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성 이선이 상소하여 척속의 사봉·체직의 폐단 등에 관해 아뢰다
대사성(大司成) 이선(李選)이 상소(上疏)하기를,
"대론(臺論)에 시원하게 윤허(允許)를 내려 주시어 받아들이는 아량을 넓히고, 척속(戚屬)에게는 다시 중비(中批)하여 사봉(斜封)197) 의 비난을 남기지 말도록 하였으며, 전형(銓衡)을 하는 곳에서 적당하지 않은 사람을 함부로 올리는 것을 신칙하고, 언로(言路)에서 일이 격양(激揚)되도록 힘쓰는 것을 책망하니, 간절히 구언(求言)하시는 뜻이 또한 헛되고 상투적인 것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지난날 간(諫)하는 신하가 상소하여 논하면서, 명성이 높은 한 벼슬아치가 남쪽 고을[南邑]에 가서 어버이를 만나뵙겠다 하여 봉명(奉命)198) 의 직임(職任)에 임명되기를 도모하였다가 그 아비가 상경(上京)하게 되자 즉시 병(病)을 핑계하고서 체임(遞任)되도록 도모하였다고 하는데, 자신의 편의대로 한 것이 심하였는데도 끝내 규탄하는 일이 없었으니, 또한 공의(公議)가 시행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대개 북평사(北評事)를 설치한 때부터 만약 어버이에게 병이 없으면 일찍이 체임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을묘년199) 이후로 응당 가야 할 사람들이 관직을 임명받는 데에만 급급하고 변방에 가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당시의 권세 있는 간신(奸臣)이 그들의 뜻에 굽혀 따라서, 폐단이 있어 번거롭다 하고 혁파(革罷)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혁파(革罷)할 수는 없었으니, 그들도 또한 이를 알았으므로 즉시 곧 또다시 설치하였는데, 이에 말미를 받아 왕래하는 길을 열었던 것입니다. 그때 물러나 있던 사람들이 세상의 도의(道義)를 개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당로(當路)200) 에 도로 들어와서는 진실로 전철(前轍)을 한번 뒤집어야 할 것인데도 그렇지 하지 못하고서 혹은 사국(史局)의 일로 체임되기도 하고, 혹은 눈병[目疾]으로 가는 것이 지체되기도 하였으니, 지난날 가기를 꺼렸던 자에 비교해 보면 반드시 다른 바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통신사(通信使)에 이르러서는 또 전대(專對)201) 할 만한 재능을 지닌 사람을 특별히 선택하기 때문에 눈앞에 비록 부모(父母)가 있는 자라 하더라도 일찍이 가볍게 체임을 허가하지 않았었는데, 이에 오늘날에는 이미 임명했다가 도로 체임되기도 하여 체임되기를 도모하는 청원이 시행되고 있으니, 그것도 또한 전례(前例)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래도 정리(情理)에 핑계할 수 있지만, 심지어 코피가 난다고 해서 체임된 자는 며칠만 섭생을 하면 마땅히 가지 못할 이유도 없는데, 묘당(廟堂)에서 갑자기 아뢰어 체임시켰으므로 실로 그 연유를 깨닫지 못하겠으니, 또한 그 사람에게 속임을 당한 것은 아니겠습니까? 통신사(通信使)가 서울에 있을 때에는 그 집안에 숨어 엎드려서 병(病)으로 집속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같이 하다가, 그가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남쪽으로 향한 후에 이르러서는 나와서 직무에 이바지하는 것이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설사 당초에 아픈 바가 과연 가볍지 않았다 하더라도 형적의 의심스러운 바가 이와 같으니, 사람들의 비난하는 말을 초래하게 됨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대각(臺閣)에서 규탄하지 못하고 전조(銓曹)에서 벌(罰)을 적용하지 못하며, 잡아다가 심문하자고 아뢰는 것은 단지 종실(宗室)에만 미쳐서, 청요(淸要)202) 의 관직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거듭 돌아가게 되니, 이것이 사사로운 뜻이 횡행하고 공공의 법[公法]이 시행되지 않는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또한 대개 신명규(申命奎)에게 병든 어미를 뵙도록 허가한 것은 실로 드문 일이니 그로 인하여 길을 열어줄 필요는 없으나, 다만 같은 때에 정리(情理)가 더욱 참혹하고 절실한 자가 있으면 어찌 똑같이 시행을 허락하여 우로(雨露)의 은택을 고르게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명천(柳命天)처럼 그 80세된 노모(老母)의 상(喪)을 당하고서도 달려가 곡(哭)하지 못한 자가 이것입니다. 