搢紳。 祖光勳, 文科官江原道觀察使, 贈領議政, 謹厚長德, 克世家聲。 考維重, 官領敦寧府事驪陽府院君, 諡文貞, 蚤歲蜚英, 歷遍華塗, 以淸名碩望, 受知三朝。 配曰恩城府夫人 宋氏, 議政府左參贊贈領議政文正公 浚吉之女。 文正公道德學問, 爲世儒宗, 兩朝, 待以賓師之禮焉。 以崇禎紀元之四十年丁未四月二十三日丁卯午時, 誕后于京師 西部 盤松坊之私第。 先是, 天只之夢, 日月生于兩肩。 自幼嬉戲, 絶異凡兒, 不與人較爭, 不言人過失, 或有論人是非者, 輒笑而不答。 性至孝, 六歲喪府夫人, 哀戚若成人。 自是或鞠養於仲姑洪氏家, 或隨文貞公奔逬于田野、嶺海之間, 零丁艱苦, 備嘗窮厄, 而常侍側怡愉, 未嘗有憂色。 每見時物, 文貞公未及嘗, 或於家廟未薦, 則不先嘗, 見他兒之食者, 亦必戒責之, 文貞公甚奇愛之, 嘗曰: "是兒之賢, 諸子女無能及者。 吾未嘗一見其過誤之擧, 亦未嘗一見其有疾言遽色也。" 德性日就, 齊遬莊重, 未幾承膺德選, 時蓋十有五歲也。 周折中度, 應對合禮, 宮中咸曰: "俔天之妹也。" 旣選在別宮, 敬受《小學》于府院君, 辛酉五月二日, 冊爲王妃, 越十有三日, 冕迎于所館之宮。 后入宮闈, 上奉大妃, 篤盡誠孝, 承事寡躬, 必敬必愼。 變異災凶, 同予憂惕, 珥, 多所箴警。 遇諸宮則恩禮無替, 待私親則恩愛曲至, 而至若賜予, 一遵常例, 私親亦無敢有越分干澤者。 凡予疾恙, 幾廢寢食, 御膳潔否, 恒必親視。 癸亥明聖王后違豫, 后夙夜侍疾, 不離跬步, 大妃命之退, 則暫出戶外, 不就私室。 時當(祈)〔祁〕 寒, 懍懍難耐, 而終不懈, 逮至不諱, 攀號逾禮。 后每以螽斯嗇慶爲憂, 嘗勸予以廣儲嗣, 淑儀之選, 實從后意。 戊辰, 又罹巨創, 哀毁盡制。 己巳後, 在私第時, 常自處以罪人, 身不御美服, 寢不避冷室, 夏日不進午飯, 常曰: "我之得保有今日者, 莫非聖恩, 尙何敢自同平人耶?" 甲戌夏, 予作長書, 備示悔悟, 仍以服御贈之, 后謙挹不受, 書辭悽惋, 令人感動。 予又以書懇告, 至于三而乃受。 后復正壼位, 益自抑畏, 自元良以下, 撫愛如己出, 帥嬪御, 和而惠, 人皆感而悅服。 若夫妬忌慍怒, 不惟不萠于心, 不作于色, 雖勸之, 不爲, 蓋其天性然也。 丙子冬, 后與嬪宮, 見于太廟, 我朝后妃廟見, 自此始焉。 庚辰春, 遘疢, 至翼年不瘳, 予嘗命參判閔鎭厚兄弟, 出入侍藥, 每引見, 輒憂名位之漸顯。 內局請設議藥廳, 凡三設三罷, 辛巳八月, 疾忽亟, 又設藥廳。 砭焫罔效, 自知已不可爲, 而猶且作氣酬答, 至大漸, 精神不少爽, 竟以是月十四日己巳, 薨于昌慶宮景春殿, 壽三十有五。 嘗曰: "吾豈以死生關心哉? 只以疾痛爲苦耳。" 又曰: "癸亥國恤, 因遺敎, 喪制無不從儉, 民以大賴。 卽今民力, 非比曩時, 而吾病殆不興。 若遵此例, 則長逝者, 心亦可安矣。" 又曰: "凡人死後行錄祭文, 多有溢美之語, 於死者何益哉?" 嗚呼! 備衣衾於內廂, 減常式於祭奠, 用彰后從儉省弊之至意者, 夫豈偶然也耶? 有司議諡法, 施仁服義曰仁, 行見中外曰顯, 遂贈謚曰仁顯, 陵號曰明陵, 殿號曰敬寧。 卜兆于翼陵南甲坐之岡, 命敦匠之臣, 虛右之制, 長陵是倣。 將以是年十二月初九日葬焉。 嗚呼! 今予所撰, 欲以資詞臣之誌述, 納諸幽而傳諸後, 則敢有一字之過實, 以違后臨歿之言? 嗚呼! 脩短縱有數, 以后之德而無子無年, 何其理反厥常若是歟? 此予之所以不能無怨于天也。 嗚呼哀哉!

