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민씨가 서궁의 경복당에 입어하는 과정
왕비(王妃) 민씨(閔氏)가 서궁(西宮)의 경복당(景福堂)에 입어(入御)하기 하루 전에 정원(政院)에서 말하기를,
"옛날 신하의 정례(情禮)로서는 문안하는 절차가 없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으므로, 이때에 상례(常例)대로 문안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해풍 부부인(海豊府夫人) 이씨(李氏)·은성 부부인(恩城府夫人) 송씨(宋氏)·풍창 부부인(豊昌府夫人) 조씨(趙氏)의 작호(爵號)를 회복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비(妃)에게 명하여 별궁(別宮)에 이처(移處)하게 하고, 이어서 액예(掖隷)를 보내어 본가(本家)에 알리고, 이어서 수찰(手札)을 내렸다. 이어진 백여 마디 말이 죄다 뉘우치는 뜻이고 생각하는 말이었는데, 거기에 대략,
"처음에 권간(權奸)에게 조롱당하여 잘못 처분하였으나, 곧 깨달아서 그 심사를 환히 알고 그 억울한 정상을 깊이 알았다. 그립고 답답한 마음이 세월이 갈수록 깊어져, 때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오듯이 눈물을 흘리니, 깨어서 그 일을 생각하면 하루가 다하도록 안정하지 못하거니와, 이때의 정경(情境)을 그대가 어찌 알겠는가? 시인(時人)이 임금을 속이고 공도(公道)를 저버리는 것을 보게 되니, 지난날 경신년116) 의 여당(餘黨)에 연결된 말이 참으로 나라를 위한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고, 조금도 사의(私意)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더욱 알았다. 옛 인연을 다시 이으려는 것은 자나깨나 잊지 않으나, 국가의 처사는 또한 용이하지 않으므로, 참고 머뭇거린 지 이제 6년이 되었는데, 어쩌면 다행히도 암적(黯賊)117) 이 진신(搢紳)을 도륙(屠戮)하려는 생각이 남김없이 드러났으므로, 비로소 뭇 흉악한 자를 내치고 구신(舊臣)을 거두어 쓰고, 이어서 별궁에 이처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이 뒤에 어찌 다시 만날 기약이 없겠는가?"
하였다. 비(妃)가 청사(廳事)에 나와 한 탁자를 설치하고 어찰(御札)을 받들어 그 위에 올려 놓고 꿇어앉아서 보고, 이어서 상답(上答)하기를,
"첩(妾)의 죄는 죽어도 남는 책망이 있는데 오히려 목숨을 보전한 것은 또한 성은(聖恩)에서 나왔습니다. 스스로 반성할 때마다 오히려 이 죄명을 지고도 곧 죽지 않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낯을 들고 사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오직 엄주(嚴誅)가 빨리 가하여져서 마음 편히 죽기를 기다릴 뿐인데, 천만 뜻밖에 옥찰(玉札)이 내려지고 이어진 사의(辭意)는 모두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므로, 받들어 보고 감격하여 눈물만 흘릴 뿐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사제(私第)에서 편히 사는 것도 이미 스스로 분수에 지나치거니와, 별궁에 이처하라는 명은 더욱이 천신(賤臣)이 받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천은(天恩)에 감축(感祝)하며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10일(정축)에 중사(中使)가 임금의 명으로 본제(本第)의 외문(外門)을 열려고 와서 열쇠를 청하니, 처음에 하교(下敎)하기를,
"이 문을 폐쇄한 것은 처음부터 임금의 명이 아니었으나, 여염집이 천로(淺露)하여 혹 외인(外人)의 출입이 있을세라 염려되므로 이렇게 봉쇄하였는데, 천로한 걱정은 오늘도 그러하니, 어찌 열 수 있겠는가? 명이 있더라도 감히 봉행할 수 없다."
하매, 중사가 두세 번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중사가 곧 달려가서 임금에게 아뢰고 한참 만에 또 와서 임금의 명을 전하기를,
"호위(扈衛)가 있을 것이니, 천로는 걱정할 것이 아니다."
