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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윤4월 29일 임오 1번째기사 1686년 청 강희(康熙) 25년

진주사 정재숭 등이 임의로 정문을 올린 사건에 대해 의논하다

명하여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을 불러 인견하고 진주사(陳奏使) 정재숭(鄭載嵩) 등의 장계(狀啓)의 별단(別單)을 보이며 말하기를,

"극히 패만한 말투의 그 꾸지람은 실로 병자년149) 이후로 아직 없었던 모욕이다."

하였다. 이는 사신 정재숭 등이 벌금을 내라는 모욕을 듣고 나서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하자, 예부의 제본(題本)에 국왕에게 아뢰지도 않고 함부로 먼저 정문부터 올렸다고 죄를 씌워 입주(入奏)하였는데, 호황(胡皇)의 노여움이 채 가시지 않아서 예부시랑(禮部侍郞) 오합(敖哈)이 그 황제에게 고하기를, ‘조선 사신은 죄를 지었으니 반상(頒賞)은 하지 아니하더라도 그 나머지의 정관(正官) 등에게는 선례대로 접대함이 마땅할 듯하다.’고 하니, 호황이 크게 노하여 그를 끌어 내려 꾸짖고는 직위를 혁파하여 내쫓아 보냈다는 것이다. 예부에서 다시 그 정문 속의 말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서경(書經)》에 ‘과오를 용서함에는 큰 것도 꺼리지 말라[宥過無大]’고 하였다. 그러나 또 ‘고의범을 처벌함에는 작은 것도 가리지 말라[刑故無小]’고도 하였다. 금령을 여러 차례 범하고도 고칠 줄 모르는가 하면, 우리 백성을 해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과오인가, 아니면 고의인가? 고의가 아닌 것을 가엾이 여겨 우선 가벼운 징계의 뜻만 보였는데도, 제가 이내 큰 과오로 자처하는 말을 쓰지 않고 함부로 군부(君父)에게 관용을 요구하니, 그 광패(狂悖)함의 첫째이다."

《춘추(春秋)》에서는 그 정상(情狀)을 캐어 죄를 정하므로, ‘위후 훼(燬)가 형(邢)을 멸하다[衛侯燬滅邢]’라고 하였는데, 호안국(胡安國)《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에서 글은 그 경(經)을 해석한 것이지만 특별히 위후의 죄를 무겁게 다루었으니, 이는 그 정상으로 보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춘추》에도 정상의 경중을 캐어 가차(假借)함이 없거니와, 황상(皇上)께서 변방 백성을 특별히 돌보는 것은 당신네 나라에서도 잘 아는 바이다. 그런데도 함부로 해치고도 일찍이 기탄함이 없는가 하면 도리어 선유(先儒)의 말을 잘못 끌어대기나 하고, 《춘추》의 주폄(誅貶)하는 의리를 모르고 있으니, 그 광패함이 둘째이다.

인장(印章)을 새기고 녹이는 것은 바로 초한(楚漢)이 한창 다투고 있어 군신(君臣)이 정하여지지 않았던 당시의 계책이다. 어찌 명령만 내리면 그대로 행해지고 상벌을 확실히 하고 있는 큰 정치에 이러한 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 광패함이 세째이다.

《주역(周易)》 환(渙)괘에 ‘그 큰 호령(號令)은 땀이 온 몸에 흐르듯 발한다.’고 하였는데, 호령이 땀과 같다 함은 땀이란 한번 나오면 다시 거두어 들일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유향(劉向)150) 이 그 임금에게 규간(規諫)한 것은 바로 이른바 출령(出令)하는 것을 때를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이를 반(反)하면 마치 땀을 다시 들어가게 하는 것같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서, 이는 임금으로서 크게 경계할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속히 다시 거두어 들이라고 하니, 이것이 그 광패함의 네째이다.

《서경(書經)》이윤(伊尹)이 말한 ‘필부(匹夫)가 〈임금에게〉 스스로 다함을 얻지 못한다[匹夫不獲自盡]’는 것을 인용하여 경망하게 성왕(聖王)을 위하여 부끄럽게 여긴다고 표현하였는데, 이것도 신자로서 잘못을 들어 사죄할 때 할 말이 아니다. 이것이 그 광패함의 다섯째이다.

