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 이진안의 일에 대해 다시 의논하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또한 입시(入侍)하게 되었다. 임금이 윤이(尹理)에 대하여 김수항에게 물었다.
김수항이 말하기를,
"신은 그의 사람됨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요사이 은대(銀臺)에 처하여 있는 자들과 비교하여 보면 그에 미치지 못할 자가 없는 듯합니다. 대간의 아룀은 신은 그것이 합당한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일찍이 이 사람을 보았다. 대간(臺諫)이 아뢴 것이 진실로 합당하지 못하다."
하였다. 김수항이 이어서 아뢰기를,
"어제 이진안(李震顔)의 소가 이르렀을 적에 정원(政院)에서 앞질러 먼저 진계(陳啓)하였기에 특히 정거(停擧)하라는 벌을 내리셨습니다만 이 처분(處分)은 합당하지 못하므로 사람들의 여론(輿論)이 답답해 하고 있습니다. 대개 실록(實錄)을 고쳐서 수찬(修撰)하였을 때에 이단하(李端夏)가 강도(江都)에 있었던 일을 알고자 하여 사사로이 윤증에게 물었었는데 윤증이 이이(李珥)의 일을 끌어다가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유학(儒學)을 배우는 자가 이제 와서 그 문제를 제기(提起)하여서 통문(通文)을 돌리는 데에까지 이른 것은 타당(妥當)하다고는 이르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들의 마음가짐이 있는 데가 있었으니 그를 깊이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관(史官)들이 몸을 바쳐 담당하여 문득 그들에게 유벌(儒罰)을 더하였고, 조정에까지 추급(推及)한 것은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윤증의 편지에 ‘율곡(栗谷)이 참으로 산에 들어갔었던 과실(過失)이 있다.’고 하였고, 이러한 망발(妄發)로부터 ‘선인(先人)은 처음부터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고까지 말한 것은 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의 뜻을 보면 ‘이이(李珥)는 참으로 과실이 있었고 그리고 그의 아비는 원래 과실이 없는 것같이 되었으니 어찌 그를 변파(辨破)하지 않겠습니까? 강도(江都)의 일에 대하여는 벌써 그의 아비가 임금에게 고하여 스스로 구차스럽게 면하였다고 말하였는데 그의 아들이 말하기를,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또는 전혀 사실이 아닌 일을 끌어다가 편지에 쓰기를 아무개는 참으로 산에 들어갔었던 과실이 있었다고 했으니 참으로 선현(先賢)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윤증이 근자에는 비록 일을 잘못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본래 중한 명망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말을 증명하여 이루어주면 훗날에 사악한 의논들이 반드시 이를 가지고 구실삼게 될 것이니, 선현을 해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진안의 상소는 정거(停擧)할 죄가 못되고 단지 선정(先正)을 위하여 변명하고 배척하였던 것인데 여러 승지(承旨)들이 말을 하여 윤증을 두둔하기를 마치 전혀 과실이 없는 것같이 하였습니다. 또 윤선도(尹善道) 등의 소장(疏章)을 받들어 들였을 때만 하여도 앞질러서 먼저 진계(陳啓)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번 것은 유자(儒者)의 소에 관계되는 것인데도 먼저 저격(沮格)하였기에 성상의 교명이 ‘위험하므로 특히 정거의 벌을 베풀라’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좋아하고 미워함이 마땅함을 잃었음을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사관(史官)들이 윤증을 위하여 나누어 소를 올리면서 송시열(宋時烈)이 무함(誣陷)받았던 일을 끌어다가 윤증이 오늘날 당하고 있는 일에 비유하였습니다만 어찌 다르지 않겠습니까? 