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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28권, 숙종 21년 5월 11일 임신 3번째기사 1695년 청 강희(康熙) 34년

우부승지 박태순이 물의 때문에 체직되다

우부승지(右副承旨) 박태순(朴泰淳)이 물의(物議) 때문에 패초(牌招)를 어기고 체직(遞職)되어 취리(就理)하였다. 박태순은 바로 박태보(朴泰輔)의 종형(從兄)이다. 기사년156)박태보가 상장(上章)하던 날 박태순이 새로 홍천 현감(洪川縣監)이 되어 미처 사폐(辭陛)하지 못하고 있던 중에 또한 따라서 참여하였다. 그런데 박태보가 장형(杖刑)을 당하여 죽게 되자, 일을 같이했던 다른 여러 사람들은 모두 벼슬을 버렸으나, 유독 박태순만은 의기양양하게 홍천읍(洪川邑)에 부임하였다. 뒤에는 또 장희재(張希載)를 아첨하여 섬겼고, 그가 정권을 잡자, 여러 소인들이 누차 제수한 벼슬을 모두 사양하지 않았으며, 춘방(春坊)157) 의 벼슬에까지 임명되었다. 최후에는 외직으로 나가서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는데, 장희재가 총융사(摠戎使)로서 순찰하는 길에 남양부에 들르니, 박태순이 동헌(東軒) 【바로 수재(守宰)가 사무를 보는 곳이다.】 에서 맞아들이며 사도(使道) 【바로 관하(管下)에서 주장(主將)을 지칭하는 호칭이다.】 라 칭하며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였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중에 서로 깊은 정이 곡진하니 장희재의 장교(將校)들까지도 모두 침뱉으며 비루하게 여기었다. 갑술년158) 초기에 이르러 승지(承旨)로 발탁하자,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조정에 만일 격탁 양청(激濁揚淸)159) 의 조처가 있었다면, 이동욱(李東郁)·박태순(朴泰淳)·오도일(吳道一)·유성운(柳成運)·이사상(李師尙)과 같이 권흉(權兇)을 붙좇아 이익이나 탐하며 염치없이 군 자들은 반드시 삭직(削職)의 대상에 포함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남구만(南九萬)의 무리가 말하기를,

"여태까지 주상(主上)께서 비록 큰 과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신하들이 벼슬하지 않을 의리는 없으니, 군(郡)·읍(邑)에서 벼슬살이한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하고, 드디어 한결같은 뜻으로 부호(扶護)하니 사론(士論)이 모두 모두 몹시 분개하였다. 대사간 신양(申懹)이 비로소 이 일을 언급하였으나 역시 그 이름을 나타내지는 아니하였는데, 박태순신양과 같이 시원(試院)에 들어갔다가 신양에게 묻기를,

"영공(令公)의 상소 가운데 있는 ‘실각 분추(失脚奔趨)’라는 말이 나를 지적해서 한 말이라 하는데 그렇습니까?"

