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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26권, 숙종 20년 4월 17일 갑신 1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영의정 남구만이 배명하니, 인견하고 위유하다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이 배명(拜命)하니, 임금이 명하여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諭)가 지극하였다. 남구만이 말하기를,

"신(臣)은 묘당(廟堂)에서 모여 의논하라는 분부에 대하여 지나치다고 생각하오며 정원(政院)에서 아뢴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희빈(禧嬪)이 곤위(壼位)에 오르려 할 때라면 신하가 된 자로서는 예경(禮經)으로 쟁집(爭執)하는 것이 옳겠으나, 대저 명호(名號)가 이미 정하여지고 곤극(坤極)에 정위(正位)하게 되어서는 신하가 된 자는 또한 이미 군모(君母)로 섬겼던 것인데, 이제 또 도로 낮추는 변절(變節)이 있게 되었으니, 신하의 마음에 있어서는 기사년122) 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하의 의리도 또한 어찌 죽음으로 쟁집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마는, 이제 중궁 전하께서 이미 복위(復位)하셨는데, 희빈의 강호(降號)에 대하여 다시 다툰다면, 이는 또 한 나라에 두 존위(尊位)가 있는 것이 될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 신하가 이미 복위를 경축하고 또 강호를 슬퍼하여 당황함을 형용할 수 없고 놀라와서 안정하지 못하고 또 감히 아뢸 바가 있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제 전하의 처분을 살피고 삼가는 도리에 흠결이 있는 것으로 여겨 도리어 신하들을 시켜 모여서 의논하게 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아들이 어머니를 의논하는 것이고 신하가 임금을 의논하는 것이 될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모여 의논하는 일은 중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경하여지고 마땅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잘못되는 것만을 볼 것이니 신하가 감히 할 수 없는 것일 뿐더러, 전하께서도 신하에게 하문하셔야 할 것이 아닌 듯합니다."

하고, 승지(承旨) 박태순(朴泰淳)이 말하기를,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므로, 신들은 묘당에서도 참여하여 듣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다시 의논할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데, 갑작스러울 즈음에 잘못하여 회의(會議) 두 자를 썼습니다. 신들이 곧 그 잘못을 깨닫고 본의를 드러내려 하였으나, 번거롭게 아뢰는 것이 두려워서 감히 다시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원에서 아뢴 것은 묘당에서 전교를 친히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 일을 신중히 하려 하였을 뿐이다. 대신의 말이 이러하니 모여 의논하는 것을 멈추라."