하고, 이어서 임금이 반드시 문을 열기를 바라는 뜻을 알리니, 비(妃)가 여러 번 뜻을 어기는 것을 황공하게 여겨서 열쇠를 주었다. 중사가 문을 열고 마당을 보니, 풀이 빽빽히 덮여 인적(人迹)이 없으므로 절로 목이 메어 액예·군졸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수위군(守衛軍)이 문을 지키고 중사가 계청(啓請)하여 방민(坊民)을 징발하여 마당의 풀을 뽑아 없앴다. 명하여 경복당(景福堂)에 들어가 살게 할 때에 유사(有司)의 공상(供上)을 모두 법대로 봉진(封進)하니, 비가 사양하여 받지 않고 말하기를,
"이것은 미분(微分)이 받아야 할 것이 아니다. 공상이란 이름을 죄인이 어찌 감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또 상궁(尙宮) 【여관(女官)을 칭하는 것이다.】 두 사람과 시녀(侍女) 세 사람을 시켜 의대(衣襨)를 가지고 가게 하였는데, 비(妃)가 또 사양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그 중의 한 옷은 참람한 데에 가까우니, 더욱이 감히 입을 수 없다."
하였다. 상궁이 이 뜻을 임금에게 여쭈니, 또 수찰(手札)을 내려,
"어제 답찰(答札)을 보니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 없어, 기쁘고 위로되는 것이 후련하여 열 번이나 펴 보고 절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경복당에 들어가 살고 공상을 상례대로 하는 것은 내 회한(悔恨)이 그지없어 특별히 지극한 뜻을 나타내는 것이며, 조정의 공론도 다 이와 같으니, 행여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오늘 보낸 의대도 안심하고 입고서 옥교(玉轎)를 타고 들어가라. 내일 다시 서로 만날 것이므로 우선 말을 다하지 않겠으나, 내 뜻을 알아서 보낸 물건을 죄다 받고 또 몇 글자로 회답하기 바란다."
하였다. 비가 답서(答書)를 올려,
"하루 안에 공상하는 물건을 내리고 나서 또 상궁을 보내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옷을 내리셨으므로 황공하고 조심스러워 나갈 바를 모르는데, 옥찰(玉札)이 또 내려와 사지(辭旨)가 간절하시니, 천은(天恩)이 망극하여 땅에 엎드려 느껴 웁니다. 성교(聖敎)가 이렇게 돈면(敦勉)하신데도 감히 당돌하게 사양하면, 성의(聖意)를 어겨서 그 죄가 더욱 커지는 줄 본디 압니다마는, 옥교·의복의 의장 절목(儀章節目)을 생각하옵건대, 다 분수에 넘쳐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므로 끝내 받기 어려우니, 성상께서 실정을 굽어 살펴 모두 도로 거두시면, 죄를 지은 천신(賤臣)이 하늘과 같은 성덕(聖德)을 입어 조금이라도 사심(私心)을 편하게 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 수찰을 내려,
"수자(手字)를 잇달아 보고 덕용(德容)을 대한 듯하니, 어찌 기쁘고 후련함을 견디겠는가? 경고(更鼓)가 이미 깊었는데 이렇게 다시 번거롭히는구나. 반드시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이 길진(吉辰)에 좋게 들어와야 한다. 또 몇 글자로 회답하기 바란다."
하매, 비가 답서를 올려,
"오늘 안에 거듭 옥찰을 받으니, 황공하고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전교(傳敎)의 사의(辭意)가 두 번 세 번 간절하신데도 여러 번 성의(聖意)를 어기는 것은 그 죄를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이므로 천첩의 사정(私情)을 감히 아뢸 수는 없으나, 이번에 입은 은수(恩數)는 다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예(禮)이니, 황공하고 감격하여 나갈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날 임금이 상궁에게 하교하기를,
"어제 내린 의대를 입궁(入宮)할 때에 입지 않으면, 너희들에게 중죄가 있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비가 마지못하여 한 벌의 웃옷을 여느 때에 입는 명주 옷 위에 걸치고 오시(午時)에 옥교를 타고 의장을 갖추고서 요금문(耀金門)으로부터 서궁(西宮)의 경복당에 들어갔다. 도성(都城) 안에서는 위로 사대부(士大夫)부터 아래로 종들까지 남녀 노소가 길을 메우고 뒤질세라 염려하듯이 분주히 용관(聳觀)하여, 강교(江郊) 사이는 동리가 다 비었고, 시골에서 온 자도 있었다. 혹 기뻐서 뛰기도 하고 느껴서 울기도 하는데, 전도(前導)가 비키라고 외쳐도 막을 수 없었다. 관학(館學) 및 외방(外方)의 유생(儒生)과 파산(罷散) 중인 조신(朝臣)은 길가에서 지영(袛迎)하였다. 여염의 부녀자는 6년 동안 살던 곳을 보려고 일제히 본제(本第)에 가서 여럿이 떼 지어 두루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갔는데, 며칠 동안 그치지 않았다. 임금이 먼저 경복당에 이르러 기다리니, 옥교가 이르렀다. 임금이 옥교 앞에 서서 궁인(宮人)에게 명하여 발[廉]을 걷게 하니, 비가 옥교에서 나와 땅에 엎드려 사죄하려 하였는데, 임금이 붙들어 일으키고 이어서 앞서 가서 경복당에 들어가니, 의물(儀物)과 제구(諸具)가 다 상례와 같았다. 임금이 비에게 자리에 오르도록 청하니, 비가 자리를 피하여 죄를 빌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다 내가 경솔하였던 허물이니, 회한(悔恨)이 그지없으나, 또한 다시 어찌 미치겠는가? 내가 번번이 충언(忠言)을 살피지 못한 것을 지극히 회한하는데, 그대에게 어찌 빌 만한 죄가 있겠으며, 또한 어찌하여 반드시 이렇게 겸양하여야 하겠는가?"
