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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33권, 숙종 25년 4월 26일 을축 2번째기사 1699년 청 강희(康熙) 38년

직관·선거·전부·군려에 관한 좌의정 최석정의 차자

좌의정(左議政) 최석정(崔錫鼎)이 차자(箚子)를 올려 네 가지 조항의 일을 논하기를,

"1. 직관(職官)에 대한 것입니다. 국초(國初)에는 삼공(三公)의 서사(署事)에 대한 법규가 있었는데, 임진 왜란 이후 서사청(署事廳)을 혁파하고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했었습니다. 그런데 백성에 대한 걱정과 국가 계책에 대한 것, 인물을 진퇴(進退)시킨 것 등은 모두 비변사에 관계된 것이 아니어서 명호(名號)가 맞지 않고, 체통도 존엄해지지 않습니다. 마땅히 비변사를 문하사(門下司)로 개칭(改稱)하고, 삼공(三公)에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겸령(兼領)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찬성(贊成)과 참찬(參贊)은 경재(卿宰)의 반열에서 택차(擇差)하여 겸대(兼帶)시키되, 근래 경재가 비국(備局)을 으레 겸임하듯이 하게 하여, 오조(五曹)의 판서(判書)와 양도(兩都)의 유수(留守)로 더불어 모두 동평장(同平章)을 삼으소서. 이밖에 재신(宰臣) 가운데 재식(才識)이 있는 사람을 극선(極選)하여 아울러 동평장(同平章)을 겸임하게 하되, 유사 당상(有司堂上) 2원(員)으로 하여금 오로지 관장하게 하소서. 그리고 통정(通政)으로서 유사에 차임된 사람은 문하복야(門下僕射)로 일컬어 아울러 정목(政目)074) 에서 하비(下批)075) 하게 하소서. 사인(舍人)·검상(檢詳)은 당하관(堂下官) 가운데서 재주와 명망이 있는 사람을 극선하여 문하급사(門下給事)를 겸임하며 문서(文書)를 관장하게 하소서. 이 외에 문신(文臣) 3원과 무신(武臣) 1원에게 모두 문하주사(門下主司)를 겸임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명호(名號)가 바르게 되고, 사권(事權)이 절로 구별되어 정신(精神)을 운용(運用)하는 효과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각(臺閣)에서 인피(引避)하는 것은 조종조(祖宗朝)의 구례(舊例)가 아니니, 자주 개정(開政)하는 것은 대간(臺諫)이 자주 체직되는 데서 연유됩니다. 지금은 의당 그 잘못된 전례를 고쳐 반드시 임금의 엄지(嚴旨)를 받았거나 남에게 드러나게 배척 당한 경우에만 바야흐로 진정(陳情)하여 물러가기를 요구하는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대각(臺閣)에서 탄론(彈論)을 제기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동료들의 의논이 귀일된 다음이라야 하기 때문에, 의견의 차이로 매양 시끄러움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의당 옥당(玉堂)에서 일을 논하는 예(例)에 따라 의견이 통일되면 연명(聯名)을 하되, 의견이 같지 않은 사람은 참여시키지 않아야 됩니다. 전계(前啓)한 가운데 혐의가 있는 사람은 별폭(別幅)에 써서 진달하게 하면 어지러이 인피하는 단서를 근절시킬 수 있습니다. 또 생각건대 재랑(齋郞)은 두 달을 한 달 출사(出仕)한 것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피하면서 원치 않고 있으니, 모두 별검(別檢)·교관(敎官) 등의 직(職)에 제수하소서. 현재 서울에는 참봉(參奉)이 15원(員)이고, 외방의 세 곳 영전(影殿)에는 27원이고, 능관(陵官)은 모두 75원인데, 봉사(奉事)·직장(直長)은 평시에 비하여 많이 감소되었습니다. 종묘(宗廟)에는 봉사·직장이 있고, 예전에는 문소전(文昭殿)에도 직장이 있었으니, 능관을 봉사·직장과 나누어 설치한 것은 조금도 미안할 것이 없습니다. 태조(太祖)와 4대(代) 이하 9릉(陵)에 각각 1원씩 나누어 직장(直長)으로 만들고, 세실(世室)의 9릉(陵)에 각각 1원씩 나누어 봉사(奉事)로 만들고, 영전(影殿) 세 곳에도 각각 1원씩을 나누어 직장(直長)으로 만든다면, 승서(陞序)하는 길이 좁지 않게 되어 침체되는 폐단이 크게 제거될 것입니다. 전곡(錢穀)을 맡은 관사도 15개월이면 천전(遷轉)되는데, 변두(籩豆)를 관장하는 직책인 재랑(齋郞)은 어찌하여 달 수를 배로 늘여 구임(久任)시키는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단 말입니까? 의당 15개월로 한계를 정하여 한결같이 경관(京官)의 경우와 같게 한다면, 사람들이 피하지 않게 될 것은 물론이고, 전조(銓曹)에서 택차(擇差)하기도 쉽게 될 것입니다.

