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교리 박정이 편당의 화를 상소하다
부교리(副校理) 박정(朴涏)이 상소(上疏)하기를,
"아! 편당(偏黨)의 화(禍)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어찌 오늘날과 같은 경우가 있겠습니까? 동인(東人)·서인(西人)의 색목(色目)은 선조(宣祖) 때부터 있었으나, 반정(反正)한 처음에 이르러 위에는 성조(聖祖)께서 계시고 아래로는 명신(名臣)이 많았으므로, 자못 피차를 섞어서 어진 인재를 가려 쓸 수 있었습니다. 선왕(先王)께서 만년에 예(禮)를 의논한 것이, 잘못된 것을 깊이 깨닫고 바로잡으려 하다가 미처 못하셨는데, 전하께서 새로 즉위하시기에 이르러 이미 방례(邦禮)를 바로 잡고 이어서 출척(黜陟)을 행하셨으나, 굽은 것을 바로잡는 것이 너무 지나치고, 주고 빼앗는 것이 너무 치우쳐서, 도리어 독임(獨任)119) 이라는 비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고 빼앗은 것은 관작(官爵)에만 있었고, 벌받은 것도 귀양가는 데에 그쳤으므로, 그래도 너무 심하지는 않았는데, 경신년120) 에 이르러서는 다만 요역(妖逆) 때문이었으나,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함정을 아울러 만들어서, 살육(殺戮)이 비로소 행하여지고 밀계(密啓)하고 기찰(譏察)하되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조지겸(趙持謙) 등이 의리를 창도(倡道)하여 막지 않았다면, 한편 사람들 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자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변혁이 있을 때마다, 문득 서로 보복하려고 생각하여 죽이고 귀양보내기를 오직 하고 싶은 대로 하였습니다. 아! 당의(黨義)가 서로 다투어 나라의 일이 소란한 것이 이미 말할 수 없게 되었는데, 궁위(宮闈) 안에서는 폐립(廢立)하고 승강(陞降)하는 변이 있었으니,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기사년121) 초기에 뭇 의논을 물리치고 큰일을 독단하여, 은의(恩義)가 어그러지고 대륜(大倫)이 바르지 않게 하신 것은 진실로 과실이었으나, 마침내 다행히 과실을 고치고 어긋난 것을 회복하시어, 곤의(壼儀)가 다시 새로워져서 일월(日月)이 함께 빛나니, 이것은 또한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전대(前代)의 임금들 중에 짝을 바꾼 일은 있어도 한때에 두 후(后)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마땅히 선처할 방도를 생각하여 지당하게 될 뜻을 찾아야 할 것인데, 다만 성교(聖敎) 때문에 그대로 희빈(禧嬪)의 구작(舊爵)을 내리는 명이 있었으니, 신(臣)은 미안하게 여깁니다. 일찍이 국모(國母)의 지위에서 지존(至尊)에 짝하여, 신민(臣民)에 임한 것이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이제 첩어(妾御)와 동렬(同列)이 되었으니, 이것이 윤리에 어떠하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는 말하기를, ‘왕후에서 한 등급을 낮추면 절로 빈(嬪)이 되는데, 또 더 예(禮)를 높이면 왕후와 존귀(尊貴)함이 맞서게 되는 혐의가 있다.’ 하나,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른바 왕후와 존귀함이 맞서게 되는 것은 평소 경상(經常)을 지킨다는 말이고, 이제는 다만 예(禮)에 두 후(后)가 없다는 의리 때문에 그 위호(位號)를 낮추었으니, 어찌 상제(常制)만을 굳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널리 묻고 널리 상고하여, 예우(禮遇)하는 절차를 상례와 달리하여, 공봉(供奉)을 적당히 더하고, 따로 명호(名號)를 세워서 처변(處變)하는 방도에 모자람이 없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지난번 박만정(朴萬鼎)이 상소한 데에는 참으로 소견이 있었는데, 오로지 채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령(禁令)도 두셨습니다. 여러 해 동안 무사(無事)하던 끝에 문득 이런 변절(變節)을 만났으므로, 혹 처변(處變)하는 도리가 진선(盡善)하지 못할 수도 있을까 염려하여 운운하였을 것인데, 대저 무슨 다른 생각이 있었다고 이제 금령을 세워서 사람의 입을 막으십니까? 아마도 성조(聖朝)의 거조(擧措)가 아닐 듯하니, 빨리 이 금령을 없애고 널리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마시기를 아울러 바랍니다."
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품계(稟啓)하고 봉입(捧入)하니, 전교(傳敎)하기를,
"금령을 어기고 상소한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하니,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0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422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비빈(妃嬪)
- [註 119]
○丁亥/副校理朴涎上疏曰:
嗚呼! 偏黨之禍, 何代無之, 而豈有如今日者耶? 東、西之目, 自宣廟朝有之, 及至反正之初, 上有聖祖, 下多名臣, 頗能參合彼此, 揀用賢才。 先王晩節, 深悟議禮之失, 思欲釐正而未及, 逮殿下新卽位, 旣正邦禮, 仍行黜陟, 而矯枉太過, 與奪太偏, 反有獨任之譏。 然其與奪, 只在官爵, 被罰亦止流竄, 猶不至太甚, 至于庚申, 特因妖逆, 延及異己, 機穽竝作, 殺戮始行, 密啓譏察, 無所不爲。 倘非趙持謙輩倡義以遏, 則一番人得脫者幾希。 自玆以來, 每當變革, 輒思相報, 殺戮竄逐, 惟其所欲。 嗚呼! 黨議相傾, 國事之波蕩, 已不可言, 而至於宮闈之內, 亦有廢立陞降之變, 尙何言哉? 殿下於己巳初, 排群議獨斷大事, 使恩義乖離, 大倫不正, 固是過擧, 而終幸過而旣更, 睽而乃復, 壼儀重新, 日月齊輝, 此又盛德事也。 第念前代帝王, 有易配之擧, 而未聞有一時兩后。 宜思善處之道, 以求至當之歸, 而特因聖敎, 有仍賜禧嬪舊爵之命, 臣竊以爲未安。 曾在國母之位, 配至尊, 而臨臣民積有年所, 今乃與妾御同列, 此於倫理何如也? 議者以爲: ‘下王后一等, 自當爲嬪, 又加尊禮, 有竝后匹尊之嫌。’ 此亦不然。 所謂竝后匹尊者, 乃常時守經之論也。 今只以禮無二后之義, 降其位號, 安可膠守常制? 必須廣詢博考, 禮遇之節, 異於常例, 量加供奉, 別立名號, 無歉於處變之道可也。 向者朴萬鼎之疏, 誠有意見, 而不惟不用, 又設禁令。 多年毋事之餘, 遽遭此變節, 或慮處變之道, 未得盡善, 有所云云, 夫豈有他慮, 而今乃因此立禁, 以防人口, 恐非聖朝擧措也。 竝願亟除此禁, 毋示不廣。
政院稟啓捧入, 傳曰: "違禁陳疏, 極涉未安, 還出給。"
- 【태백산사고본】 32책 30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422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비빈(妃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