하였다. 비가 또 스스로 인퇴(引退)하는 말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애매한 정상을 환히 알고 지난 뉘우침을 많이 말하였거니와, 오늘의 일은 일마다 합당하여 다 이치에 순한데, 어찌하여 이토록 스스로 인퇴하는가? 다시는 그런 말을 내지 말기 바란다."
하고, 두세 번 타일러 정녕하게 반복하였다. 이어서 세자에게 명하여 와서 뵈게 하였는데, 비가 일어나려 하니, 임금이 말리며 말하기를,
"앉아 있어야 마땅한데, 어찌하여 반드시 일어나야 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나서 조정의 문안 단자(問安單子) 【문안할 때에는 으레 단자를 쓴다.】 를 들였는데, 비가 죄를 지은 사람이 감히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감히 못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비가 드디어 일어나므로 임금이 그 까닭을 물었는데, 비가 대답하기를,
"조정의 문안은 결코 관례에 따라 받을 수 없으므로 말을 하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 말리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매, 비가 비로소 지도(知道)118) 【으레 내리는 말이다.】 라고 답하였다. 임금이 궁인(宮人)에게 명하여 성찬(盛饌)을 베풀게 하고, 임금이 비의 부모의 봉작(封爵)을 회복시키려고 돌아보고 비에게 말하기를,
"부원군(府院君)과 전후의 부부인(府夫人)의 봉작은 본디 기억하나, 지금 집에 있는 부부인의 작호는 어쩌다 기억하지 못하는데, 무엇이라 하는가?"
하였으나, 비가 대답하기를,
"늘 부르는 것이 아니므로, 신도 잊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참으로 모르겠는가?"
하고, 이어서 한참 중얼거린 뒤에 깨닫고 드디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니, 비가 또 사양하기를,
"첩의 죄가 지극히 중한데 6년 동안 징계가 없었으니, 결코 이 거조(擧措)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또 성상께서 동궁(東宮)의 정리(情理)를 생각하신다면, 또한 어찌 차마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저 나라에 주문(奏文)할 때에도 반드시 난처한 것이 많을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여 도로 거두시기를 다시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해 동안 사제(私第)에 어렵고 괴로움을 갖추 맛본 것이 다 내 허물이다. 이제 내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이렇게 하고서야 여러 해 동안 답답하고 슬펐던 마음을 펼 수 있다. 더구나, 온 나라 신민이 누구인들 기뻐하지 않겠는가? 뭇사람의 뜻이 같이하는 것이고 내 마음도 편할 것인데, 어찌 그대의 한 마디 말 때문에 국가의 큰 일을 지레 고치겠는가? 그대는 안심하여야 한다."
하니, 비가 청사에 나가 두세 번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 날 저녁에 궁인(宮人) 영숙(英淑)을 밖으로 내치고, 또 희빈(禧嬪)에게 명하여 별당(別堂)에 물러가 있게 하고, 이어서 비에게 함께 대내(大內)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비가 자리를 피하여 굳이 사양하며 엎드려서 일어나지 않았다. 임금이 먼저 가면서 상궁(尙宮)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중전(中殿)을 시위(侍衛)하여 침전(寢殿)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상궁에게 중죄가 있을 것이다."