2. 선거(選擧)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중엽(中葉) 이전에는 공경(公卿)·시종(侍從)이 모두 식년시(式年試)를 거쳐서 나왔었습니다. 근래 서울의 선비들은 글읽기를 싫어하고 표절(剽竊)을 즐겨하는 반면 경서(經書)에 밝은 사람은 먼 시골 선비들이 많은데도 대성(臺省)의 청반(淸班)에 오른 사람은 겨우 열에 한둘 뿐입니다. 국전(國典)에 의하면 생원(生員)·진사(進士)는 3백 일 동안 거재(居齋)하여야 관시(館試)076) 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지금은 향유(鄕儒) 약간인(若干人)이 거재하면서 구차스럽게 액수(額數)만을 채우고 있는가 하면 문장의 공졸(工拙)은 헤아리지도 않고 모두 입선(入選)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마땅히 법식(法式)을 정하여 만 1백 인 이상이 된 다음에야 바야흐로 준액(準額)을 헤아려 시취(試取)하도록 할 것이요, 90여 인 이하는 숫자를 반으로 감해 시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각(註脚)은 간략하게 하고 경문(經文)에만 전념하게 해서 삼경(三經)은 반드시 전괘(全卦)·전편(全篇)을 통틀어 외게 하고, 사서(四書)는 1장(章)을 통틀어 외되, 세 대문(大文)에 차지 않는 경우에는 웃장에 연접시키고 아랫장에 잇달게 하여 반드시 세 대문을 채우게 하소서. 주석(註釋)을 통틀어 외게 할 적에는 단지 전두(傳頭)의 훈고(訓詁)만을 거론하게 할 것이요, 장주(長註)는 강하지 말게 하고, 문의(文議)로 강생(講栍)077) 을 만들어 고하(高下)를 한결같이 《대전(大典)》에 따르게 한다면 인재(人才)를 작성시키는 방도에 어찌 보탬이 적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남구만(南九萬)이 논한 바있는 강경(講經)을 1경(經)과 사서(四書)로 나누어 강하게 한 것은 실로 주자(朱子)의 공거의(貢擧議)를 모방한 것인데, 그 일이 성헌(成憲)과 다르다는 것으로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신(臣)이 논한 것은 단지 구전(舊典)을 수명(修明)한 것뿐입니다. 식년시의 무과(武科) 액수(額數)는 28인인데, 근년의 별과(別科)에서 많이 뽑았기 때문에 침체되는 억울함이 있으니, 많이 뽑는 것을 고치고 직부(直赴)하는 길을 간략히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3. 전부(田賦)에 대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양전(量田)078) 을 폐하였기 때문에, 은루(隱漏)된 전지가 많아 세입(稅入)이 날로 줄고 백성들의 부세가 고르지 못한데, 균전사(均田使)가 검핵(檢覈)하는 것도 폐단이 있으니, 각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관장하여 귀정(歸正)하게 하되, 감사(監司)에게 균전사를 겸임하게 하고, 도사(都事)를 가려서 낭청(郞廳)을 삼아 여러 고을에 나누어 다니면서 득실(得實)을 조사하게 하소서. 양남(兩南)·관동(關東)·해서(海西)를 우선적으로 거행하게 하고, 기호(畿湖)의 제도(諸道)는 차제로 개량(改量)하게 하소서. 그리고 일도(一道) 가운데 완급(緩急)의 구별이 없을 수 없으니 도(道)마다 2년으로 나누어 양전(量田)을 끝마치게 하되, 절목(節目)·사의(事宜)는 묘당(廟堂)에서 마련하게 하소서. 도사(都事)와 수령(守令)으로서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즉시 파출시키게 하고, 감사(監司)도 극선(極選)하여 보내게 하소서. 또 묘당(廟堂)에서 각 고을 전결(田結)의 총수를 조사하여 상(上)·중(中)·하(下) 3등급으로 나누고, 풍흉(豐凶)에 따라 받아들이는 조세(租稅)의 실수(實數)를 정하게 하소서. 매년 감사로 하여금 연사(年事)의 풍흉을 살펴서 등제(等第)를 매겨 계문하게 하면, 명년 봄의 조세 수입을 앉아서도 알 수가 있게 될 것이니, 어찌 분명하고도 통서(統緖)가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날에는 전지(田地)를 나누어 주고 백성을 재치(裁治)함에 있어 전지가 있으면 조세(租稅)가 있고 몸이 있으면 용세(庸稅)가 있었으니, 지금 제궁(諸宮)의 전지에 대해 면세(免稅) 조처한 것은 우리 나라의 잘못된 법제입니다. 지금 법대로 납세(納稅)하게 한다면 정령(政令)이 고르게 됨은 물론 부세의 수입도 많아질 것입니다. 궁가(宮家)로 하여금 숫자를 정하여 획급(劃給)하게 하되, 면세를 갑자기 혁파하기가 곤란하다면 각궁(各宮)의 수 외의 면세를 정밀히 조사하게 하여 모두 탁지(度支)로 들어오게 한다면, 경용(經用)이 조금은 넉넉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부역(賦役)에 이르러서는 사리상 의당 균일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이름이 양역(良役)에 예속되어 있어도 바야흐로 신포(身布)를 징수하는 반면 은루(隱漏)되어 한가히 지내는 자 또한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백골(白骨)에게 신포를 징수하고 황구(黃口)079) 가 군오(軍伍)에 편입되어 있으므로, 민원(民怨)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호포(戶布)를 징수하는 것이 제일 양법(良法)인 것 같은데, 갑자기 신법(新法)을 시행하면, 소요가 일기 쉬워 말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원망도 부르게 됩니다. 먼저 백사(百司)의 지용(支用)과 사역(使役)을 헤아려서 절감(節減)하고, 다음으로 기병(騎兵) 이하 양역(良役) 가운데 도망자·사망자에 따라 그 명액(名額)을 감하고 나서 다시 서서히 의논해야 합니다.

