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강민저가 간사한 신하를 물리치는 일로 응지 상소하다
유학(幼學) 강민저(姜敏著)가 응지(應旨)하여 상소하여서, 천리(天理)를 밝히어 천토(天討)를 행하고 간사한 태도를 살피어 간사한 신하를 물리치기를 청하였으니, 간사한 신하란 남구만을 가리킨 것이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강민저를 나국(拿鞫)하기를 명하였으니, 그 소에 이르기를,
"신이 작년 여름에 분수를 범하여 말을 올려 무겁게 천노(天怒)에 저촉(抵觸)되어서 스스로 몸이 부서질 줄 알았는데, 성인(聖人)의 도량(度量)이 하늘처럼 크시어 고화(膏火)417) 나 침질(椹質)418) 의 형벌에 처하지 않으셨으니, 은혜에 감격함이 끝없어서 더욱 성명(性命)의 가벼움을 깨달았습니다. 아! 장희재(張希載)의 조는 전하께서 이미 맨 먼저 발설(發說)하시고 양사(兩司)의 계청(啓請)이 해를 지내도록 서로 버티면서 멈추지 않았으니, 이것으로 온 나라의 공공(公共)의 의논임을 볼 수 있습니다. 당초에 대신(大臣)의 의논이 그 말을 들으면 나라에 충성스러운 것 같지만, 그 실지를 살핀다면 단지 몸을 위하여 꾀하였으니, 그 맨 처음에 논한 바 곤위 승강(壼位升降)을 논한 계사(啓辭)는 앞을 보고 뒤를 돌아보며 용의(用意)가 교묘하고 주밀하여 정태(情態)의 주무(綢繆)419) 함이 그 폐간(肺肝)을 보는 듯하였으니, 오직 당시 사람의 이목(耳目)을 가리우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천만세(千萬世)의 뒤에서도 또한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른바 의친 제권(議親制權)420) 의 의논으로 더불어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서, 이는 종사(宗社)에 불충(不忠)함이 이것보다도 드러나는 것은 없는데도, 뜻에 영합(迎合)하는 자가 이를 일러 국가를 깊이 근심하고 멀리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니, 아첨하고 기망(欺罔)하는 말이 어찌 이에 이른단 말입니까? 국가가 대각(臺閣)의 벼슬을 두는 것은 대신(大臣)의 옹폐(壅蔽)421) 를 막으려는 것인데, 이제 옹폐를 도와주고도 부족하여 심지어는 충성이라고 일컬었으니, 그 또한 사람의 성품과 다른 것입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그 날의 첫번째 계사를 취하시어, 그 먼저 할 것을 버리고 다만 그 다음 가는 것을 말하여 뜻에 맞추어서 몸을 굽신거리고 주저하여 머뭇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아 눈치를 살피는 꼴을 세밀히 추구(追究)하신다면, 그 뜻의 있는 바를 알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당초에 뜻을 세움이 또한 범상(凡常)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臣)이 그 만절(晩節)의 그르침을 애석히 여겨, 옛사람의 재상(宰相)에게 올린 글의 예(例)에 의거하고 모방하여 수천 언(數千言)의 많은 글을 써서 되풀이하여 규간(規諫)하여 경계하고 ‘국화꽃의 늦은 계절에 향기로움을 보고자 하노라.[要看寒花晩節香]’라는 귀절로써 끝맺았으니, 이것은 실로 충고하고 선도(善導)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굽은 길로 들어가서 종시 머리를 돌리려 하지 않으니, 이것이 왕안석(王安石)422) 이 송(宋)나라를 그르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왕안석은 오히려 세상을 바로잡고 풍속을 변화시키려는 뜻이 있어서 꾀하는 바가 있었지만, 이제 남구만은 수상(首相)의 지위에 있으면서 세상을 다스려 사물(事物)을 재제(宰制)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고 몸을 용납하여 은총을 굳히는 것을 방술(方術)로 삼아, 충성으로 세상을 광구(匡救)하는 도움은 없고,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고 염려하는 태도가 있으니, 오직 세속(世俗)에 좇아 안일(安逸)만을 도모하여 그 사사로움을 도모하는 자라는 것은 길가는 사람이 모두 압니다. 전하께서 그 쓸 수 없음을 이미 시험하셨는데도, 다시 이 자리에 두심은 어찌된 것입니까? 장희재(張希載)를 토죄(討罪)하기를 청한 의논은 대의(大義)가 소연(昭然)한데도, 전하께서는 정론(正論)에 굽힘을 당함을 부끄럽게 여기시고 간사하여 아첨하는 자에게 속임을 받음을 잊으시어 ‘대사(大事)에 임하여서 뜻을 변치 않는다.’는 말씀으로 하교하셨으니, 전하의 생각하지 않으심이 어찌 그다지도 심한 것입니까? 훼비(毁碑)423) 의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이는 곧 응당 행하여야 할 절목(節目)으로서 예(禮)를 폐할 수 없는 것인데도, 해사(該司)에서 주품(奏稟)하지 않고, 대신이 또한 함묵(含默)하여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큰 길 위에 우뚝 섰으니, 심히 놀라운 것입니다. 최계옹(崔啓翁)의 소(疏)가 이제 비로소 나와서 한 오라기의 곧은 기운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전하께서 이에 보답하지 않으심은 어찌된 것입니까?