하니, 궁인(宮人)이 좌우에서 시위하고 전후에서 부축하여 양심합(養心閤)에 침장(寢帳)을 마련하였다. 이튿날 정전(正殿)에 나아간 뒤에 임금이 비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경덕궁(慶德宮)에 이처(移處)하고 내가 몸소 가서 맞이하면, 바로 예(禮)에 맞고 경에게도 빛이 있을 것인데, 살펴 생각하지 못하여 큰일을 너무 갑작스레 처리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이때부터 비와 동궁의 자애와 효성은 양편이 극진하였으니, 참으로 종사(宗社)의 끝없는 복이다.
삼가 살피건대, 성인(聖人) 이하로는 허물이 없을 수 없으니, 그 허물을 능히 고치기만 한다면 허물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임금이 비를 폐출한 것은 참으로 큰 허물이니, 뉘우쳐서 고치지 않았다면, 나라가 장차 설 수 없어서 천리(天理)·인심(人心)이 끝내 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대개 우리 나라 규문(閨門)의 예(禮)는 한(漢)·당(唐) 이후의 것으로 견주어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존비(尊卑)·상하(上下)의 명의(名義)가 현격하므로, 한때 임금의 위엄으로 바꾼 것이 있더라도 인심이 억울한 것은 갈수록 심하여지니, 천리가 있는 바를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임금은 영예(英睿)하고 과단(果睿)하기가 견줄 데 없는데, 어찌 처음부터 그것이 잘못인줄 스스로 몰랐겠는가? 그러므로 박태보(朴泰輔) 등을 죽일 때에 문득 중궁(中宮)을 위하여 절의(節義)를 세운다고 꾸짖었으니, 대개 이미 그 소행을 의롭게 여겨서 그런 것인데, 곧 고치지 못한 것은 성색(盛色)이 마음을 현혹하여 안에서 마음을 가리고 간사한 참소가 종용하여 밖에서 마음을 빼앗았기 때문일 뿐이니, 이를테면 해의 청명(淸明)이 마침 구름·안개에 가렸던 것과 같다. 명지(明旨)가 내려진 것은 왕비를 복위시킨 날에 있었을지라도, 뉘우치는 마음이 일어난 것은 왕비를 폐출한 뒤에 이미 나타났으니, 아! 성대하다. 밝은 임금의 덕이 허물이 없는데로 나아간 것이 한(漢) 광무(光武)·송(宋) 인종(仁宗)·명(明) 선종(宣宗)의 짝이 아님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왕비가 정일(貞一)한 덕을 지키고 유가(柔嘉)의 법칙을 실천하며 환난(患難)에 처하고 궁액(窮厄)을 겪어도 옥도(玉度)에 끝내 흠이 없었으므로, 중곤(中壼)에 다시 임어(臨御)하여 한 나라의 어머니로서의 모범이 되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폐후(廢后)의 복위는 예전에 이런 예(禮)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이를 처리하는 방도에 실착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간신(奸臣)을 내치던 날에 곧 먼저 분부를 내려 장씨(張氏)를 폐하여 희빈(禧嬪)으로 삼고, 이어서 왕비를 옛 지위에 회복하여 별궁에서 공봉하도록 명하고 국구(國舅)의 작호를 내린 뒤에, 의문(儀文)119) 을 극진히 갖추어서 정전(正殿)에 맞이하여 돌아오게 하는 것이 예에 있어서는 마땅할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고 본제(本第)에서 서궁(西宮)으로 들어가 있다가 서궁에서 정전으로 들어갔고, 국구의 작호도 이미 도로 내렸으나, 아직도 복위의 명이 없었다. 그 사이에 상고하여 의거할 만한 의문이 없었으니, 임금이 추한(追恨)하는 것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26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00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인사-관리(管理)
- [註 116]경신년 : 1680 숙종 6년.
