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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20권, 숙종 15년 4월 26일 임진 2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영의정 권대운과 좌의정 목내선이 정청을 정지하다

영의정 권대운(權大運)과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이 정청(庭請)을 정지하였고, 대사헌 목창명(睦昌明)과 대사간 유명현(柳命賢) 등이 복합(伏閤)을 정지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후비(后妃)를 폐치(廢置)하는 것은 국가의 큰 변고이고, 정청과 복합은 조정의 대대적인 거사이다. 국가의 큰 변고를 당하여 조정의 대대적인 거사를 함에 있어 이틀 사이에 시작했다가는 곧 그침으로써 마침내 국모(國母)를 폐출(廢黜)되게 하였고, 끝내는 군부(君父)의 잘못된 거조(擧措)를 완성시켜 주었다. 그러니 지위가 백료(百僚)의 우두머리요, 벼슬이 양사(兩司)의 장관인 자들이 어떻게 그 죄를 피할 수가 있겠는가? 삼가 상고하건대 역대(歷代)의 제왕(帝王)이 후비를 폐출시킨 것은 언제나 후궁(後宮)의 총애(寵愛)와 참소(讒訴)하고 이간하는 말에서 연유했기 때문에 군신(君臣)들이 반드시 극력 간쟁(諫爭)하였던 것이다. 임금의 신하요 국모의 아들인 입장에서는 그 의(義)에 있어 당연히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다. 질운(郅惲)272) 은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임금의 마음을 헤아렸고, 여이간(呂吏簡)은 군부(君父)의 뜻을 따라 국모(國母)를 폐출하였지만, 후궁(後宮)을 인연(因緣)하여 참간(讒間)을 행한 것이 민암(閔黯)·민종도(閔宗道)·이의징(李義徵) 등과 같은 짓을 한 경우는 없다. 민암·민종도·이의징 등이 음모(陰謀)와 비계(秘計)로 이륜(彛倫)을 무너뜨린 죄는 진실로 주벌(誅罰)을 가할 가치조차 없다. 권대운(權大運) 이하 조정에 가득한 군소배(群小輩)가 모두 민암(閔黯) 등과 모의(謀議)를 관통(關通)했다고 기필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모두 장희재(張希載)의 권세에 의지하여 부귀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니 중궁(中宮)이 사제(私第)로 손위(遜位)하는 것이 바로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므로 빨리 하지 못할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아! 이런데 그들에게 극언(極言)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간쟁하라는 의(義)를 책임지울 수가 있겠는가? 이렇기 때문에 임금이 처음 이 일을 언급하였을 적에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삼사(三司)에 이르기까지 전혀 경동(警動)하거나 애통 박절해 하는 뜻은 없이 그저 ‘화평(和平)하게 진정시켜 지당(至當)하게 되도록 힘써야 한다.’는 내용으로 건성건성 말하며 억지로 책임만 메운 것이 마치 글을 지을 적에 자수(字數)만 채우듯이 하였다. 나아가 정청(庭請)하고 복합(伏閤)하여 간쟁한 것도 남의 눈을 의식해서 한 것이니, 누구를 속일 수 있겠는가? 성상(聖上)은 총명이 전고(前古)에 없이 뛰어나고 또 영단(英斷)이 있는데, 단지 한때의 사적인 총애에 빠져 위호(位號)를 폐치(廢置)할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빨리 결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군소배들을 진용(進用)하고 또 수개월이 지났어도 오히려 하고 싶은 것을 차마 갑자기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권대운(權大運) 등이 사사로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東方)은 중국과 달라서 열성(列聖)들께서 비필(妃匹)을 중히 여겨 반드시 명문 귀족(名門貴族) 가운데서 대대로 부덕(婦德)이 출중한 사람을 선발해 왔다. 임금이 어렵게 여기고 있는 것은 희빈(禧嬪)의 출신이 미천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였다. 이에 권대운 등이 장현(張炫)에게 상을 내릴 것을 청하면서 대신의 은례(恩例)에 따르게 하였고, 또 장희재(張希載)를 무신(武臣)의 극선(極選)인 무고(武庫)273)태복(太僕)274) 의 자리에 올려 놓았으며, 이에 계속 제수(除授)하여 순월(旬月) 사이에 마구 뛰어 올랐다. 아, 정사(政事)275) 에 주의(注擬)가 있음으로부터 어찌 후궁(後宮)의 형이요 여항(閭巷)의 미천한 자가 이 직임에 제수된 적이 있었겠는가? 그들 마음의 소재를 환히 알 수 있으며, 조사기(趙嗣基)의 반목설(反目說)과 민암(閔黯)이 사중가(四重歌)로 선비들을 시험보인 것으로도 그 의지(意旨)를 알 수 있다. 임금의 마음이 이 때문에 더욱 공고하여져 비로소 처분(處分)을 내리게 되었으니, 이는 권대운(權大運) 등이 능히 간쟁하지 못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실은 은밀히 독촉한 것이다. 이런데도 오히려 ‘임금이 하려고 한 것이니 제신(諸臣)의 죄가 아니다.’ 하니, 어찌 애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민암(閔黯) 등이 스스로 어머니로 섬기는 의(義)를 끊고 나서는 교문(敎文)을 반포할 적에 흉패스런 말을 마구 하였는데 목내선(睦來善)의 경우에는 ‘불공 불경(不恭不敬)이라.’ 하고, 이현일(李玄逸)의 경우는 ‘곤이(壼彛)가 불순(不順)하였다.’ 하는 등 헐뜯는 말에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리하여 드디어 3백 년 동안 이어 온 예의(禮義)의 나라가 민암(閔黯) 등 제적(諸賊)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22책 20권 6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181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 [註 272]
    질운(郅惲) :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황태자(皇太子)에게 한시(漢詩)를 가르쳤는데, 곽 황후(郭皇后)를 폐하게 되자 "부부 사이가 좋아도 부자 사이가 좋기는 어려운데 더구나 신이 임금에 대해서이겠습니까?…모쪼록 천하가 사직(社稷)을 비난하게 하지 마소서." 하니, 황제가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위의 마음을 헤아렸다.…" 하였음.
  • [註 273]
    무고(武庫) : 군기시(軍器寺)의 별칭.
  • [註 274]
    태복(太僕) : 사복시(司僕寺)의 별칭.
  • [註 275]
    정사(政事) : 인사 행정.

