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주석의 복명서를 의논·박순의 충성에 시호를 하사하기를 대신들이 청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변사(備邊司)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박순(朴淳)에 대한 일은 지금 검열(檢閱) 송주석(宋疇錫)의 복명서(復命書)를 보니, 녹공(錄功)에 관한 일은 비록 나타난 데가 없으나, 그가 왕명을 받들고 함흥(咸興)에 가서 죽은 것은 매우 명백합니다. 시장(諡狀)에는 그의 관직을 상호군(上護軍)이라 쓰였고, 실록(實錄)에는 대장군(大將軍)이라고 쓰였습니다. 또 그의 후손이 간직하고 있는 책을 보니, 성종조(成宗朝)의 명신 채수(蔡壽)가 박순의 아들 박흔(朴昕)의 묘비문(墓碑文)을 지었는데, 그 중에 박순의 사적을 쓰기를, ‘태종조(太宗朝)에 태조(太祖)께서 함경도(咸鏡道)에 계실 때 박순이 운검(雲劍)288) 으로 입시(入侍)하여 자청해서 함경도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였다. 태종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공신에 기록하여 증직(贈職)하고 아울러 전토와 노비를 하사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록 사사로 간직한 문자이기는 하나 증거로 삼기에 충분하고 실록(實錄)에 기재된 것도 이와 같으니, 시호(諡號)를 하사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검열 송주석의 복명서 가운데 한 조목은 바로 광해조(光海朝)의 일기(日記)를 초본(草本)으로 보관해 둔 일이 미안하다는 것입니다. 노산조(魯山朝)289) 와 연산조(燕山朝)의 일기는 인쇄해서 보관해 두었는데, 이것만은 중초(中草)290) 로 두었으니, 그것은 사실상 암초(暗草)291) 와 같은 것이라 합니다. 인조조(仁祖朝) 때 수정할 적에 물자와 인력이 부족해서 두 벌만 써서 적상산(赤裳山)과 강화(江華)의 사고(史庫)에 보관하였고, 태백산(太白山)에는 중초(中草)로 보관하였습니다. 일기와 실록이 비록 경중의 차별은 있지마는 후세에 전하는 데는 다름이 없습니다. 예전부터 모두 똑같이 인쇄한 데에는 반드시 그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모두 인쇄해서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오나 지금 이렇듯 흉년이 들어서 형편이 매우 어려우니, 우선 보류해 두었다가 명년의 농사를 보아서 품의(稟議)하여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우의정 이단하(李端夏)가 말하기를,
"그 당시는 조석으로 변란(變亂)에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다만 정초(正草) 2벌 중 초 1벌을 세 곳의 사고에 나누어서 간직하였을 뿐이고, 두루 여러 곳에 보관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또 중초를 그대로 보관한 것도 세초(洗草)292) 하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혹은 정본(正本)에 첨가해서 기록하거나 혹은 인쇄하도록 하는 한편, 그 밖에 꼭 해야 할 일은 명년에 가서 다시 아뢰어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단하가 또 명경과(明經科) 시험에 구두(口讀)의 폐단을 말하고, 이어서 오로지 글뜻을 숭상할 것과 《대전(大典)》에 강서(講書)하는 조항의 뜻을 거듭 밝힐 것을 되풀이하여 아뢰었다. 임금이 그 의견에 따라 해조로 하여금 신칙(申飭)하게 하였다. 의성 현령(義城縣令) 윤성교(尹誠敎)가 부임한 지 두어 달이 채 못되어서 그 향리(鄕吏)를 파면시켰는데 〈아전은〉 억울함을 호소하여 격쟁(擊錚)293)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승지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그 원[倅]이 그대로 있는데 격쟁하는 것은 일찍이 전례가 없는 일이고 또 앞으로의 폐단에도 관계되는 일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형조에 명하여 각별히 엄벌하여 정죄(定罪)하도록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 절후가 중동(仲冬)에 이르도록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기설제(祈雪祭)를 지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정원일기(政院日記)》는 얼마나 중대한 문서인데 근래에 주서(注書)가 간혹 남을 시켜 대신 쓰기도 하고, 심지어 하인(下人)을 시켜 대서해서 드린다고 하니, 더욱 한심한 일입니다. 대서한 사람을 낱낱이 조사해 내기는 어렵지마는 하인을 시켜 대서한 사람은 마땅히 별도로 논죄(論罪)해야만 할 것이고, 앞으로는 주서의 일기(日記)를 승지가 각별히 검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매우 한심한 일이다. 대서한 사람을 승정원에서 조사해 내어 처벌하고, 앞으로는 특별히 엄중하게 단속하라."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 또 연석(筵席)에서 주고받은 말이 새어나가 항간에 전파되는 잘못을 강력하게 말하기를,
"옛날 사람은 온실전(溫室殿)과 성중(省中)에 있는 나무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니294) , 그 말을 조심하는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더 엄중하게 단속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80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편사(編史)
- [註 288]운검(雲劍) : 별운검(別雲劍)을 가리킴.