아! 오늘의 나랏일은 부리의 길이가 석 자나 되어도 다 말할 수 없으며, 천재(天災)가 거듭되어 민심(民心)의 이산(離散)과 기근(飢饉)과 도적의 참상(慘狀)이 섶을 쌓아 놓은 것이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어서 거의 눈썹을 태우는 화가 박두(迫頭)하였으니, 황황 급급(遑遑汲汲)한 근심이 이보다도 큰 것은 없는데도, 수상(首相)은 이것을 제3건(第三件)의 일로 여겨서, 왕안석의 이른바 ‘천변(天變)이 족히 두려울 것 없다.’는 설(說)이 불행하게도 이에 가깝습니다. 임금의 신임을 얻음이 그처럼 오로지하니, 마음을 다하여 바로잡아 보좌(輔佐)한다면 마땅히 섭리(燮理)424) 의 공효(功效)를 볼 수 있는데도, 오히려 능히 백료(百僚)를 진복(鎭服)하지 못하여서 하늘을 감동(感動)시켜 상서(祥瑞)를 이르게 함이 없고, 도리어 오늘의 재앙을 부르게되는 것은 반드시 이 사람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죄가 윤기(倫紀)에 관계되는 데도 마침내 그 옥사(獄事)를 너그럽게 용서한다면 온 나라의 자제(子弟)되고 신하된 자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없고, 행적(行迹)이 아첨하는 데에 관계됐는데도 여전히 수상의 자리에 둔다면 인신(人臣)이 되어 임금에게 불충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김이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천토(天討)를 행하시어 대의(大義)를 온 나라에 밝히시고, 영신(佞臣)을 물리치시어 여정(輿情)의 울분(鬱憤)을 쾌하게 하소서."
하였다. 또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한 것이 수백 언(數百言)에 이르러서 말이 자못 절실하였다. 또 윤증(尹拯)을 초치(招致)하고 친림(親臨)으로써 하교하시어 지난날에 유상(儒相)425) 에게 하던 것같이 하기를 청하고, 끝에 또 춘궁(春宮)을 보도(輔導)하는 데 조금도 늦추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사설(辭設)이 패악(悖惡)하고 망령되나 이미 응지(應旨)를 말하였기 때문에 바치지 않을 수 없는 뜻으로써 계달(啓達)하니, 임금이 곧 명하여 그 소를 돌려주고, 이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남의 지주(指嗾)를 들어 전후(前後)로 담당한 것이 마침내 반드시 나라를 망친 뒤에야 그만두려 하니, 생각이 이에 이르매 통심(痛心)을 깨닫지 못하겠다. 나국(拿鞫)하여 엄히 물어서 정죄(定罪)하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유생(儒生)을 나국함이 청문(聽聞)을 놀랍게 함이 있음을 가지고 두 번 아뢰어 복역(覆逆)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비망기를 내리어 승지(承旨)를 보내어 가서 남구만에게 유시(諭示)케 하였으며,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세화(李世華)와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이동욱(李東郁)은 강민저를 남간(南間)에 가두고 가축(枷柤)426) 을 갖추어서 마치 역옥(逆獄)을 다스리는 모양같이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놀래었다. 이세화가 후일에 또 연중(筵中)에서 강민저의 소를 가리켜 절통(絶痛)하다고 하였다. 아! 이동욱 같은 자는 어찌 족히 책(責)하리오만, 이세화로서 이와 같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31책 29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402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역사-고사(故事)
- [註 417]고화(膏火) : 죄인을 기름불로 태우는 것.