신(臣)은 장후량(張後良)의 일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여러 해 전[昔年]에 정금(鄭錦) 휘하의 임인관(林寅觀) 등이 표류하다가 대정(大靜)에 도착하였는데, 조가(朝家)에서 형세에 구애되어 상사(上司)에 치보(馳報)한 이유로써 지방관(地方官)에게 죄를 돌려 파직(罷職)시키고 폐고(廢錮)203) 하도록 논계(論啓)하였었는데, 지금 장후량(張後良)은 상사(上司)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써 마침내 죄를 받고 죽기에 이르렀으니, 조가(朝家)의 처분이 또한 앞뒤가 같지 않음이 없겠습니까? 신(臣)은 을묘년204) 무렵에 순무사(巡撫使)로 제주(濟州)에 갔었는데, 조정에서 명(命)을 받기를 무릇 중국 배로서 표류하여 도착하는 것은 육지에 올라오도록 허락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한 장계(狀啓)로 하여 알리지 말라는 뜻을 목관(牧官)205) 에게 비밀히 유시하여 영구히 준행하는 근거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장후량이 다시 이로 인하여 죽게 되었으니, 저 바다 밖의 멀리 떨어진 곳에만 어찌 유독 그 명령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입니까? 다시 묘당(廟堂)에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 뜻에 응하여 말을 아뢰었으니, 내가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하였다. 이때 정제선(鄭濟先)이 호남 추고 경차관(湖南推考敬差官)이 되었는데, 병(病)을 핑계대고 체직(遞職)되기를 도모하였다. 북평사(北評事)로는 처음에 오도일(吳道一)을 임명하여 보내었는데, 이 당시 사국(史局)의 임무를 겸하고 있다 하여 대신(大臣)이 아뢰어서 체직시켰고, 그 대신이었던 박치도(朴致道) 역시 병으로 체직되었었다.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從事官) 임영(林泳)은 어버이가 나이 70세라 하여 체직되었고, 그 대신이었던 신엽(申曅) 역시 코피가 나는 병이 있다고 대신(大臣)이 또 아뢰어서 체직되었으므로, 이에 송화 현감(松禾縣監) 박경후(朴慶後)를 임명하여 보내었었다. 그러므로 상소가 이에 미친 것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92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탄핵(彈劾)
- [註 197]사봉(斜封) : 비스듬히 봉(封)한 사령서(辭令書). 대개 조정을 거치지 않고 궁중에서 청알(請謁)에 의하여 벼슬을 제수할 때 비스듬히 봉하였기 때문임.
- [註 198]
봉명(奉命) :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지방에 감.- [註 199]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註 200]
당로(當路) : 요직(要職).- [註 201]
전대(專對) :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응대하여 군명(君命)을 완수함.- [註 202]
청요(淸要) : 청환(淸宦)과 요직(要職).- [註 203]
○乙未/大司成李選上疏曰:
臺論快賜允兪, 以恢聽納之量。 戚屬勿復中批, 以貽斜封之譏。 銓地飭其妄進非人, 言路責其務事激揚, 則其於懇惻求言之旨, 亦不歸於虛套矣。 向日諫臣疏論一名官, 爲其覲親於南邑, 圖差奉命之任, 及其父上京, 旋卽托病圖遞。 其自便甚矣, 而終無糾劾之擧, 亦可見公議之不張也。 自夫北評事之設立也, 若無親病, 則未嘗許遞。 而乙卯後, 當往之人急於做官, 厭赴塞上。 當時權奸, 曲循其意, 諉以有弊而革罷。 然其終不可罷, 渠亦知之, 故旋又復設, 乃開受由往來之路。 其時屛退之人, 莫不爲世道慨歎, 及至還入當路, 誠宜一反前轍, 而乃不能然, 或以史事而見遞; 或以目疾而滯行, 視向日憚行者, 未必有異焉。 至於通信使, 又是別擇專對之才, 故目前雖有父母者, 未嘗輕易許遞, 而乃於今日, 旣差還遞, 以售圖遞之願, 其亦異乎前例矣。 然此猶可諉於情理, 而至於以衂血而見遞者, 數日調治, 宜無不能作行之理。 而廟堂之遽爾啓遞, 實未曉其由, 毋亦見欺於人耶? 當信使在京之日, 隱伏其室, 有同病蟄之人。 及其踰嶺向南之後, 則出而供職, 無異平常。 設使當初所患, 果非輕歇, 而形迹之可疑如此, 則人言之來, 烏得免乎? 臺閣不能糾劾、銓曹不能用罰, 拿問之啓, 只及於宗室, 而淸要之職, 荐歸於此人, 此無非私意橫流, 公法不行之致。 且夫申命圭之許覲病母, 實是稀闊之擧, 不必仍開其路, 而第同時而情理之尤有所慘切者, 則何可不一體許施, 以均雨露之澤也? 如柳命天之喪其八十老母, 而不得奔哭者是爾。 臣於張後良事, 亦有所未曉者。 昔年鄭錦標下林寅觀等之漂到大靜也, 朝家拘於形勢, 至以馳報上司, 歸罪地方官, 論罷廢錮矣。 今後良以不報上司, 竟至受罪而死, 朝家處分, 無亦前後之不同耶? 臣於乙卯年間, 以巡撫使赴濟州, 受命於朝, 凡唐船之漂到者, 勿許登陸, 亦勿狀聞之意, 密諭牧官, 以爲永久遵行之地矣。 今後良更以此而死, 則彼海外絶域, 何獨尙存其令耶? 似當更詢廟堂而處之。
答以應旨進言, 予用嘉之。 時, 鄭濟先爲湖南推考敬差官, 托病圖遞。 北評事始以吳道一差出, 而以方帶史局之任, 大臣啓遞, 其代朴致道又以病遞。 通信使從事官林泳以親年七十遞, 其代申曅又以有衂血病, 大臣亦啓遞, 乃以松禾縣監朴慶後差送, 故疏及之。
-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92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탄핵(彈劾)
- [註 198]