하였다. 남구만이 말하기를,

"이제 희빈의 강호는 중궁 전하께서 복위하심으로 말미암아 두 왕비가 있을 수 없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죄가 있어서 폐출(廢黜)된 것과 같지 않으니, 아마도 분수에 따라 스스로 안정할 것이고, 궁위(宮闈) 사이는 화목하여 화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원에서 아뢴 데에 ‘곤위(壼位)의 승출(陞黜)’이라 하였는데, 낮춘 것[降]을 내친 것[黜]이라 한 것은 그 사실에 크게 어그러집니다. 지극히 공경스럽고 지극히 엄한 곳에 이토록 부당하게 말을 썼으므로, 승지(承旨)들은 무겁게 책벌(責罰)을 가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으나, 갑자기 변절을 만나 당황할 즈음에 문자를 가리지 못한 것은 또한 매우 허물하기 어려우니,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고, 이어서 선온(宣醞)하고 파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한 나라에 두 존위(尊位)가 없다는 것은 고금의 통의(通誼)이다. 남구만은 정원에서 회의를 청한 것을 그르다 하고, 또 ‘중궁이 복위하였는데 희빈의 강호에 대하여 다시 쟁집하면 이는 한 나라에 두 존위가 있는 것이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두 존위가 없다는 의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복위를 경축하고 강호를 슬퍼한다. 오늘날 신하의 마음이 기사년과 무엇이 다르냐?’ 하고, 죽음으로 쟁집한다고까지 말하였으니, 그 두 존위가 없다는 의리가 어디 있는가? 두 존위가 없다는 것은 대개 신하가 군모(君母)에 대하여 이미 높이는 이가 있으면 다시 함께 높이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니, 다시 함께 높이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면 강호는 참으로 옳은 것인데, 또 어찌 슬플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기사년의 일은 존비(尊卑)가 지위를 바꾸고 윤리가 차서를 잃은 것이므로, 임금에게 있어서는 덕을 잃은 것이고 뭇 신하에게 있어서는 매우 통탄한 것이며, 중궁이 복위하고 장씨가 강호된 것은 임금에게 있어서는 성덕(盛德)이고 뭇 신하에게 있어서는 큰 경사이므로, 감히 견주어 논할 수 없을 것인데, 남구만이 바야흐로 또한 당황하고 놀라고 죽음으로 쟁집할 의리가 있다고 한 것은 거의 신하의 예(禮)가 없는 것이다. 아아, 남구만은 조정이 자주 변하고 당화(黨禍)가 이어져서 정권을 잡던 대신이 전후하여 죽은 것을 친히 보았는데, 경시(更始)하는 처음을 당하여 자신이 상상(上相)이 되어 나와서 국정(國政)을 맡았으니, 문득 두려워하여 스스로 꾀하기를, ‘뒷날 민암(閔黯)의 무리가 다시 득지(得志)하면 나도 다시 죽게 될 것인데, 어찌하여 면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느냐?’ 하고, 드디어 민암 등의 뜻을 잃지 않는 것을 근본 삼았으므로, 처음 입시(入侍)하여 그 말이 이러하였으니, 그것이 도리어 상리(常理)에 어그러지는 데로 돌아가는 것을 아주 깨닫지 못하였다. 이어서 또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상에서 신을 뒷날에 죽일 사람으로 지목합니다. 【아래에 보인다.】 임금의 덕을 위하여 권면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진심이 있는 곳은 끝내 스스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때문에 장희재(張希載)가 국모(國母)를 해치려 꾀한 죄에 대하여서도 힘을 다하여 감싸서, 공론을 막아 물리치고 뭇사람의 마음을 떨쳐 거슬려 흉역(兇逆)의 우두머리를 용서하여 천지 사이에서 편히 쉬게 하였으니, 아! 또한 통탄스럽다. 서문중(徐文重)이 상소하자는 의논에 앞장서고 윤지완(尹趾完)이 공봉(供奉)하자는 논의를 하여 【아래에 보인다.】 스스로 민암의 무리에게 아첨하였으나, 서문중은 거칠고 윤지완은 어리석어 모두 학식이 없으므로 본디 매우 책망할 것도 못된다. 오직 남구만은 늙었는데도 기지가 있으며 혼자 정승을 맡았으므로 심계(心計)를 다하여 화복(禍福)의 기미를 헤아리고 취사(取捨) 사이를 경영하되 상세함을 다하여 유책(遺策)이 없었는데, 윤지완·서문중의 무리가 서로 앞다투어 추중(推重)하여 그 세력을 움직이기 어려웠다. 임금의 뜻도 남구만이 말하는 것을 모두 따랐으므로, 마침내 당당한 성조(聖朝)에서 죄를 치고 법을 바루는 대의(大義)가 버려지고 막혀서 거행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죄를 이루 주벌(誅罰)할 수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28책 26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02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사급(賜給) / 사법-탄핵(彈劾)

