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23권, 숙종 17년 윤7월 13일 병인 1번째기사
1691년 청 강희(康熙) 30년
양진창을 주치와 금천으로 옮겨 세우게 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오시복(吳始復)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기유년119) 에 충주(忠州) 가흥(可興)에 의창(義倉)120) 을 설치하였는데, 계해년121) 에 충주를 독진(獨鎭)으로 삼으려고 그 창고를 주치(州治)에서 6, 7리 떨어져 있는 양진(揚津)으로 옮겨서 이름하여 양진창(揚津倉)이라 하였습니다. 단지 그 땅이 낮고 축축하여 곡식을 저장하기에 적합하지 못하고, 창고 근처의 모집한 백성도 흩어졌으므로, 이제 목사(牧使) 이국헌(李國憲)이 그 창고를 주치와 금천(金遷)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대신(大臣)들에게 물어서 허락하여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대신들도 온편하다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민종도(閔宗道)가 말하기를,
"강도(江都)에 새로 만든 창고는 그 제도가 매우 좋아서 곡기(穀氣)가 소통하여 여러 해 동안 견딜 수 있는데, 대개 유수(留守) 신후재(申厚載)가 연경(燕京)에 갔을 때에 통주(通州)의 창고 제도를 보고 본떠서 만들었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제도에 따라 옮겨 세우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23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249면
- 【분류】재정-창고(倉庫) / 구휼(救恤) / 외교-야(野)
- [註 119] 기유년 : 1669 현종 10년.[註 120] 의창(義倉) : 흉년(凶年)에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평년에 백성들로부터 곡류(穀類)의 여분(餘分)을 거두어들여 보관하던 창고. 춘궁기(春窮期)에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철에 다시 거두어 들였음.[註 121] 계해년 : 1683 숙종 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