대저 저 나라가 작기는 하다지만, 임금과 신하의 분의야 어찌 유독 없겠는가? 과연 억울한 일이 있게 하였다면 그 국왕이 응당 글을 올려 스스로 해명하고 애걸하며 청원할 일인데, 하찮은 비천(卑賤)한 무리가 어찌 그 임금에게 고하지도 않고 경솔하게 붓끝을 희롱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다 그 나라가 임금은 약하고 신하가 강한 데 연유함이니, 우리 조정의 보호가 없었던들 몇 번이나 찬절(簒竊)을 치렀을지도 모를 일이거니와 그 귀신의 면모와 도깨비의 수단이 저 나라에 있어서는 이미 익숙한 횡역(橫逆)을 하여 죽음을 피할 수 없는데도, 문득 빛나는 하늘 밝은 태양 아래에 스스로 드러내고 있으니, 우리 황상은 온 천하를 한 집안으로 삼고 대륜(大倫)을 펴고 대의(大義)를 행하고 있으므로, 외복(外服)이라 해도 이처럼 임금을 무시하는 신하는 용납하지 않으시리라. 법이 유사(有司)에게 있는 만큼 반드시 죄주고 용서함이 없으리니, 이에 정재숭 등을 엄중히 잡아 그 국왕에게 보내어 무겁게 치죄(治罪)토록 하는 바이며, 아울러 이 정절(情節)을 일일이 그 국왕에게 전해 주어 다 알도록 하는 바이다."

하였고, 이 밖의 사연 속의 말도 국가를 모욕하는 패만한 말들이 그지없이 차마 볼 수 없었다. 김수흥 등이 다 보고 나서 아뢰기를,

"저 나라가 강하기는 해도 우리 나라를 경시한 적은 없었는데, 중국으로 들어가고는 점점 교만해지다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멋대로 욕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장래의 걱정이 말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인년151) 간에 칙행(勅行)이 줄을 이으며 사기(事機)가 위급하였지만 오늘과 같은 모욕은 있지 않았다. 수모가 이에 이르렀으니, 장래의 걱정도 참으로 경들의 말과 같겠다. 예부의 관원이 주선을 하려다가 직위를 혁파하고 몰아 내쫓기까지 하였으니, 그 뜻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하였다. 김수흥 등이 아뢰기를,

"정문을 물리친 것은 혹 그러할 수도 있지만 문자를 지적해 내어 조목조목 논죄(論罪)한 것은 실로 뜻밖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의 노여움이 이와 같으니, 사은사(謝恩使)를 기한에 앞당겨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김수흥 등이 아뢰기를,

"사신을 의죄(議罪)한 건은 지연시킬 수 없습니다. 사은사의 노정(路程)에 속도를 갑절로 늘려서 빨리 들어가게 하여, 놀라와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5월 안으로 들어가게 하겠으나, 대신이 나라를 위하여 정문을 올렸다가 도리어 전에 없던 모욕을 당한 것이 마음에 매우 아픈데, 또 게다가 죄까지 준다는 것은 내가 실로 차마 못하겠다."

하였다. 김수흥 등이 아뢰기를,

"성교(聖敎)가 이와 같으시니, 그 누가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형세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선조(先祖)의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도 저 나라에 잘못 보임으로 해서 직위가 혁파되고 폐치(廢置)를 당하였는데 이번의 감죄(勘罪)에서도 직위 혁파를 당하고 전에 없던 모욕이 성상에게까지 미쳤으니, 대신은 죄벌을 억울하게 받는다 하여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북 지방의 월경 금지는 실로 오늘날의 급무이다. 묘당(廟堂)에서 별도로 법식을 정하여 엄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수흥 등이 아뢰기를,