4. 군려(軍旅)에 대한 일입니다. 훈국(訓局)은 연하(輦下)에서 믿고 있는 것이므로, 금위(禁衛)는 마땅히 혁파하여야 하나, 갑자기 군문(軍門)을 혁파하면 이해(利害)가 많게 되니, 병존(倂存)시켜 두고 점차 그 제도를 고치는 것만 못합니다. 훈국의 부(部)와 사(司)는 증가하기도 하고 감생하기도 하여 지금은 3천의 병마(兵馬)가 되었습니다. 마땅히 포수(砲手)는 6초(哨)를 감하여 20초(哨)만 남기고, 양부(兩部)에 각기 양사(兩司)를 두어 10초씩을 거느리게 하고, 마병(馬兵)은 2초를 감하고 4초만 남기도록 하소서. 금위(禁衛)에는 별도로 대장(大將)을 설치하여 어영(御營)과 나누어 좌우군(左右軍)을 만들고, 본병(本兵)이 훈국을 겸령(兼領)하여 중영(中營)을 만든 다음 특별히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을 가려서 중군(中軍)에 임명함으로써 장임(將任)의 계제(階梯)가 되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금영(禁營) 휘하의 명색(名色) 가운데 불필요한 것이 아직도 많으니, 의당 일체 이정(釐正)하여 부비(浮費)를 줄여야 합니다. 외방의 경우에는 진관법(鎭管法)을 신명(申明)시켜 절제하게 하고, 대목(大牧)을 주장(主將)으로 삼고 각읍(各邑)을 속장(屬將)으로 삼아 각기 그 군병을 거느리고 봄·가을로 훈련시켜 정예로움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 주진(主鎭)에는 영장(營將)을 혁파하고 중군(中軍)을 두되, 늠료(廩料)는 영장에 견주어 반으로 감하게 하여 군려(軍旅)를 다스리게 한다면, 군제(軍制)에 절로 관할(管轄)이 있게 되어 긴급한 일이 있을 때에 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무사(武士)가 영장(營將)을 혁파함으로써 막연하게 된다면 삼남(三南)의 6, 7개의 무과(武窠)를 덜어내고, 웅부(雄府)에는 그대로 절도(節度)의 계제(階梯)를 두게 한다면, 이는 객환(客宦)인 영장을 두는 것보다 낫게 됩니다. 근래 해마다 기근이 겹쳐 군병이 도망하거나 사망했는데도 첨정(簽丁)의 보충을 독책한다면 백성은 더욱 흩어지고 일에는 실상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의당 도망한 것과 사망한 것을 조사하여 현재 있는 액수(額數)에 따라 초사(哨司)를 감정(減定)함으로써 단속하는 실상이 있고, 수괄(搜括)하는 원망이 없게 해야 하니, 이것이 최선의 양책(良策)입니다. 어찌하여 평상시의 초사(哨司)를 고수하면서 선처할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아름다이 여겨 포장(褒奬)하는 비답(批答)을 내리고 인하여 묘당(廟堂)에 하문하여 채택해 시행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33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52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 재정-역(役)