- [註 117]
○王妃閔氏, 入御西宮景福堂, 前一日, 政院言: "舊日臣子情禮, 不可無起居之節。" 上許之, 及是問安如例。 上命復驪陽府院君 閔維重、海豐府夫人 李氏、恩城府夫人 宋氏、豐昌府夫人 趙氏爵號。 初上命妃移處別宮, 仍遣掖隷, 使本家知之。 仍降手札縷縷百餘言, 盡是懺悔之意思想之辭, 而其略曰: "始者爲權奸所操弄, 誤爲處分, 而旋卽覺悟, 洞燭其心事, 深知其冤狀, 戀鬱之懷, 與歲俱深, 有時夢裏相見, 君手執我衣, 淚下如雨, 覺來懷事, 終日靡定。 此時情境, 君豈知之? 及見時人罔上背公, 益知向日結連庚申餘黨之說, 實出爲國之至誠, 而非有一分私意矣。 其欲更續舊緣者, 寤寐耿耿, 而國家處事, 亦可不容易。 故隱忍遲徊, 六年于玆, 何幸? 黯賊屠戮搢紳之計, 敗露無餘, 始乃屛黜群兇, 收用舊臣, 仍有別宮移處之擧, 此後豈無再逢之期乎? 妃出廳事, 設一卓, 擎奉御札, 奠于其上, 跪而見之。" 仍上答曰: "妾之罪, 死有餘責, 尙保性命, 亦出聖恩。 每自反省, 尙恨負此罪名而不卽滅死, 擧顔于人世之間耳。 惟待嚴誅遄加, 安意就盡而已, 千千萬萬意慮之外, 玉札特降, 縷縷辭意, 無非不敢當者, 奉閱感激, 只有涕淚, 更何言哉? 安居私第, 已自過分, 別宮移處之命, 尤非賤臣所可祗承者。 感祝天恩, 不知所達。" 丁丑中使, 以上命將啓本第外門, 來請鑰匙, 始下敎曰: "此門之閉, 初非上命。 但恐閭家淺露, 或有外人之出入, 故有此封鎖淺露之患, 今日亦然, 何可開乎? 雖有命, 不敢奉行。" 中使請之再三, 終不許。 中使卽馳去白上, 良久又至, 傳上命曰: "當有扈衛, 淺露非所患也。" 仍致上必欲開門之意。 妃以屢違旨, 爲惶恐, 乃與鑰匙。 中使開門, 見庭草蒙密, 未有人迹, 不覺嗚咽, 掖隷軍卒, 無不流涕, 於是守衛軍始守門。 中使啓請發坊民除庭草, 及命入處景福堂, 有司供上, 竝如法封進。 妃辭而不受曰: "此非微分所當得者, 供上之稱, 罪人何敢當也?" 上又使尙宮 【女官之稱。】 二人, 侍女三人, 持衣襨以至。 妃又辭之, 仍曰: "其中一衣, 近於僭, 尤不敢服。" 尙宮以此意稟于上, 上又降手札曰: "昨見答札, 無異面譚, 欣慰豁然, 十回展視, 自不禁涕下, 入處景福堂, 供上如例者, 是予悔恨無窮, 特表至情者也。 朝廷公論, 亦皆如此, 幸勿爲過讓, 今日所遺衣襨, 亦宜安心服之, 乘玉轎以入也。 明日當復相見, 姑不盡言, 但願知我情曲而盡受所送之物, 亦以數字回答也。" 妃上答書曰: "一日之內, 旣降供上之物, 又遣尙宮, 賜之以不敢當之服, 惶恐踧踖, 不知所出。 玉札又降, 辭旨懇惓, 天恩罔極, 伏地感泣, 聖敎之敦勉如此。 而又敢唐突辭讓, 則固知違忤聖意, 其罪尤大。 而伏念玉轎衣服, 儀章節目, 皆是過分不敢當者, 終難奉承, 倘聖上俯察實情, 一倂還收, 則負罪賤臣, 蒙被如天之聖德, 庶幾少安私心耳。" 上又降手札曰: "連見手字, 如對德容, 豈勝欣豁? 更鼓已深, 而如是更煩, 須勿過讓, 趁此吉辰, 好好入來, 幸又以數字回答, 是所望也。" 妃上答書曰: "今日之內, 重奉玉札, 但有惶恐踧踖而已。 傳敎辭意, 再三懇惓, 屢違聖意, 尤重其罪, 賤妾私情, 雖不敢復達, 而今玆所被恩數, 皆是不敢當之禮, 惶恐感激, 不知所出。" 是日, 上下敎于尙宮曰: "昨日所下衣襨, 入宮時不服, 則汝輩當有重罪。" 妃不得已以一襲上服, 加之於常服紬衣之上, 午時乘玉轎備儀仗, 從耀金門入西宮景福堂, 都城之內, 上自士大夫, 下至輿儓, 男女老幼, 塡咽道路, 奔走聳觀, 唯恐或後, 以至江郊之間, 里閭皆空, 又有自鄕至者, 或喜而躍, 或感而涕, 前導喝闢, 而猶不能禁。 館學及方外儒生, 與朝臣在罷散中者, 祗迎于道左。 