○領議政權大運、左議政睦來善, 停庭請。 大司憲睦昌明、大司諫柳命賢等, 停伏閤。

【史臣曰: "廢置后妃, 國家之大變也。 庭請伏閤, 朝廷之大擧也。 處國家之大變, 行朝廷之大擧, 而二日之間, 纔發旋停, 終使國母見廢, 而遂成君父之過擧, 惟彼位在百僚之首, 而官爲兩司之長者, 又何以逃其罪哉? 謹按歷代帝王之廢后妃, 常由於後宮之寵, 讒間之說, 故群臣必力爭之, 君臣母子, 其義固當如此。 郅惲恕己量主, 呂夷簡順父黜母, 而亦未有因緣後宮, 親行讒間, 如宗道義徵等所爲者也。 宗道義徵等, 陰謀秘計, 斁滅倫彝之罪, 固不足誅, 而權大運以下, 群小滿朝, 雖未必盡與等關通謀議, 而若其中心之所冀望, 皆在於藉希載之勢, 以饕富貴耳。 然則中宮之遜于私第, 政所以副其願, 而惟恐其不亟矣。 噫嘻! 其可責之以極言竭論, 以死爭之之義乎? 是故當上旨之始及此事, 上自大臣, 下至三司, 全無驚動痛迫之意, 秪曰: ‘和平鎭定, 務歸至當。’ 草草爲說, 黽勉塞責, 有若應文備數者然, 造庭之請, 伏閤之諫, 亦欲以自說於人耳。 其誰欺乎? 其誰欺乎? 上聰明冠古, 且有英斷, 而特以一時寵暱之私, 遂有位號廢置之計, 然自知其不可也。 故徘徊躊躇, 不能早決, 進用群小, 亦且數月矣, 猶不忍遽爲其所欲爲者, 則大運等私謂我東異於中國, 列聖重妃匹之際, 名門貴族, 世膺德選, 上所以難之者, 其在於所出之微乎? 於是大運等, 又請賞張炫, 從大臣恩例, 又置希載於武臣極選, 武庫太僕, 除拜相續, 騰踏於旬月之間, 噫! 自有政注, 豈嘗見後宮之兄, 閭巷之賤, 得爲此任者乎? 其心所在, 灼然可知, 而趙嗣基反目之說, 閔黯四重歌之試士, 其旨意可見。 上意由此益固, 始有處分, 則大運等, 非惟不能爭, 實有以陰趣之也。 如是而尙曰: ‘上意欲之, 非諸臣之罪也。’ 豈不痛哉? 豈不痛哉? 等旣自絶母事之義, 頒敎之文, 極肆兇悖, 以至睦來善則曰: ‘不恭不敬。’ 李玄逸則曰: ‘弗順壼彝。’ 誣詆之說, 有不忍聞, 遂使三百年禮義之邦, 爲閔黯諸賊所壞了, 尙復何言哉?"】


  • 【태백산사고본】 22책 20권 6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181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