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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27권, 숙종 20년 11월 7일 신미 3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주강에 나아가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좌의정 박세채(朴世采)도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박세채가 아뢰기를,

"엊그제 올린 차자에 대한 비답(批答)은 신의 차자와 뜻과 같지 않았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의 일기(日記)에 ‘청백리(淸白吏)를 고쳐 염근리(廉謹吏)라고 했는데, 이준경(李浚慶)명종(明宗) 임자년510) 에 이미 염근리로 뽑혔고, 그 뒤 선조조(宣祖朝)에는 또한 청백리로 추후에 뽑혔다.’고 되어 있어, 두 가지 말이 서로 달랐습니다. 효종(孝宗)께서 일찍이 이후원(李厚源)이 사책을 고찰하러 가자, 드디어 청백리에 대해서도 아울러 고찰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역시 기록한 문적(文籍)이 없었기 때문에 이조(吏曹)에 기록해 놓은 것도 자못 자세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번에 뽑는 염근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이원익의 일기에 있는 ‘2품(品) 이상이 모여서 의논하고 묘당(廟堂)에서 결정한다.’는 예대로 하고, 조종조(祖宗朝)의 청백리에 있어서는 실록(實錄)을 고찰해 본 다음에 성안(成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기고, 내년봄에 실록을 포서(曝書)할 때를 기다렸다가 고찰하도록 명하였다. 박세채가 또 아뢰기를,

"효종(孝宗)께서 원대한 뜻을 두시어 훈구(勳舊)의 자손들을 임용(任用)하려 하시며 신여철(申汝哲)에게 무예(武藝)를 익히도록 명하셨습니다. 신여철이 군사를 맡은 지 수십 년 동안 별로 과오가 없었는데, 상관(上官)이 내린 명령에 관해 단지 장관(將官)이 가서 신고하도록 했었기에, 영상(領相)이 체통이 서지 않은 것으로 우려하였음은 또한 지나친 일이 아닙니다. 다만 대장을 파직함은 작은 일이 아니기에 물정(物情)이 이를 들어 불안스러워하니, 마땅히 서용(敍用)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검토관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임원구(任元耉)가 대신(大臣)의 일에 관해 말한 것을 비록 조정에서는 죄 주지 않았습니다마는, 임원구가 패소(牌召)를 어기다가 스스로 파직되었으니, 마땅히 서용(敍用)해야 합니다."

하고, 박세채가 아뢰기를,

"요사이 대신(臺臣)으로서 대신의 일을 말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임원구가 말을 하였습니다. 신이 그래서 칭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임원구가 대신의 심술(心術)을 매우 심각하게 논했기에 대신이 이미 이로 인해 인퇴(引退)했으니, 아마도 성습하게 서용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고, 시독관(侍讀官) 이건명(李健命)이 아뢰기를,

"제갈양(諸葛亮)의 말이 ‘부지런한 자신의 잘못을 다스린다.’고 했으니, 대신의 도리가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임원구의 파직은 비록 조정이 죄준 것은 아니나, 언로(言路)를 열어놓으려면 서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이 바야흐로 이 때문에 불안하니, 아직은 세초(歲抄)를 【6월과 12월에 양전(兩銓)에서 벌받은 모든 사람들을 기록해서 올리어 서용하기를 기다리는데, 이를 세초라 한다.】 기다리겠다."

하였다. 민진후가 또 아뢰기를,

"송주석(宋疇錫)은 문학(文學)과 아망(鴉望)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습니다. 죽을 때에 도신(道臣)이 상문(上聞)하지 않았기에 아직까지 치부(致賻)하는 은례(恩例)를 입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시행하도록 명했다. 박세채가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올린 차자(箚子) 및 부록한 글에 대해 아직 결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돌아가기를 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臣)이 계해년511) 에 청했던 바를 이제 또 청합니다마는, 성상께서 ‘시행하기 어려운 것은 할 수 없으나 할 수 있는 것은 시행하겠다.’는 분부가 계셨고, 대신은 ‘인심과 세도(世道)가 이러하여 졸급하게 시행하기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대저 졸급하게 개혁할 수 없음은 진실로 그 말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마는 오직 성상께서 재량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이어 입지(立志)하여 학문을 하고 치국(治國)을 하는 근본으로 삼기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하는 말마다 모두 옛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이처럼 반복해 놓았으니, 내가 마땅히 묘당(廟堂)과 의논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27권 63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58면
  •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역사-편사(編史) / 정론-정론(政論)

  • [註 510]
    명종(明宗) 임자년 : 1552 명종 7년.
  • [註 511]
    계해년 : 1683 숙종 9년.

○御晝講, 左議政朴世采同侍。 世采言: "日昨箚批, 與臣箚意不同, 故相臣李元翼日記有曰: ‘淸白吏改稱廉謹。’ 而李浚慶明廟壬子, 已以廉謹被選, 而其後宣廟朝, 又追選於淸白吏, 二說互異。 孝廟嘗因李厚源考史之行, 遂使竝考淸白吏, 然其後亦無記籍, 故吏曹所錄置者, 殊不詳盡。 今選廉謹, 當從元翼日記, 二品以上會議, 自廟堂定之之例。 而祖宗朝淸白吏, 則不可不考見《實錄》然後, 爲成案也。" 上竝可之, 命待來春, 曝曬《實錄》而考之。 世采又言: "孝廟有遠大之志, 欲用勳舊子孫, 命申汝哲業武, 汝哲典兵數十年, 別無過誤, 上官有命令, 而只令將官往告, 領相憂體統之不立, 不爲過矣。 但罷大將非細事, 物情以此不安, 宜敍用。" 上許之。 檢討官閔鎭厚曰: "任元耉言大臣事, 朝廷雖不罪之, 元耉違牌自罷, 宜加敍用。" 世采曰: "近者臺臣, 無言大臣事者, 而元耉言之, 臣故奬之。 然元耉論大臣心術太深, 大臣旣以此引退, 恐不可徑先敍用。" 侍讀官李健命曰: "諸葛亮曰: ‘勤攻吾之闕失。’ 大臣之道當如此。 元耉之罷, 雖非朝廷所以罪之者, 然欲開言路則不可不敍。" 上曰: "大臣方以此不安, 且待歲抄," 【六月十二月, 兩銓錄波罰諸人以進以待敍用曰歲抄。】 鎭厚又言: "宋疇錫有文學雅望, 不幸早死, 死時道臣不以上聞, 尙未蒙致賻恩例。" 上命施行。 世采曰: "臣前日所上之箚及附錄文字, 尙未了當, 故不敢告歸, 臣以癸亥所請者, 今又請之, 自上有難行者不可行, 可行者行之之敎, 大臣言: ‘人心世道如此, 有難遽行。’ 夫不可猝然變革, 誠有如言者, 惟在聖上裁之耳。 仍請立志爲爲學爲治之本。" 上曰: "言皆引古人之言, 反復如此, 予當與廟堂議之。"


  • 【태백산사고본】 29책 27권 63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58면
  •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역사-편사(編史)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