  • [註 074]
    정목(政目) : 관원들의 임명(任命)·해임(解任) 그 밖의 중요한 사실을 기록한 문서.
  • [註 075]
    하비(下批) : 임금에게 신하가 올린 상소(上疏)나 전주(銓注)에 대하여 비답(批答)을 내리던 일.
  • [註 076]
    관시(館試) : 성균관(成均館)에서 보이는 문과 초시(文科初試). 생원(生員)·진사(進士)로서 거재(居齊)한 지 만 3백 일이 되는 사람들을 녹명(錄名)하여 시험보이는데, 50명을 선발하였음.
  • [註 077]
    강생(講栍) : 강시(講試)의 순번을 추첨으로 정하는 일. 생(栍)이란 길이가 1촌(寸) 반의 둥근 나무에 통(通)·약(略)·조(粗)·불(不)을 각각 1자씩 쓴 것으로, 강(講)의 성적이 우등인 자에게는 통자생(通字栍), 그 다음은 약자생(略字栍), 그 다음은 조자생(粗字栍), 아주 성적이 좋지 못한 자에게는 불자생(不字栍)을 내어 우열(優劣)을 구별함.
  • [註 078]
    양전(量田) : 조선조 때 토지의 넓이를 측량하던 일. 토지를 6등급으로 나누어 20년에 한 번씩 측량하고 양안(量案)을 새로 작성하여 호조(戶曹)·도(道)·군(郡)에 비치하였음.
  • [註 079]
    황구(黃口) : 어린 아이.

○左議政崔錫鼎, 上論事四條箚:

一曰職官。 國初有三公署事之規, 壬辰亂後, 罷署事廳, 設備邊司, 而民憂國計, 進退人物, 皆非備邊所關, 名號不稱, 體統不尊。 宜將備邊, 改稱門下司, 以三公兼領門下平章事。 贊成、參贊, 以卿列中擇差兼帶, 如近日卿宰例兼備局之爲, 與五曹判書、兩都留守, 皆同門下平章事。 此外宰臣有才識者, 極擇兼任, 竝同平章, 而使有司堂上二員專掌。 以通政差有司者, 稱門下僕射, 竝於政目中下批。 舍人、檢詳, 極擇堂下官有才望者, 兼門下給事, 俾管文書。 此外文臣三員、武臣一員, 皆兼門下主司。 如此則名號旣正, 事權自別, 庶有精神運用之效矣。 若夫臺閣引避, 非祖宗朝舊例, 開政頻數, 由於臺諫之數遞。 今宜變其謬例, 必其蒙上嚴旨, 被人顯斥, 方許陳情救退。 臺閣彈論, 必待同僚歸一, 故意見差異, 每每起鬧。 宜遵玉堂論事例, 意同則聯名, 不同者勿參。 前啓中有嫌者, 別幅書進, 則可絶引避紛紜之端矣。 且念齋郞, 以倍朔計仕之故, 人皆避而不願, 皆爲別檢、敎官等職。 見今京參奉十五員, 外方三處影殿二十七, 陵官竝七十五員, 而奉事、直長, 比平時多減。 宗廟有奉事、直長, 舊有文昭殿直長, 陵官之分設奉、直, 少無未安。 太祖及四代以下九陵各一員, 分作直長, 世室、九陵各一員, 分作奉事, 影殿三處各一員, 亦分作直長, 則序陞之路不狹, 淹滯之弊大祛矣。 錢穀之司, 尙且十五朔而遷齋郞, 職是籩荳, 何必倍朔爲久任之制乎? 宜以十五朔爲限, 一如京官之爲, 則人不厭避, 銓曹易於擇差矣。 二曰選擧。 我國中葉以前, 公卿、侍從, 皆由式年進。 近歲京華之士, 厭誦讀而樂剽竊, 明經者多遐遠之士, 其得通於臺省淸列者, 僅十之一二。 國典, 生、進三百日守齋, 許赴館試, 而今則只鄕儒若干人守齋, 苟充額數, 不計文之工拙而皆入選焉。 今宜定式, 滿百人以上, 方計準額試取, 九十餘人以下, 取減半之數。 且令略其註脚, 專意經文, 三經則必通誦全卦、全篇, 四書通誦一章, 未滿三大文者, 令連上接下, 必滿三大文。 通誦註釋, 只擧傳頭訓詁, 而勿講長註, 以文義爲講牲高下, 一依《大典》, 則其於作成人才之道, 豈少補哉? 南九萬所論分講一經四書, 實倣朱子貢擧議, 而事異成憲, 未果施行。 今臣所論, 只是修明舊典也。 式年武科額數二十八人, 近歲別科廣取, 掩滯冤鬱, 莫如改其廣取, 約其直赴之路矣。 三曰田賦。 久廢均量, 又多隱漏, 稅入日縮, 民賦不均, 而均田使撿覈, 亦有弊端。 宜令各邑守令, 句管歸正, 以監司兼均田使, 擇都事爲郞廳, 分行列邑, 按覈得實。 兩南、關東、海西, 爲先擧行, 畿湖諸道, 次第改量, 而一道不無緩急之別, 每道分二年完量, 而節目、事宜, 自廟堂磨鍊。 都事、守令不堪職者, 卽令黜遣, 監司亦極擇以送。 且自廟堂, 取考各邑田結總數, 各分上、中、下三等, 隨豐歉定爲收租實數。 每年監司察年事之凶稔, 等第以聞, 則明春收租多寡, 可坐而知, 豈不明的而有統緖哉? 古者分田制民, 有田則有租, 有身則有庸, 諸宮免稅, 是我國謬制。 今若使如法納稅, 則政令旣均, 賦入亦廣。 宮家用度, 令地部定數劃給, 而免稅如難遽罷, 令精査各宮數外免稅, 悉還度支, 則經用可以少紓矣。 至於賦役, 理宜均一, 而名隷良役, 方徵身布, 隱漏閑遊, 其麗不億。 白骨徵布, 黃口編伍, 民怨極矣。 戶布之徵, 最似良法, 而遽行新法, 易至騷擾, 難言之憂, 不但招怨。 先將百司支用及使役, 量宜節減, 次將騎兵以下良役, 隨逃故減其名額, 更容徐議。 四曰軍旅。 訓局, 輦下所恃, 禁衛在所當罷, 而猝罷軍門, 有許多利害, 莫如倂存, 稍改其制。 訓局部、司, 或加或省, 今爲三千兵馬。 宜量減, 砲手六哨, 只存二十哨, 兩部各置兩司, 以領十哨, 馬兵, 減其二而存其四哨。禁衛別設大將, 與御營分爲左右軍, 本兵兼領訓局, 爲中營, 別擇材武爲中軍, 以爲將任階梯。 禁營(票)〔標〕 下名色, 尙多剩冗, 宜一切釐正, 以省浮食。 外方則申明鎭管法以節制, 大牧爲主將, 各邑爲屬將, 各率其兵, 春秋訓鍊, 以致其精。 主鎭罷營將而置中軍, 廩給視營將減半, 以治軍旅, 則軍制自有管轄, 可爲緩急之用矣。 武士若以罷營將落莫, 則除出三南六七武窠, 雄府仍作節度階梯, 則又勝營將之客宦矣。 比年荐饑, 軍兵逃故, 督令簽補, 則民益散而事無實。 宜査減逃故, 因其時存額數, 減定哨司, 俾有團束之實, 無搜括之怨, 此最良策。 何可膠守常時哨司, 而不思善處之方乎?

上賜批嘉奬, 仍令詢于廟堂而採施。


  • 【태백산사고본】 36책 33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52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 재정-역(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