송시열에게는 당시 여러 소인(小人)들이 역률(逆律)로 얽어 매었으니, 이 일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윤증(尹拯)은 그 아비의 일로 이이(李珥)에게 비유하였으니, 이는 이미 말할 것도 못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관(史官)들은 오늘날의 일로써 송시열이 당하였던 것에 비유하려 하였으니, 이는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이 극렬히 말하기를,
"윤선거(尹宣擧)는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이진안(李震顔)의 상소가 매우 정당(正當)하지 못하니, 죄를 다스리지 아니할 수 없으며 성상께서 처분(處分)하신 것이 지나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으나, 김수항(金壽恒)이 이어서 말하기를,
"그 때의 무리들이 전적으로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하여 물리치고자 하였기에 모두 윤증(尹拯)의 편이 되어서 그의 잘못을 말하는 자가 있지 않았습니다. 송시열(宋時烈)이 내려가는 날에 옥당(玉堂)과 태학(太學)에서 그가 머물러 있기를 청하지 아니하여서 대우(待遇)하기를 도리어 자기들 가운데에 소위(所謂) 맑은 명성(名聲)과 곧은 절조(節操)를 가졌다고 하는 이만도 같지 못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개연(慨然)할 일입니다. 이진안(李震顔)에 대한 벌은 도로 거두어들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논을 주동(主動)한 사관(史官)은 마땅히 파직(罷職)의 벌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소대(召對)를 파한 뒤에 정언(正言) 김경(金澋)이 아뢰기를,
"사관(史官)을 파직(罷職)하는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6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6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歷史)
○丙申/召對玉堂官。 領議政金壽恒亦爲入侍。 上問尹理於壽恒。 壽恒曰: "臣未詳其爲人, 而比之近日處銀臺者, 似無不及, 臺啓臣未知其恰當。" 上曰: "予亦曾見此人, 臺啓誠過當。" 壽恒仍進曰: "昨日李震顔疏到, 政院徑先陳啓, 特下停擧之罰, 處分過當。 物情拂鬱。 蓋實錄改修時, 李端夏欲知江都事, 私問於尹拯, 拯引李珥事爲言。 學儒之到今提起, 至於通文, 可謂未妥。 而所執有在, 不可深攻。 史官等挺身擔當, 遽加儒罰, 推及朝廷, 殊極非矣。 拯書所云: ‘栗谷眞有入山之失云者,’ 自是妄發, ‘先人初無可死之義云者,’ 尤涉可疑。 觀其辭意, 有若珥眞有失, 而其父元無所失者然, 何可不爲辨破也? 江都事, 其父告君, 自言其苟免, 而其子乃曰: ‘無可死之義, 其可乎哉?’ 且引全不襯着之事, 筆之於書曰: ‘某也眞有入山之失,’ 殊無尊畏先賢之意。 拯近雖誤事, 以素負重名之人, 證成其說, 他日邪議, 必將藉口, 害於先賢, 不可勝言。 震顔之疏雖不稱停, 只爲先正辨斥, 而諸承旨費辭護拯, 有若全無所失者然。 且如尹善道等疏章捧入之時, 未聞徑先陳啓, 而此則係是儒疏, 而先自沮格, 乃至於是聖敎至以危險, 特施停擧之罰。 好惡未免失當。 且史官等, 爲拯分疏, 引宋時烈被誣, 而比拯今日之事, 豈不異哉? 當時群小之構以逆律, 與此事有何干涉? 拯之以其父事比之李珥, 已甚無謂。 史官之以今日事, 比之於時烈所遭尤極無據。" 副提學崔錫鼎極言: "尹宣擧無可死之義, 震顔之疏甚不正, 不可不治。 自上處分, 未知其過當。" 壽恒仍言: "時輩專欲排擯宋時烈, 故皆右拯, 莫有言其非者。 宋時烈下去之日, 玉堂太學不爲請留, 待之反不如自中所謂淸名直節者, 誠可慨然。 震顔之罰, 不可不還收。 發論史官, 宜施罷職之罰。" 上允之。 罷對後, 正言金澋啓: "請還收史官罷職之命," 不從。
- 【태백산사고본】 18책 16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6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