- [註 418]
침질(椹質) : 죄인을 목베는 틀.- [註 419]
주무(綢繆) : 서로 얽힘.- [註 420]
의친 제권(議親制權) : 의친은 친속의 죄를 의논하는 것이니, 오속(五屬)의 내친(內親) 및 외친(外親)의 복(服)이 있는 자가 죄를 범하였을 때에 그 처벌 여부(處罰與否)를 의논하는 것이다. 즉 의친의 권한을 손에 넣어서 마음대로 하는 것임.- [註 421]
옹폐(壅蔽) : 임금의 총명을 가리움.- [註 422]
왕안석(王安石) :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정승.- [註 423]
훼비(毁碑) : 장 희빈(張希嬪)이 왕비의 지위에서 강등(降等)되어서 그 아비 장형(張炯)도 국구(國舅)의 지위를 상실(喪失)하였으므로, 옥산 부원군(玉山府院君)의 위호(位號)가 들어 있는 그의 무덤의 비석을 부수어야 한다는 것임.- [註 424]
○幼學姜敏著應旨上疏, 請明天理行天討, 燭侫態黜侫臣。 侫臣指南九萬也。 上大怒, 命拿鞫敏著。 其疏曰:
臣於昨年之夏, 犯分獻言, 重觸天怒, 自分摧碎, 聖度天大, 不以膏諸椹質, 感恩罔極, 益覺性命之爲輕也。 噫! 希載之罪, 殿下旣已首發之矣, 兩司之啓, 經年相持而不止, 則此可見一國公共之論也。 當初大臣之議, 聽其言似忠於國, 察其實只爲身謀, 其所首論壼位升降之啓, 瞻前顧後, 用意巧密, 情態綢繆, 如見其肺肝, 不惟難掩於時人之耳目, 抑亦無所逃於千萬世之後。 與其所謂議親制權之議, 實相表裏, 此乃不忠於宗社, 無有著見於此者, 而承望之人, 反以此謂之國家深憂遠慮, 諂附欺誣之言, 胡至此哉? 國家置臺閣之官, 所以防大臣壅蔽, 而今乃護其壅蔽之不足, 至謂之忠者, 其亦异乎人之性也。 殿下試取其伊日第一啓辭, 細究其捨其所先, 只語其次, 回互委曲, 徘徊顧望處, 則其指意所在, 有不難知者矣。 此人當初樹立, 亦非常人, 故臣惜其晩節之誤, 依倣古人上宰相書之例, 多費累數千言, 反復規警, 結之以要看寒花晩節香之句, 此實出忠告善導之意, 而旣入曲逕, 終不肯回頭, 此安石之所以誤宋也。 然安石尙有矯世變俗之志, 有所猷爲, 而今九萬, 居台位之首, 不以經世宰物爲心, 以容身固寵爲術, 無忠讜匡救之益, 有遲徊顧慮之態, 唯欲沈浮偸安, 以濟其私者, 路人皆知之矣。 殿下已試其不可用, 而復置此地者, 何也? 請討希載之論,大義昭然, 而殿下恥見屈於正論, 忘受欺於奸諛, 乃以臨大事不變志爲敎, 何殿下不思之甚耶? 至於毁碑一事, 此乃應行節目, 禮不可廢者, 而該司不爲奏稟, 大臣亦復含默, 至今因仍屹立於大道之上, 甚可駭者, 而崔啓翁之疏, 今乃始出, 一綫直氣, 尙或不泯, 而殿下之不報於是者, 何也? 噫! 今日國事, 喙長三尺而不可盡言, 天災之洊疊, 民心之離散, 飢饉盜賊之慘, 不啻若積薪在下, 殆迫燃眉, 遑遑汲汲之憂, 無有大於此者, 而首相以此爲第三件事, 安石所謂天變不足畏之說, 不幸近之矣。 得君其專, 盡心匡輔, 則宜見燮理之效, 而尙不能鎭服百僚, 其無可格天致祥, 而反召今日之災者, 未必非此人也。 罪關倫紀而終宥其獄, 則無以服一國爲子爲臣者之心矣, 迹涉諛侫而因置首席, 則無以愧爲人臣不忠於君者矣。 伏願殿下, 亟行天討, 以明大義於一國, 屛黜侫臣, 以快輿情之憤鬱焉。
又論君德時弊, 縷縷數百言, 言頗切實。 又請招致尹拯, 敎以親臨, 如向日儒相之爲, 末又言輔導春宮, 不容少緩之意。 政院以辭說悖妄, 而旣曰應旨, 故不得不捧入之意啓達, 上卽命還給其疏, 仍下備忘記曰: "聽人指嗾, 前後擔當, 終必亡人國家而後已, 思之至此, 不覺痛心也。 拿鞫嚴問定罪。" 政院以拿鞫章甫, 有駭聽聞, 再啓覆逆, 上不納。 又下備忘記, 遣承旨往諭于九萬, 判義禁李世華、同義禁李東郁, 囚敏著於南間, 具枷杻如治逆狀, 人皆駭之。 世華後日, 又於筵中, 指敏著疏爲絶痛。 噫! 如東郁者, 何足誅, 世華而如此, 豈非可羞乎?
- 【태백산사고본】 31책 29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402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역사-고사(故事)
- [註 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