○甲申/領議政南九萬拜命, 上命引見, 慰諭備至。 九萬曰: "臣於會議朝堂之敎, 竊以爲過。 政院之啓, 甚是失當。 禧嬪將陞壼位之時則爲臣子者, 以禮經爭執可也。 及夫號名已定, 正位坤極, 則爲臣子者, 亦旣事之以君母矣。 今又有還降之變節, 其在臣子之心, 與己巳何異? 臣子之義, 亦豈不以死爭之哉? 但今中宮殿下, 旣已復位, 而復爭禧嬪之降號, 則是又一國而有二尊矣。 此今日臣子所以旣以復位爲慶, 且以降號爲慼, 惝怳難狀, 驚愕靡定, 而亦不敢有所陳白者也。 今若以殿下處分, 爲有欠於審愼之道, 而反欲使諸臣會議, 則是子而議母, 臣而議君, 天下寧有是理哉? 今此會議之擧, 秪見其欲重而反輕, 欲當而反失, 非但臣子之所不敢爲, 亦恐非殿下之所當下詢於臣子者也。" 承旨朴泰淳曰: "玆事至重且大, 故臣等以爲, 廟堂不可不與聞, 非謂有可更議也。 而倉卒之際, 誤下會議二字, 臣等旋覺其爲失, 欲暴本意而煩瀆是懼, 不敢更有言耳。" 上曰: "政院之啓, 只以廟堂不得親承傳敎, 故欲重其事也。 大臣言如此, 其停會議。" 九萬曰: "今禧嬪降號, 乃因中宮殿下復位, 不可有二后而然耳。 其與有罪見黜者不同, 想必引分自安, 宮闈之間, 庶幾雍穆和平矣。 政院之啓有曰: ‘壼位陞黜。’ 以降爲黜, 大非其實, 至敬至嚴之地。 措語失當至此, 諸承旨不可不重加責罰, 而猝遇變節, 惝怳之際, 不擇文字, 亦難深咎, 請推考。" 上曰可, 仍命宣醞而罷。 謹按國無二尊, 古今通誼也, 九萬以政院之請會議爲非。 且曰: "中宮復位, 復爭禧嬪之降號, 則是一國有二尊, 此非不知無二尊之義者, 然尙曰: ‘以復位爲慶, 降號爲慼。’ 今日臣子之心, 與己巳何異? 至以以死爭之爲言, 惡在其無二尊之義也? 所謂無二尊者, 蓋以臣子於君母, 旣有所尊, 則不當復有竝其尊焉耳。 不當復竝其尊, 則降號誠爲是, 又安有慼之之理哉? 況己巳之事, 尊卑易位, 倫彝失序, 在上躬爲失德, 在群下爲至痛, 中宮復位, 張氏降號, 在上躬爲盛德, 在群下爲大慶, 宜不敢比而論之。 而九萬方且惝怳驚愕, 謂有以死爭之之義者, 殆無人臣禮也。 噫嘻! 九萬, 親見朝廷數變, 黨禍相仍, 秉政大臣, 前後就死, 而當更始之初, 身爲上相, 進任國政, 則輒瞿然自謀曰: ‘他日黨, 若復得志, 則吾其復及於死矣, 盍思所以免之?’ 遂以不失等意爲主, 故首初入侍, 其言如此, 殊不覺其爲反常悖理之歸。" 仍又白于上曰: "世皆目臣以他日誅戮之人。 【見于下。】 雖爲君德有所勉戒, 而肝肺所在, 終不得自隱耳。 是以, 於希載謀害國母之罪, 又極力護之, 觝排公議, 拂逆衆心, 假借兇逆之魁, 偃息覆載之間, 吁亦痛矣! 徐文重倡上章之議, 尹趾完爲供奉之論, 【見于下。】 以自媚於黨, 然文重麤粗, 趾完朴魯, 俱無學識, 本不足深責。 惟是九萬, 老而有機警, 獨當鼎軸, 費盡心計, 思量於禍福之幾, 經營仿趨避之間, 纖悉無遺策。 趾完 文重輩, 競相引重, 其勢難動。 上意亦一循九萬所言, 終使堂堂聖朝, 討罪正法之大義, 慶而不擧, 閼而不行, 其罪可勝誅哉?"


  • 【태백산사고본】 28책 26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02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사급(賜給)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