- [註 289]
노산조(魯山朝) : 단종조(端宗朝).- [註 290]
중초(中草) : 실록을 편찬할 때 초초(初草)를 정리한 것.- [註 291]
암초(暗草) :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초고(草稿).- [註 292]
세초(洗草) : 실록을 편찬한 뒤 사초(史草)를 없애버림.- [註 293]
격쟁(擊錚) : 임금의 거둥시에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억울함을 호소함.- [註 294]
온실전(溫室殿)과 성중(省中)에 있는 나무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니 :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박사(博士)였던 공광(孔光)은 어떤 사람이 온실전과 성중(省中:궁중)에 심어진 것이 모두 무슨 나무냐고 물었으나 공광은 침묵을 지키고 답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조정의 일을 함부로 남에게 누설하지 않는다는 말.○引見大臣備局諸臣, 領議政金壽恒曰: "朴淳事, 今見檢閱宋疇錫書啓, 則錄功之事, 雖無現出處, 而其承命死於咸興則明甚矣, 諡狀則其官職, 以上護軍書之, 實錄則書以大將軍, 且得見其後孫所藏印本, 則成宗朝名臣蔡壽, 著淳子昕墓文, 而亦載淳事蹟, 有曰: ‘太宗朝, 太祖在咸吉道, 淳以雲劍入侍, 自請入歸, 不得還。 太宗悼其死, 錄功贈職, 兼賜田民。’ 此雖私藏文字, 足可徵信, 實錄所載又如此, 仍令賜諡宜矣。" 上曰可。 又曰: "檢閱宋疇錫書啓中一款, 卽《光海朝日記》, 以草本藏置未安事也。 魯山 《燕山朝日記》則印出藏置, 此則以中草藏之, 而實同暗草云, 仁祖朝修正時, 物力不逮, 只書二本, 藏於赤裳ㆍ江華, 而太白山則藏以中草矣。 《日記》 《實錄》, 雖有輕重之別, 而其爲傳後則無異, 自前一體印出, 必有其意, 今宜一倂印出以藏, 而凶荒如此, 勢難爲之, 姑觀明年年事, 稟處宜矣。" 右議政李端夏曰: "其時朝夕待變, 故只以正書二件中草一件, 分藏於三處, 隱不能遍藏於諸處, 且以中草仍藏, 亦非洗草之意, 或加書正本, 或令印出, 有所不容已者, 待明年更稟可矣。" 上曰: "依爲之。" 端夏又陳: "明經科口讀之弊, 仍以專尙文義, 申明大典講書條之意, 反復陳達。" 上從之, 令該曺申飭。 義城縣令尹誠敎, 赴任未數月, 坐罷其鄕吏, 以願借至於擊錚, 承旨徐宗泰以爲, 其倅仍任而擊錚, 曾所未有, 且關後弊, 陳達。 上令刑曺, 各別嚴刑定罪。 壽恒以節屆仲冬, 點雪不下, 請行祈雪祭。 上從之。 壽恒又曰: "《政院日記》, 何等重大, 而近來注書, 或使人代寫, 甚至使下人代書以納云, 尤極寒心, 代書者, 雖難一一査出, 而下人代書者, 固宜別樣論罪, 今後則《注書日記》, 承旨另加檢察似當矣。" 上曰: "事極寒心, 代書之人, 政院査出論罪, 今後別爲嚴飭。" 壽恒又極言: "筵說傳播之非, 以爲古人不言溫室省中木, 可見其謹愼之意, 請更加嚴飭。" 亦從之。
-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80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편사(編史)
- [註 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