時吏曹判書李畬, 承撰誌之命, 而未及屬藁矣。 乃上疏曰:

御製行錄, 宸章炳蔚, 事實該載, 眞可以感動神人, 輝暎千億, 莫如直以御製, 鑱之貞珉, 納于玄宮, 則其於告幽傳永之道, 兩無所憾, 乞詢摠相而裁處。

上不許。 後因諸臣陳達, 仍用御製行錄, 而令詞臣撰出後記。 至是製進其文曰:

上始命臣, 撰大行王妃陵誌, 旣又下御製行錄, 俾資敍述。 臣謹拜手稽首, 受而讀之, 竊不勝感歎涕泣曰: "於戲至矣! 此可以納諸玄隧而增重, 垂之百代而彌光, 臣何敢措一辭哉?" 遂上疏請以聖錄爲誌, 大臣諸臣, 亦以爲請, 上旣許之, 猶命臣, 以御誌未盡載者, 附記于後。 臣又拜手稽首曰: "御誌簡而該, 如日星昭揭, 無以復加。" 然臣竊伏念, 自昔后妃之德, 播在歌詩者多矣。 若我聖妃, 蹈坎履危, 重正壼位而玉度無玷, 徽音益著, 以成我聖上正家之化者, 實簡冊所未聞也。 其盛德至善, 臣下百姓, 固有傳誦贊歎而不能自已者, 謹演御誌餘意, 略述其一二焉。 后, 我主上繼妃也。 始, 仁敬王后薨無嗣, 明聖大妃亟議于大臣, 妙擇令族而立后焉。 其事大妃也, 洞洞屬屬, 終日不離側, 夜必二皷方退, 大妃眷愛特甚, 每敎近戚曰: "內殿至誠事予, 無一事不適意, 予自得賢婦, 殆忘未亡之恨。" 又敎曰: "內殿每得本家書, 必於我前拆見, 書中固無可諱語, 而蓋其意欲無所隱乎我也。" 及大妃昇遐, 后追慕終身不衰, 每語及, 輒下淚。 丙子廟見, 泣涕汍瀾, 歸語侍者曰: "瞻望聖妃神座, 怳若復承慈顔。" 逮大漸則曰: "吾今歸侍大妃, 復何所憾?" 其誠孝純篤如此。 當己巳初, 群壬樂禍不已, 朝著空虛, 五月丁酉, 后出處私第, 搢紳章甫, 守闕死爭者, 累數百千, 旣不能得, 則擧國痛冤, 六年如一日。 甲戌, 上大覺悟, 屛黜奸黨, 亟遣中使,諭意于后。 始后就第, 卽命鎖外門, 雖至親, 無敢出入, 至是中使以上命, 請得鑰匙開門, 后猶不許, 及受御札, 始出付焉, 是四月丁丑也。 己卯, 命入處景福堂, 遂復位號。 戊子, 告于宗社, 命以莫察忠言, 誤疑良佐爲辭。 六月丁酉, 備儀物申冊禮, 大赦下敎, 深陳旣往之悔, 令詞臣明白措辭, 布諭臣庶。 旌己巳諫臣, 討群奸罪, 以謀害矯誣, 或誅或竄, 於是中外臣庶, 下至窮閭僻鄕婦孺奴隷, 莫不懽忻踊忭, 奔走相告曰: "惟主上明聖, 我聖妃復矣。" 嗚呼盛哉! 是固后德格上下, 以臻玆休, 而我聖上日月之更, 雖萬世可仰也。 后旣復位, 宮人或有不自安者, 后待之如舊, 有言前事者, 輒叱斥之, 終不賞一人罪一人, 其大何當死者, 亦爲之救解, 人人莫不感悅。 世子諱, 聘主簿沈浩女爲嬪, 后顧復恩勤, 有愈親出, 又必隨事誨諭, 諄諄不已, 世子亦至誠承奉, 慈孝兩盡, 國人莫不聞焉, 宗社無疆之慶, 其在是矣。 嗚呼猗哉! 嗚呼痛哉!


  • 【태백산사고본】 41책 35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60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인물(人物)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