閭巷婦女, 願見六年臨住之所, 齊到本第, 千百爲群, 周視流涕而去, 數日不止。 上先到景福堂以待之, 玉轎旣至, 上立於玉轎前, 命宮人搴簾。 妃出轎伏地, 將欲謝罪。 上扶而起之, 仍爲前行, 入景福堂。 儀物諸具, 皆如例。 上請妃上座, 妃避席謝罪, 上曰: "此皆我率易之過, 悔恨無窮, 亦復何及? 予每以莫察忠言爲至恨, 君豈有可謝之罪, 亦何必謙讓如是乎?" 妃又陳自引之辭。 上曰: "予旣洞燭瞹眛之狀, 深陳旣往之悔, 今日之擧, 事事合當, 皆順於理, 何自引之至此? 願毋復出此言。" 開諭再三, 丁寧反復, 仍命世子來謁。 妃欲起, 上止之曰: "坐爲宜, 何必起乎?" 已而, 入朝廷問安單子, 【問安之時, 例用單子。】 妃辭以負罪之人不敢受。 上曰: "有可不敢?" 妃遂起, 上問其故, 妃對曰: "朝廷問安, 決不可循例受之, 欲有措辭矣。" 上又止之曰: "何至若是乎?" 妃始以知道 【例下之辭。】 答之。 上命宮人設盛饌。 上將追復妃父母封爵, 顧謂妃曰: "府院君及前後府夫人封爵, 固所記之。 而在堂府夫人爵號, 適不能記, 其謂何?" 妃對曰: "非常時所稱, 故臣亦忘之。" 上曰: "豈眞不知?" 仍沈吟良久而後覺之, 遂下備忘記。 妃又辭曰: "妾罪至重, 六年之間, 未有懲艾, 決不宜有此擧措。 且聖上若念東宮情理, 則亦何忍爲此耶? 彼國奏文之際, 必多有難處者, 更願三思而還收。" 上曰: "累年私第, 備嘗艱苦, 皆予之過。 今予意已定, 如此然後, 方可抒積年愍惻之心, 況一國臣民, 孰不懽忭? 群情所同。 予心亦安, 豈可以君之一言, 徑改國家大事乎? 君宜安心。" 妃出廳事, 再三辭讓, 上終不從。 是夕, 斥出宮人英淑等于外, 又命禧嬪, 退處別堂, 仍請妃偕還大內。 妃避席固辭, 伏而不起。 上先行, 下敎于尙宮曰: "若不能侍衛中殿, 還于寢殿, 則尙宮當有重罪。 宮人左右侍衛, 前扶後擁, 設寢帳于養心閤。" 明日遂御正殿。 後上語妃曰: "若使卿, 移處于慶德宮, 予躬往迎之, 則政合於禮, 於卿亦有光, 而不能審思, 處大事太遽, 是可恨也。 自此妃與東宮, 慈孝兩盡, 實宗社無疆之福也。 謹按自聖人以下, 不能無過, 惟其過而能改, 與無過同焉耳。 上之廢妃, 誠爲大過, 苟不悔而改之, 則國將無以立, 而天理人心, 終無以順之矣。 蓋我國閨門之禮, 非漢ㆍ唐以後所可比論, 尊卑上下, 名義迥絶, 雖以一時人主之威, 有所變易, 而人心抑鬱, 愈久愈甚, 則天理所在, 斯可見也。 上英睿果斷, 無與爲比, 初豈不自知其過哉? 是以當其殺朴泰輔等也, 輒責爲中宮立節, 則蓋已義其所爲而然。 不卽改之者, 只爲盛色蠱心, 內有以蔽之, 奸讒慫慂, 外有以奪之, 譬如天日之淸明, 時爲雲霧所翳耳。 明旨之頒, 雖在復妃之日, 悔心之發, 已著於廢妃之後。 嗚呼盛哉! 此可以知明主之德, 底於無過。 非漢 光武 宋 仁宗皇明 宣宗之儔匹也。 妃秉貞一之德, 履柔嘉之則, 處患難閱窮厄, 而玉度終無玷, 再御中壼, 母儀一國, 豈不休哉? 廢后復位, 古無是禮。 故自上所以處此者, 未免有失。 若於黜退奸臣之日, 卽先下旨, 廢張氏爲禧嬪, 仍命復妃舊位, 奉于別宮, 賜國舅爵號然後, 盡備儀文, 迎還正殿, 於禮則宜, 今乃不然。 自本第入處西宮, 自西宮入處正殿, 國舅爵號, 亦已還賜, 而尙未有復位之命, 其間儀文, 無所考據, 則宜上有所追恨也。
- 【태백산사고본】 28책 26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00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인사-관리(管理)
- [註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