"금령을 범하는 문제는 매번 우리 나라 사람에게서 비롯되고 있으니, 별달리 신칙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금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종조에서 대신이 변방을 순시한 일이 있었으니, 이는 변방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만약 명망이 현저한 사람을 선발하여 어사(御史)로 삼아서 매년 산삼을 캐는 시기에 보내어 규찰케 한다면 거의 금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물러가서 묘당과 상의하여 품정(稟定)토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6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야(野)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司法)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壬午/命招時任原任大臣引見, 示陳奏使鄭載嵩等狀啓別單曰: "其詬責絶悖之言, 實丙子以後所未有之辱也。 蓋使臣鄭載嵩等, 聞有罰金之辱, 呈文禮部, 禮部題本, 以不啓國王, 妄先呈文, 爲罪入奏, 胡皇怒未已, 禮部侍郞敖哈, 告其皇帝曰: ‘朝鮮使臣負罪, 雖不須賞, 其餘正官等, 似當依例接待。’ 胡皇大怒, 曳下責之, 革職黜送云。 禮部復摘其呈文中語, 以爲《書》曰: ‘宥過無大。’ 然, 又曰: ‘刑故無小, 屢犯禁不悛, 至戕害我人民。’ 此過乎? 抑故乎? 矜憐非故, 姑示薄懲, 彼乃不辭以大過自居, 而妄求寬于君父, 其狂悖一也。 《春秋》原情定罪, 乃衛侯燬滅, 胡安國傳, 文其解經, 特重衛侯之罪, 言其情不可恕也。 《春秋》原情之輕重, 無有假借, 皇上軫恤邊氓, 該國所悉也。 而輒害之, 曾無忌憚, 謬引先儒之語而不知《春秋》誅貶之義, 其狂悖二也。 刻印銷印, 是方爭君臣未定之謀, 豈所語于令出惟行信賞必罰之大政, 其狂悖三也。 《易》曰: ‘渙汗其大號, 言號令如汗, 汗出而不可反也。’ 劉向之規其主, 正謂出令不踰時, 而反是爲反汗, 此人主之大戒也。 今乃云亟賜反汗, 其狂悖四也。 引《書》 伊尹言匹夫不獲自盡, 而妄撰爲聖王恥之, 亦非臣子引愆謝罪時所宜言, 其狂悖五也。 夫彼國雖小, 君臣之分, 繄豈獨無? 卽使果有冤抑, 該國王應上章自明, 乞哀祈請, 豈有幺麽卑賤, 不告其君, 輕弄筆端? 皆由其國弱臣强, 若非我朝護持, 不知幾經簒竊, 鬼蜮面目, 魑魅伎倆, 其在彼國, 旣習爲橫逆, 無所逃死, 輒自露于光天化日之下, 我皇上視薄海內外爲一家, 申大倫行大義, 亦不容使外服, 有此無君之臣, 法在有司, 必罪無赦, 相應將鄭載嵩等嚴拿發, 與該國王從重治罪, 竝將此情節, 一一傳與該國王知悉, 其他辭語之間, 詆辱國家悖慢之言, 罔有紀極, 有不忍見者。" 壽興等看訖曰: "彼國雖强, 未嘗輕視我國, 自入中國, 漸至驕傲, 至于今日, 肆辱如(比)〔此〕 , 將來之憂, 有不可言。" 上曰: "庚寅間勑行絡繹, 事機危急, 而未有如今日之辱矣。 受侮至此, 將來之憂, 誠如卿等言, 禮部之官, 欲爲周旋, 而至於歐出革職, 其意誠叵測也。" 壽興等曰: "退却呈文, 猶或可也。 拈出文字, 逐條論罪, 實是意外也。" 上曰: "彼怒如許, 謝恩使似當進期發送也。" 壽興等曰: "使臣議罪一款, 不可遲延, 謝使之行, 倍程入去, 以示驚動之意可也。" 上曰: "使於五月內進行, 而大臣爲國呈文, 反遭無前之辱, 心甚痛惋, 又從而罪之, 予實不忍。" 壽興等曰: "聖敎如此, 孰不感動? 形勢所壓, 有不得已者, 先朝相臣李景奭, 亦因見過於彼國, 革職廢置, 今此勘罪, 亦當革職, 無前之辱, 至及上躬, 大臣雖橫被罪罰, 亦不暇恤也。" 上曰: "西北犯越之禁, 實爲今日之急務, 廟堂別爲定式嚴禁。" 壽興等曰: "犯禁之患, 每自我國人始, 若不別樣申飭, 終不可禁矣。 祖宗朝, 大臣有巡邊之事, 蓋爲彈壓邊地也。 今若以名望表著之人, 選爲御史, 每趁參節, 發遣糾察, 則庶可禁斷。" 上曰: "退與廟堂相議稟定。"


  •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6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야(野)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司法)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