하니, 신양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시험(試驗)을 마친 후에 박태순이 부득이 인입(引入)했는데, 이때에 와서 패초(牌招)를 어긴 일로써 체직(遞職)되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기사년160) 에 폐비(廢妃)시킨 조처가 만일 주상(主上)의 우연한 사려(思慮)의 실수로써 의노(疑怒)를 지나치게 한 데서 나온 것이라면, 그 당시의 신자(臣子)들이 벼슬하지 않을 의리가 없다. 하지만 무진년161) 겨울 민종도(閔宗道)·민암(閔黯)·이담명(李聃命)·유명천(柳命天)·유명현(柳命賢)·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이의징(李義徵) 등이 어두운 밤중에 장희재의 집에 출입하며 경영하고 모의한 것이, 다만 국모(國母)의 폐출(廢黜)과 그들이 다시 입궐(入闕)하는 데 있었고, 장희재는 드디어 희빈(禧嬪)과 함께 ‘중전(中殿)이 세자(世子)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등의 말로써 날마다 임금의 귀에 침윤(浸潤)162) 시켰다. 주상이 춘추(春秋) 30세에 비로소 아들 한 분을 두었으니, 이런 말을 듣고서 어찌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았겠는가? 이에 옛 신하들을 모두 내쫓아 흉악한 무리들을 끌어들여 등용하고, 끝내는 왕비를 폐위(廢位)시키는 조처가 있게 되었으니, 이는 대개 흉악한 무리들의 종용(慫慂)으로 말미암아 성립된 일이다. 그 당시 주상의 과오는 단지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한 일163) 에 불과할 뿐이었으나, 기사년의 당인(黨人)들은 모두가 이이첨(李爾瞻)이요 정인홍(鄭仁弘)인 것이다. 사대부(士大夫)로서 조금이나마 명절(名節)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차마 이이첨·정인홍의 밑에 무릎을 꿇고 붙좇을 수가 있으며, 또한 어찌 차마 장씨(張氏)를 신하로 섬기는 것을 마음에 달갑게 여기며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이동욱 등은 다만 벼슬에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또 현저하게 아첨하여 들러붙은 자취가 있는데도 남구만 등이 이에 부호(扶護)하고 현용(顯用)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이는 장차 윤상(倫常)을 무너뜨리고 인리(人理)를 멸절(滅絶)되게 하고야 말려는 것이다. 맹자(孟子)와 같은 분을 얻어서 준엄한 말로 배척하여 사설(邪說)이 일어날 수 없도록 하지 못하였으니, 통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30책 28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77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왕실-비빈(妃嬪)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 [註 156]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157]
    춘방(春坊) :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
  • [註 158]
    갑술년 : 1694 숙종 20년.
  • [註 159]
    격탁 양청(激濁揚淸) : 탁류(濁流)를 치고 청파(淸波)를 일게 함. 곧 악(惡)을 배격하고 선(善)을 부양(扶揚)한다는 말.
  • [註 160]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161]
    무진년 : 1688 숙종 14년.
  • [註 162]
    침윤(浸潤) : 물이 점점 배어들어 가듯이 남을 여러 번 헐뜯어서 곧이듣게 하는 일.
  • [註 163]
    한(漢)나라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인종(仁宗)이 한 일 : 광무제(光武帝)의 일이란 후한(後漢) 광무제가 그 후(后)인 곽황후(郭皇后)가 총애가 식은 것을 원망하므로, 곽황후를 폐하고 귀인(貴人) 음씨(陰氏)를 새 황후로 세운 것을 말함. 그리고 송(宋) 인종(仁宗)의 일은 인종의 후(后)인 곽황후(郭皇后)가 폐출된 일을 말함. 인종은 곽황후를 박대하고 상미인(尙美人)을 총애하였는데, 하루는 상미인이 곽황후를 침범하는 말을 하자 곽황후가 분을 참지 못하고 상미인의 뺨을 쳤음. 이를 인종이 막으려다가 잘못하여 목에 상처가 났으므로, 이를 빌미로 하여 곽황후를 폐출시킨 것임.

○右副承旨朴泰淳, 以物議違牌, 遞職就理。 泰淳朴泰輔之從兄也。 當己巳泰輔上章之日, 泰淳新爲洪川縣監, 未及辭陛, 亦隨參焉。 及泰輔杖死, 同事諸人, 無不棄官, 而獨泰淳揚揚赴邑。 後又謟事希載, 及當路, 群奸屢除官, 皆不辭, 至拜春坊官。 最後出爲南陽府使, 希載以摠戎使, 巡過南陽, 泰淳邀入於東軒, 【卽守宰視事之所也。】 稱以使道, 【卽管下稱主將之號也。】 事之甚恭, 笑語繾綣, 希載將校, 亦皆唾鄙之。 及甲戌初, 擢拜承宣, 論者咸曰: "朝廷如有激揚之擧, 則如李東郁朴泰淳吳道一柳成運李師尙之趨附權兇, 嗜利無恥者, 必在鋤削之中。" 九萬輩以爲: "向來主上, 雖有大過擧, 臣子無不仕之義, 則翺翔郡邑者, 有何罪耶?" 遂一意扶護, 士論咸痛慨之。 大司諫申懹, 始及此事, 而亦不著其名, 泰淳, 同入試院, 問曰: "令之疏中失脚奔趨者, 指我而發云, 然耶?" 曰: "然矣。" 罷試之後, 泰淳不得已引入, 至是違牌遞職。

【史臣曰: "己巳廢妃之擧, 若出於主上之偶失思慮, 過致疑怒而然, 則其時臣子, 固無不仕之義, 而當戊辰冬, 宗道聃命命天命賢來善德遠義徵等, 昏夜出入於希載家, 經營謀議, 只在於國母之廢黜、渠輩之復入, 希載遂與禧嬪, 以坤宮不利世子等說, 日日浸潤於聖聽。 主上春秋三十, 始有一子, 得聞此說, 寧不驚懼乎? 於是, 盡黜舊臣, 引用兇徒, 卒有廢妃之擧, 蓋由於兇徒慫慂而成也。 當時主上之過擧, 不過爲 光武 仁宗, 而己巳黨人, 無非爾瞻仁弘也。 士夫之稍有名節者, 豈忍屈膝趨走於爾瞻仁弘之下風, 亦豈忍甘心臣事於張氏而不之恥乎? 況東郁輩, 不但從仕而已, 又顯有諂附之迹, 而九萬等乃扶護顯用之不暇, 是將使倫常淪斁, 人理滅絶而後已。 恨不得如孟子者, 辭而闢之, 使邪說者不得作也, 可勝痛哉?"】


  • 【태백산사고본】 30책 28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77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왕실-비빈(妃嬪)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